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제24편 대련 혹은 결투 (1)
실내 훈련장에 노인과 내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나는 두 개의 검을 들고 있었고, 노인은 꼬챙이처럼 보이는 검을 들고 있었다.
지팡이에 넣어야 해서 저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세우타 공작이 들고 있으니, 전혀 꼬챙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세우타 공작은 마나를 잃었지만, 검술 훈련은 멈추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지팡이를 짚고 있던 몸을 펴니, 몸은 좀 가냘팠지만, 키는 다른 기사와 비슷해 보였다.
먼저 공격하라는 공작의 말이 떠올랐지만, 바로 공격하기는 불가능했다.
몇 년 전이었으면 그냥 공격해 들어갔겠지만, 지금의 난 어느 정도 상대의 능력을 가늠하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마나로 감지하는 것도 아니었고, 감각으로 파악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노인의 실력을 알 수 있었다.
지금 노인은 그레시아 공작보다 아래가 아니었다.
뒷머리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재미있군. 설마, 알고 못 들어오는 건가?"
세우타 공작이 꼬챙이 같은 검을 들고 한 걸음 앞으로 움직였고, 나는 움찔 뒤로 물러섰다.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있었으면 베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대치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노인의 말대로 유물은 한계가 있었다.
지금도 흘러나오는 마나의 기세가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내 목걸이보다 훨씬 짧은 시간,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짧았다.
"상대를 알아보는 실력은 내 예상보다 뛰어난 것 같지만, 이렇게 대치만 하다가 끝낼 건가."
내가 덤벼들지 않자, 공작이 다시 말했다.
공작이 공격하지 않는 것은 마나를 낭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이렇게 끝날 것 같았다.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다.
질 것 같은 상대에게 덤벼든 것도 처음은 아니었다.
한 발짝 앞으로 걸어갔다.
상대방의 마나 영역 안에 들어간 것도 아니었고, 감각에 뭔가 걸린 것도 아니었지만, 위기감이 피부를 찔렀다.
"마나 감응력이 있나 했는데, 그냥 실력이 좋았던 것이었나."
덕분에 다른 비밀을 숨기고, 오해도 하게 만들었지만,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아갔다.
마치 살기가 가득 채워진 늪에 빠진 것 같았다.
아직 거리가 되지 않았지만, 나는 가득 찬 살기를 베는 기분으로 대검을 휘둘렀다.
검 끝이 일렁거리는 대검이 노인을 향해 빛살처럼 내리꽂혔다.
싸움은 금방 끝났다.
다행히 검이 날아가지도, 바닥에 대짜로 뻗지도 않았다.
예상대로 팔찌에 담긴 마나가 금방 소진되었기 때문이었다.
싸움을 짧았다. 처음 공격과 방어, 몇 차례 공방이 이어졌을 뿐이었다.
검과 검이 부딪친 것은 마나가 소진되기 직전, 한 번뿐이었다.
엄청 짧은 시간이었고, 검을 거의 맞대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만 지쳐버렸다.
그만큼 신경을 많이 썼기 때문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나를 돌리고 있으니, 공작도 팔찌를 빼고 바닥에 앉았다.
공작의 숨도 무척이나 거칠어져 있었다.
하기야, 팔찌에서 마나를 빌렸다지만, 노인의 육체는 어쩔 수 없었다.
오랜 시간 마나 없이 육체를 움직였을 테니, 몸은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 몸에 마나를 밀어 넣고 단장급 기사와 싸운 것이었다.
힘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세우타 공작은 자신의 몸을 신경 쓰지 않았다.
"유물 무기에서 능력을 얻는 식인가? 단검으로 라텐하마르 가문의 능력을 훔친 것처럼 대검도 또 다른 가문의 유물이고?"
대신, 다양한 내 능력의 출처를 추리해냈다.
물론, 반쯤 틀린 추리였고, 내가 그쪽으로 유도한 것이었지만.
"대단하고 신기한 능력이군. 그래서 대공녀 옆에 붙어있는 건가? 유물을 찾으려고?"
뭔가 이상한 쪽으로 오해가 이어지는 것 같았다.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고, 난감한 얼굴로 서 있자니, 공작이 내게 팔찌를 던졌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내게 말했다.
"항상 훈련 전까지 마나를 채워와라. 네놈을 위해 쓰이는 거니, 네놈이 채워야지. 네놈이 채워오는 양만큼 배울 게 많아질 게다."
유물치고는 너무 짧다고 생각했는데, 다 채워오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남에게 줘도 되는 물건인가?
내 반지같이 만약을 대비한 유물 같은데.
하지만, 세우타 공작은 내게 던진 유물 팔찌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거기다, 마나를 더 불어넣으면 노인의 몸이 버티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오히려 호통만 들었다.
"그게 그렇게 쉽게 차는 건 줄 아냐? 거기다, 네가 왜 내 몸 걱정을 해. 그런 것도 다 생각 안 했을까."
분명 즉흥적으로 팔찌를 던진 것 같았는데…….
자신이 괜찮다는데 어쩌겠는가.
나는 대신 다른 것을 물어봤다.
"그럼 합격입니까?"
팔찌를 받은 것만으로도 확실한 것 같았지만, 확답을 들어야 했다.
싸우기 전과 달랐다.
이 정도면 감지덕지가 아니었다.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서 꼭 배워야 했다.
검술은 물론이고, 검술을 펼치며 보여준 심법도 꼭 배워야 했다.
얼마 전, 그레시아 공작과 싸우면서 우리 공작가의 심법과 검술의 극치를 보았었다.
우리 공작가 심법과 검술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자만심이 날아간 순간이었고, 덕분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조금 전도 마찬가지였다.
노인과 몇 합을 나누지 않았지만,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노인이 보여준 검술과 심법은 공작이 보여준 것과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정신세계에서 용사 카를로스가 보여준 검술과 심법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공작이 보여준 것과 달랐지만 같은 용사에게서 파생된 검술이자 심법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세우타 공작의 실력도 알 수 있었다.
팔찌에서 마나를 빌려 쓰는 지금도 그레시아 공작의 실력에 떨어지지 않았다.
마나를 잃기 전에는 얼마나 대단한 실력이었을지.
역시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았다.
"내가 매번 시간을 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오도록 하지. 나와 훈련을 할 때는 여기서 보면 될 거야."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확답을 들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조금 애매한 느낌도 있고, 어떻게 그 나이에 그 실력을 쌓았는지도 궁금하지만, 그건 차차 알아보면 될 것 같고."
대답을 들어서 기뻤지만, 아쉽게도 편한 수업은 안 될 것 같았다.
비밀을 지켜준다고 했지만, 아예 안 들키는 편이 서로를 위해 좋았다.
아니면, 배우면서 조금씩 풀어놓는 방법도 있을 거고.
음. 이편이 좋으려나.
천재 기사라, 어렸을 때부터 천재라는 말을 많이 들었으니,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바닥을 짚는 지팡이 소리가 들렸다.
"다른 것보다 그 팔찌에 마나를 채워 넣을 방법부터 고민해봐라. 여간 까다로운 유물이 아니라서 그 정도 채우는데도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역시, 이 팔찌들은 위험할 때 쓰기 위한 비상용 유물이었다.
"혼자 채우느라 탈진하지 말고, 다른 친구나 공주와 대공녀에게 부탁해봐라."
부탁할 게 따로 있었다.
'대련해줄 노인이 있는데, 마나가 없어서 이 팔찌에 마나를 채워야 합니다. 그러니 이 팔찌에 당신의 마나를 채워주세요.'
라고 말하라는 소리였다.
어디서부터 딴지를 걸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운 부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부탁은 무리였다.
그리고, 부탁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공주가 마나 감응력만 각성했으면 훨씬 쉬웠을 텐데. 근데 그렇게 되면 후계자 문제가 더 엉망이 되었으려나."
노인이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애매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공작은 모르지만, 공주는 마나 감응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나 감응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 더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빨리 차는 걸까.'
나는 손에 들린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팔찌 안에 마나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 정도 속도면 하루가 가기 전에 공작이 채워온 양만큼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다음 훈련 때는 한계까지 채워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훈련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은 무척이나 활기찼다.
수업이 끝나서 학생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동급생들도 있고, 선배들도 보였고, 파릇파릇한 신입생들도 있었다.
나는 생각보다 잘 풀린 일 덕분에 즐겁게 길을 걸어갔다.
카를로스 초대 왕의 검술과 심법은 카트린과 공주의 도움으로 생각보다 빨리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주와 카트린에게 감사를 표해야 할 것 같은데…….'
그냥 모른 체하고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다음 경매에 들려서 작은 선물이라도 마련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 조별 과제 쪽은 좀 여유 있게 움직여도 되려나.'
세우타 공작의 검술과 심법을 배우기 바쁠 테니, 당분간은 먼저 나서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따라다녀도 될 것 같았다.
'대공녀의 능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걷다가 어는 순간, 발을 멈췄다.
감각에 뭐가 걸린 것은 아니었다.
그냥 누가 내 앞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막아선 사람을 보았다.
내 나이 또래의 덩치가 큰 남학생이었다.
그리고, 어깨 견장을 보니, 신입생이었다.
신입생이 왜?
어리둥절한 얼굴로 신입생을 바라보니, 신입생이 입을 열었다.
"알렉스 선배님이시죠? 2학년 기사 학부에서 제일 강하다고 들었습니다."
뒷말을 충분히 알 수 있는 말이었다.
신입생치고는 정보가 빠른 것은 칭찬할 만했지만, 학기 초에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길을 가던 학생들이 모두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재학생들부터 신입생들까지.
어라. 신입생들이 모두 나를 아는 것은 아닐 테니.
생각보다 유명한 녀석인가?
"1학년 중에는 더는 도움이 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배님에게 대련……."
"거절한다."
뻔한 말이 끝나기 전에 먼저 대답했다.
애들 장난에 어울려줄 시간이 없었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봐도 꽤 대단한 실력 같았지만, 그래봤자, 정식 기사 수준이었다.
차라리 뒤쪽에서 구경하는 신입생들 중앙에 있는 여학생이 훨씬 나아 보였다.
'나아 보이는 게 맞는 거였군.'
내가 거절을 하자, 호기 있게 대련을 신청했던 신입생 소년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내가 더 나아 보인다고 생각했던 여학생을 쳐다본 것이었다.
여학생은 눈꼬리를 올렸고, 남학생은 후다닥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크게 소리쳤다.
"피센 후작의 둘째 아들, 가엘 드 피센이 알렉스 선배님께 결투를 신청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나도 입을 딱 벌렸다.
"결투?"
"아, 아니, 대련……."
덩치만 큰 소년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말을 실수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귀족이 한번 내뱉은 결투라는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분명 뒤에서 보던 소녀의 시선 때문에 급하게 내뱉은 말이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신입생 소녀는 소년의 말에 머리를 짚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꽤 뛰어난 능력을 지닌 것 같은 소녀는 1학년 중에서도 유명한 모양이었다.
그건, 그녀 주위에 모인 신입생들을 봐도 알 수 있었다.
내게 결투를 신청한 소년은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나에게 대련을 신청하려다 실수를 한 거였고.
단순히 잘 보이기 위해 한 일인지, 뒤에 있는 저 여자애가 장난을 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후작가 자녀가 이렇게 경솔한 일을 하다니.
아니, 잠깐, 피센 후작가?
피센 후작가면 분명 한참 전에 왕가에서 분리된 가문이었지?
심법으로 이름 높은 가문이었고. 유물도 많이 가지고 있는 부자 가문이었다.
그렇다면 대련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거기다 결투라면?
"결투를 받아들이겠다. 그렇다고 학생들끼리 죽고 죽이면 곤란할 테니, 승부의 결과는 다른 것으로 받는 것으로 하지."
소년은 결투를 받아들인다는 말에 완전히 얼어버렸다가, 죽이는 것 대신에 다른 것을 걸자는 말에 겨우 표정이 풀렸다.
결투가 그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서로 죽여도 문제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 결투 선언이었다.
오래전 형수인 아드리아가 나와 처음 만났을 때, 같은 실수를 할뻔했다.
그녀는 바로 실수를 다잡았지만, 내 앞의 소년은 그럴 기회가 없었다.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요청을 한 가지 들어주는 것으로 하지. 가능한 거로, 귀족의 명예를 걸고."
내 말에 겨우 괜찮아진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
결투를 받아들인 입장에서 내가 죽는 것 대신에 내놓은 의견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보는 상황에서 거절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뒤에서 그가 좋아하는 소녀가 보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그렇게 하죠. 이, 이기면 되니까."
좋아.
착한 호구가 절로 들어왔다.
반지 원정……. 아니, 유물 조사대의 첫 방문지가 지금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