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제22편 기사단 고문 (1)
유물 조사대라는 이름 덕분에 이 조별 과제가 어떤 것인지 전부 알 수 있었다.
초대 왕의 뜻을 따라 용사가 다닌 길을 따라간다는 말은 전부 핑계에 불과했다.
그냥 유물을 찾아다니는 과제일 뿐이었다.
대공녀의 목적대로라면 그중에서도 망가진 유물을 찾는 것일 테고,
그리고, 여기 모인 학생들은 그녀가 유물을 찾는 데 도움을 줄 사람들이었다.
대공녀가 앞에 나선 것도 당연했다.
자신이 벌인 일이니, 나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이 아카데미로 유학을 온 것이었는데, 이상하게 조용하다고 생각했었다.
왕실 창고를 한번 둘러본 것으로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었고.
그런데, 이런 꿍꿍이를 품고 있었다니.
얼마 전에 망가진 유물을 구해다 준 게 억울할 지경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억울하지 않았다. 돈이 얼마인데…….
생각해보니, 공주가 같이 움직이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어찌 되었건 왕자들의 눈을 피하는 것도 공주에게 유리했고, 영지를 돌아다니며 귀족들을 만나 자신을 알리는 것도 이런 시기에는 큰 도움이 될듯했다.
물론, 공주에게는 대공녀와의 친분이 제일 중요했을 터였다.
"용사들이 쓰던 유물을 찾는다라……. 재미있는 과제가 되겠습니다. 저희 제국의 선조들의 흔적도 이 왕국에 남아 있을 테니……."
요하힘도 미리사도 과제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발레아의 표정은 과제 내용은 상관없이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다는 기대감이 가득했고.
솔직히 나도 꽤 마음에 들었다.
유물을 찾는 동안, 용사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었다.
용사의 후손도 볼 수 있을 테고, 흩어진 심법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생각해보니, 구슬을 고치려면 대공녀의 능력도 키워야 했고, 그동안 공주도 지켜야 했다.
그렇게 따지면, 이 과제는 내게 꼭 맞는 과제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이제 겨우 첫 모임일 뿐이었다.
제대로 움직이려면 준비할 게 많았다. 무엇을 찾아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조사부터 해야 했다.
"저는 왕궁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볼게요."
조사가 필요하다는 말에 공주는 왕궁 도서관을 이야기했고, 미리사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자신이 찾아볼 곳을 이야기했다.
"그럼, 저는 아카데미 도서관을……."
"저는 다른 학생들에게 물어볼게요."
발레아는 수많은 친구를 이용하겠다고 선언했고,
"저도 다른 경로로 알아보겠습니다."
대공녀는 다른 귀족들에게 물어볼 것 같았다.
"저도 알아보겠지만, 조사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네요."
요하힘은 미안한 듯 손을 들었고, 나도 그와 비슷한 대답을 했다.
"저도 알아는 보겠습니다."
내가 수도에서 정보를 얻을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도의 뒷소문을 주로 얻는 곳이 용사의 유물에 대해 잘 알 리가 없었다.
그나마 기대하는 것은 그들이 유물을 거래하는 경매장을 하고 있었던 점이었다.
회의를 마치고, 다음 주말에 모이기로 했다.
대공녀는 회의 마지막에 다시 한번 모두에게 사과했다.
무척이나 품위 있는 사과에 요하힘마저 어쩔 줄을 몰라 했고, 모두 만족한 얼굴로 기숙사로 돌아갔다.
나도 기숙사로 향하려는데, 뒤에서 공주가 불렀다.
"말도 없이 정해서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호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사과는 대공녀님께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내 말에 공주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사과하려고 나를 부른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사과를 끝낸 공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번에 왕실 검술을 잘 아는 분을 소개해 달라는 말씀하셨죠?"
"아, 혹시 피해가 되지 않으시면 왕실 기사 한 분을 소개해주실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씀드려본 것입니다."
개학식이 끝나고, 공주와 따로 만나 요청 비슷하게 물어본 말이었다.
어려울 것 같기는 했는데……. 괜히 물어본 건가?
"죄송합니다. 왕실 소속이 아닌 사람에게는 힘들 텐데, 괜히 신경 쓰게 해드렸네요."
이번에는 내가 사과했다.
공주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그레시아 공작가는 왕실과 남이 아니에요. 왕실 검술을 알려주지 못할 이유가 없어요."
아직 왕위 계승권이 남아 있는 그레시아 공작가의 위엄이 절로 느껴졌다.
물론, 왕위 계승권은 서자인 내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왕실 검술을 정식 후계자가 아닌 서자인 내게 가르쳐주는 것도 문제가 생길 여지가 충분했다.
그렇지만, 공주는 그런 것은 전혀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전에는 이렇게 과격한 소녀가 아니었는데……. 발레아에 물든 건가?
그게 아니라면, 설마, 나는 아니겠지?
"그럼, 가능한 겁니까?"
"네. 카트린에게 말해놓았어요. 자세한 내용은 카트린에게 들으시면 될 거예요."
기사들 일이니, 카트린에게 말한 건가. 그럼, 카트린에게 말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공주는 내게 인사를 하고 하녀들과 함께 숙소로 향했다.
나도 기숙사로 돌아가다가, 문득 잊고 있던 게 생각났다.
"잠깐, 카트린은 휴가 중이잖아!"
카트린은 내가 혼자 훈련하는 것을 보고 방법을 찾아본다고 사라진 뒤에 벌써 며칠째 수업에 빠지고 있었다.
약속도 없이 그녀의 집을 찾아갈 수도 없고, 내일은 교무실이라도 찾아가야 하나?
나는 그런 걱정을 하며 기숙사에 돌아갔다.
다행히 교무실에는 찾아갈 필요가 없었다.
다음날 수업에 카트린이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수업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 와 있었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어르신, 아니 흰 수염이 가득한 노인이었다.
기사 학부 학생들은 의아한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다들 처음 보겠지만, 이분은 왕실 기사단의 고문이셔. 수업에 도움을 받기 위해 모셔왔으니, 다들 조심해서 대하도록."
노인이 왕실 기사단의 고문이라는 말에 모두 놀랐지만, 금방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체격도 좋지도 않고, 지금도 노인은 지팡이에 기대어 서 있었다.
"다른 학생들도 봐주시겠지만, 알렉스를 주로 봐주시러 오신 것이니 다른 학생들은 양해해줘."
그제야 다른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숨겨진 전대 기사 같은 분인 줄 알았는데, 진짜, 고문이신가 보네."
"마나도 없고, 몸도 저런데 어떻게 기사가 되냐. 고문도 신기할 판인데."
"혼자 훈련하는 데 도움을 주려고 모신 건가."
"뭐, 가르칠 사람이 없어서 혼자 훈련한다고 하면 다른 사람이 보기도 안 좋으니, 자세라도 봐줄 사람을 부른 거겠지."
학생들이 소곤거리는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나도 처음 봤을 때는 노인이 무협지의 숨겨진 고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노인은 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며칠 동안 수업을 비운 카트린이 데려온 분이었다.
거기다, 어제 공주가 말한 대로라면 노인은 공주가 소개한다는 왕실 기사였을 터였다.
하지만, 학생들 말대로 노인에게는 한 톨의 마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나로 훑어봐도, 감각으로 느껴봐도 평범한 일반인이었다.
'그래도 검술 이론이라도 제대로 가르쳐주면 좋겠는데…….'
원래 왕실 검술과 심법은 얻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어제 공주의 말에 기대가 하늘로 솟구치긴 했지만, 현실을 생각하니, 이 정도도 감지덕지했다.
기사 학부 수업은 오늘도 대련이었다.
며칠 카트린 교수가 없어서 자율학습에 가까운 쉬운 훈련이 이어졌는데, 다시 대련한다고 하니, 학생들은 앓는 소리를 냈다.
기사들이 학생들 앞에 섰고, 카트린도 공주와 대련을 시작했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서 개인 훈련 준비를 했다.
천천히 지팡이를 짚으며 노인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나는 훈련을 시작하는 대신에, 노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뒤, 노인은 내 앞에 서서 나를 훑어보았다.
나도 노인을 살펴보았다.
분명 처음 본 얼굴이었는데,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노인을 본 적이 없었으니, 닮은 사람을 어디서 본 모양이었다.
"분명 마나 심법을 익히고 있다고 들었는데? 왜, 몸이 그 모양이냐?"
왕실 기사단 고문이란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노인은 한눈에 내 몸이 훈련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각성을 '육체 최적화'로 했습니다. 심법은 가문의 기사단에게 배웠습니다."
"그럴 것 같았지, 그런데, 네 심법이 짝퉁 심법이라고?"
나는 놀라서 대련 중인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기사들은 노인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기사들이 배운 심법은 능력으로 구현된 심법을 카피한 심법이 맞긴 했다.
하지만, 대놓고 짝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정말 용감한 노인이었다. 기사들이 들었으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노인이 지팡이로 내 가슴을 가리켰다.
"한번 마나를 움직여봐라."
어차피 왕실 검법을 배우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나는 마나 회로가 만들어진 길로 마나를 움직였다.
"풋, 그게 짝퉁이라고?"
설마, 알아차린 건가? 알아차리는 사람이 없었는데…….
"가문의 심법을 익히다 보면 능력으로 변하는 일도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진짜 가능한 거였군."
휴, 다행히 다른 식으로 오해해주었다.
공작도 말이 없었던 것이 이런 식으로 오해를 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처음 듣는 소리였지만, 알아서 오해해준다면 고마울 뿐이었다.
"네놈은 서자라고 했지. 지금 움직인 건 그레시아 공작가의 심법이니,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숨긴 거냐?"
이럴 때는 따로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비밀은 지켜주지, 재미있군, 육체 최적화에 심법까지 굴리는 16살짜리 꼬마라니."
"그럼, 검술도 펼쳐봐라. 도대체 무슨 도움이 필요한지 봐야겠다."
나는 노인의 말에 식은땀을 흘렸다.
왕실 기사단의 고문이라더니, 눈썰미가 대단했다.
검술을 배울 생각만 했지, 이렇게 날카로운 노인이 올지는 생각도 못 했다.
카트린과 대련하던 식으로 하다가는 단박에 들킬 것 같았다.
우선, 방법을 떠올리기 전에 말을 돌려야 했다.
"제가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문님이라고 하면 될까요?"
내 말에 노인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놈아, 내가 촌수로는 네 할아버지뻘이다. 할아버지라고 불러라."
딱 봐도 할아버지뻘이긴 했는데, 촌수로 할아버지라니.
아니, 그렇다는 말은 눈앞의 노인이 왕족이라는 건가?
설마, 내가 모르는 공작이신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려고 하자, 그는 지팡이를 흔들었다.
"지금 왕의 삼촌이긴 하지만, 마나를 잃어, 왕족 행세도 못 하는 얼치기 귀족일 뿐이다. 예법을 차릴 것도 없고, 그냥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된다."
아니, 마나를 잃었다고 하지만, 왕의 삼촌이라니.
식은땀뿐만 아니라 얼굴에 피도 안 도는 것 같았다.
"카트린 저 아이가 집까지 와서 매달리는 데다가, 공주가 왕비의 편지를 들고 찾아왔는데 거절할 수가 있어야지. 어떤 놈인지 얼굴이나 보러 왔지."
내가 부탁하기는 했지만, 불러도 너무 과한 사람을 불러왔다.
"말은 충분히 돌렸지? 자, 검을 휘둘러봐라."
나는 난감한 얼굴로, 공작가에서 배운 검술을 열심히 휘둘렀다.
큰일이었다. 이래서야 왕실 검술을 배우기도 어려웠다.
그냥 다 털어놓고 배운 다음에 자살해 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배운 것들을 다 털어놓는다고 왕실 검술을 배우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바로 감옥에 끌려갈 수도 있었다.
전보다 훨씬 힘든 시간이 끝났다.
검을 멈추자,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쯧쯧, 그렇게 숨기는 게 많아서 뭘 배우겠다는 건지. 다음에 올 때까지, 어떻게 할지 결정해 둬라."
난감한 말을 남기고, 노인은 지팡이를 짚으며 연무장을 떠나갔다.
나는 연무장에 남아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들키지 않고, 노인에게서 검술을 뜯어낼지 계속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