제175화
제25편 대련 혹은 결투 (2)
길에서 나눈 대화가 갑자기 큰 이벤트가 되어버렸다.
결투 비슷한 대련을 하기 위해 연무장으로 가는 동안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따라오는 학생들이 점점 늘어났다.
이래서야 제대로 싸울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더구나, 결투라고 해버렸으니, 귀족의 명예와도 관계있는 승부가 되어버렸다.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결투에 져버리면 죽지 않더라도 명예에 큰 타격이 있을 게 분명했다.
차라리 몇몇 관계자만 있는 곳에서 승부를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에 내게 도전한 건방진 신입생을 돌아보았지만, 신입생 놈은 그런 걱정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신입생 놈은 여자 동기 옆에 붙어서 잘난 척을 하고 있었다.
예쁘기는 하지만, 후작가 자제가 저렇게 달라붙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더구나, 여자에게서 은근히 풍겨오는 마나가 꽤 꺼림직했다.
육체 강화형이 아니라서 제대로 실력을 알기는 어려웠지만, 상대하기 꺼림직한 느낌이 솔솔 풍겨왔다.
발레아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어딘가의 대귀족 자녀일까. 아니면 발레아처럼 발이 넓은 성격이려나.
하지만, 후작 아들을 상대하는 것을 보니, 그렇게 사근사근한 성격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주위에 사람들이 몰린 것을 보면 카리스마 가득한 여왕님 같은 타입일지도 몰랐다.
아니, 아니,
꺼림직한 느낌이 들어, 괜히 다른 신입생에게 신경을 써버렸다.
여자애는 어쨌건 간에, 저 꼴을 보니, 사람들 없는 곳에 가서 싸우자는 말을 꺼내기 싫어졌다.
이렇게 되면, 전부 후작 아들 네놈 잘못이다.
박살이 나서 후작 명예가 땅에 떨어져도 절대로 내 탓이 아니었다.
나도 공작가에서 전처럼 쓰레기 취급은 당하지 않으니, 후폭풍 걱정에 전처럼 벌벌 떨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과 함께, 우리는 가까운 연무장으로 향했다.
수업이 끝난 연무장 가운데 나는 후작 아들과 마주 섰다.
이곳은 관객석까지 있는 교육용 연무장이었다.
가까운 연무장으로 가자더니, 아예 구경거리가 될 생각이었나.
봐줄 생각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연무장이 내려다보이는 관객석에 사람이 모여들었다.
신입생과 재학생들, 어떻게 이야기를 듣고 왔는지, 기사와 교사들도 보였다.
학생 중에는 간식까지 꺼내 먹으며 구경하는 인간들도 있었고, 한쪽에서는 내기하는지, 이리저리 돈이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좀 이상했다.
아무리 소문이 빨라도, 이렇게 모일 리가 없는데.
내가 관객석을 보며 의아해하자, 후작 아들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오늘 제가 2학년 최강자와 싸운다고 미리 모두에게 말해놓았었습니다."
이놈 짓이었다.
봐주기는커녕 뼈마디를 분질러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유물 주머니에 든 대검을 뽑을 수는 없었다.
나는 허리에 찬 두 개의 검 중에 아카데미 장검을 꺼내 들었다.
내가 검을 뽑자, 후작 아들도 검을 꺼냈다.
저거, 아카데미에서 준 장검이 아닌데.
내가 슬쩍 허리를 두들겼다.
[본적이 없는 무기입니다. 용사들이 쓰던 무기는 아닙니다.]
허리에 찬 단검에서 무뚝뚝한 대답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그동안 말을 못 하게 해서 단검이 삐진 것 같았다.
어쨌거나 용사가 쓰던 유물이 아니라면 별 상관없었다.
하긴, 용사 유물을 이렇게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닐 터였다.
그래도 오래된 것처럼 보이니, 유물은 맞는 것 같았다.
유물이 많은 가문이라더니, 아카데미에 보낸 자식에게도 유물 무기를 들려준 모양이었다.
나와 후작 아들이 검을 들자, 관객석이 조용해졌다.
심판은 없었다. 갑자기 결정된 것이어서, 심판을 볼 만한 사람이 없었다.
대신 우리를 대신해서 신입생 한 명이 결투를 선언해줬다.
"지금부터 가엘 드 피센과 알렉스 데 그레시아의 결투가 시작됩니다. 승자가 패자의 목숨을 가져가는 대신, 귀족의 명예를 걸고 패자가 승자의 요청을 한 가지 들어주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선언한 신입생도 후작 아들과 소녀와 같이 있던 학생이었다.
이 신입생도 풍기는 기품이 평범하지 않았다.
이건 또 어디의 귀족인지.
이 아카데미가 대단한 건지, 아니면 후작 아들이 속한 그룹이 대단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이제 결투가 선언되었으니 물릴 수도 없었다.
어차피 아까 서로 이야기를 한 뒤에는 무르기도 어려웠지만,
이제는 완전히 이곳에서 결론을 지어야 했다.
대련이 아니라 결투라는 말에 관객석의 학생들이 웅성거렸지만, 목숨을 빼앗지 않는다는 말에 소란이 가라앉았다.
찾아온 기사와 선생들도 움직이지 않았고, 결투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나는 싸우기 전에 후작 아들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왜 결투를 신청했는지, 이유나 알자."
"아니, 결투를 신청하려고 한 것은 아닌……."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자신감이 가득 돌아왔던 후작 아들은 결투라는 말에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거, 싸우기 전에 정신 공격이라도 한 것 같았다.
어쨌거나 이유는 들어야 했다.
여자에 빠진 바보같이 보이는 놈이었지만, 실력이 있는 후작 아들이 진짜 바보는 아닐 것이다.
"피센 후작님의 아들이라면 이렇게 공개적으로 싸우게 되면 이기건 지건, 뒤가 골치 아프다는 것 정도는 알 텐데. 더구나 내 출신까지 더해지면 더 귀찮아질 테고."
공작 아들에게 졌다는 것은 그럴 수도 있다는 느낌이지만, 공작 서자에게 졌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이 정도로 알려진 결투였다. 사람이 죽지는 않지만, 명예에는 큰 상처가 될 게 분명했다.
분명, 싸움을 걸면서 질 생각은 안 했겠지만, 후작 아들 정도 되어서, 뒷생각을 아예 안 하고 싸움을 걸 리는 없었다.
내 형 마누엘도 어렸을 때부터 그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카데미에 온 뒤에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낡은 관습이나 체계는 이제 저에게는 더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실력만이, 그리고 나를 이끌어 줄 사람이 있으면 그만입니다."
그는 말을 하다가, 슬쩍 관객석 쪽을 돌아보았다.
관객석 맨 아래. 소녀와 그녀의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그를 이끌어 주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물론, 이해는 안 갔지만,
'정신 능력 같은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정신 능력을 쓰는 몇 사람을 보긴 했지만, 호감이나 사랑에 빠지게 하지, 이렇게 이성적으로 존경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정신 능력이 아니라 뭔가 제대로 된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결투 전에 그 이유까지 물어보기는 무리였다.
의문이 풀리기는커녕 더 커졌지만, 이제 싸울 시간이었다.
나는 앞에 선 후작 아들을 살펴보았다.
덩치는 나보다 크고, 기사급 실력을 지닌 신입생이라.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후작 아들이 그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으면, 소문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천재가 입학했다고 떠들썩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소리를 듣지 못했었다.
어떻게 된 거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녀석이 내게 시비를 걸었다.
"먼저 공격하십시오."
검을 늘어뜨리고 말하는 꼴이, 분명 고수가 하수에게 말하는 투였다.
하도 어이가 없으니, 이제는 화도 나지 않았다.
그래도, 제대로 가르쳐 줘야 할 것 같았다.
마나를 풀어 압박을 줘도 되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가면서 검을 휘둘렀다.
부우웅.
"윽!"
허공에 휘두른 검에 후작 아들은 급히 물러섰다.
'감은 나쁘지 않네.'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웅성거렸고, 후작 아들도 왜 자기가 물러섰는지 의아해했지만, 물러서지 않았으면 어디 한군데 베였을 것이었다.
지금 내 눈에는 붉은 광선검처럼 보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아지랑이가 내 장검 끝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조금 전, 보이지 않는 마나 검기가 후작 아들이 있던 자리를 자르고 지나갔었다.
"난 공격했다."
먼저 공격하라는 말에 허공에 검을 휘둘러버린 것이었지만, 한 발 물러서 버렸으니, 그가 내 말에 반박하기는 불가능했다.
"칫!"
거기다, 내 검이 무섭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후작 아들이 달려들었다.
걸음도 빠르고, 생각보다 빠른 검이 쏘아져 왔다.
검을 휘둘러 다가오는 검을 막아냈다.
쾅!
"큭!"
검이 부딪치고, 후작 아들이 이를 악무는 게 보였다.
'어라?'
하지만, 나도 어리둥절했다.
검이 의외로 묵직했다.
분명 첫 합에 검을 날려버릴 생각이었는데, 후작 아들이 내 검을 받아낸 것이다.
검의 속도와 위력은 확실히 내 생각보다 위였다.
그렇다면 다른 것은 어떨까?
바로 끝낼 생각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생각보다 재미있고 신기한 상대였다. 한번 제대로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마나를 더 끌어올리고, 검의 속도를 높였다.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닌, 심법과 검술로 검을 움직였다.
캉!
카앙!
캉!
검이 점점 빨라지고, 교묘해지자, 후작 아들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이빨을 너무 깨물었는지 입에서는 피가 흘렀고,
하지만, 후작 아들은 이것도 버텨냈다.
분명, 싸우기 전에는 이 정도 실력이 아니었다.
처음 검을 휘두를 때도 지금 내 검을 받아낼 실력이 아니었다.
카앙!
나는 힘껏 검을 휘둘러 놈을 밀어낸 뒤에 입을 열었다.
"실시간으로 강해지는 것 같은데, 그런 능력도 있나?"
"헉, 헉, 봤지? 당신이 아무리 강해도 나는 따라잡을 수 있어. 이게 다 브라아나가 내게 준 힘이다."
물어봤다고 이렇게 술술 이야기하다니, 놈은 바보가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싸우면서 강해지게 만들어주는 능력이 있을 수 있나?
그게 사실이면, 왜 후작 아들이 입학했을 때 내가 몰랐는지 이해가 되었다.
후작 아들은 입학한 뒤에 빠르게 강해진 것이었다. 지금 나와 싸우면서 강해진 것처럼.
그렇게 강하게 해주니, 사람을 숭배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나는 관객석에 앉아있는 소녀를 힐긋 쳐다보았다. 소녀는 무심한 얼굴로 후작 아들을 보고 있었다.
소녀의 차가운 눈을 보니, 마치 실험용 쥐를 보는 연구원의 눈 같았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 페널티 없이 저렇게 계속 강해진다는 게 있을 수 있는 걸까?
그런, 반칙 같은 능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그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이 없지는 않았다.
내 '사자회귀'도 따지고 보면 그 이상으로 말도 안 되는 능력이었다.
다만, 아쉽게도 후작 아들의 희망은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 같았다.
캉!
그그그극!
텅!
검을 계속 섞어보니, 이 능력의 한계를 알 수 있었다.
우선, 힘과 속도, 반사신경은 계속 성장했지만, 심법이 바뀌지도, 검술이 늘어나지는 않았다.
능력이 추가되고, 검술까지 능숙해졌다면 정말 놀랐겠지만, 그냥 그 자체의 육체 스탯과 마나가 올라갔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 정말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나를 이길 수 없었다.
거기다, 아쉽게도 무한정 성장하는 능력이 아니었다.
한계가 있었다.
어느 순간, 힘도 속도도 반응 신경도 더 늘지 않았다.
기사급에서 선임 기사급 이상으로 성장했지만, 더는 강해지지 못했다.
그것도 선임 기사와 싸우면 이기기 어려워 보였다. 기술도 경험도 현직 기사들보다 많이 떨어졌다.
한참 싸우니 대충 알 것 같았다. 어떤 식으로 순식간에 강해지는지, 그리고 어디가 한계인지.
정말 대단하지만, 한계가 뚜렷한 능력이었다.
확인이 끝난 나는 검을 휘둘러 후작 아들을 쓰러뜨렸다.
바닥에 처박힌 그는 멍한 눈으로 소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를 보지 않았다.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관심이 없었다. 다른 학생들에게는 엄청난 능력이겠지만,
내게는 의미 없는 능력이었다.
내게는 그녀보다, 바닥에 쓰러진 후작 아들이 더 중요했다.
새로운 호구에게 받아낼 것이 많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