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제20편 2학년 개학 (2)
2학년 수업이라고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교양 수업이 줄어들었지만, 수업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고, 기사 학부 수업은 1학년 때처럼 열심히 구르는 게 2학년 때도 계속 이어졌다.
대신, 학생들끼리 대련이 아니라 아카데미 기사들이 학생들을 상대해 주었다.
거기다, 카트린은 물론, 다른 학년 기사 학부 교수들도 찾아와서 학생들과 대련해 주었다.
학생들은 갑자기 높아진 난이도에 다시 고생이 시작되었지만, 나는 애매하게 붕 떠버렸다.
카트린이 가르칠 게 없다고 두 손을 들어버린 뒤에, 다른 기사들이나 교수들이 나와 대련하기를 꺼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대련 시간은 개인 훈련 시간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혼자 훈련하고 있으니, 카트린이 와서 투덜거렸다.
"월반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냐?"
카트린은 혼자 훈련하는 내 모습이, 주위 학생에게도 안 좋고, 가르치는 교수에게도 안 좋다는 식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속마음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카트린은 내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게 아까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월반이라는 것이 쉬운 게 아니었다.
"무리입니다. 교양 성적이 좋지를 않아서요."
"시험은 잘 보았다면서."
"객관식이야 전부 정답이긴 한데, 주관식하고, 나머지 실습 성적이 좋지 않거든요."
"아직도 그래?"
"관례란 게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대귀족이 상위 등수를 차지해야 한다는 관례.
왕족이 들어오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야 하고, 평민은 실력이 뛰어나도 일정 점수를 넘지 못하는 그런 관례.
그 관례의 마지막은 서자는 절대 일등이 되지 못하다고 적혀 있을 게 분명했다.
내 말에 카트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용사 카를로스가 만든 나라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분명, 오래 지나지 않아 이 나라는 망해버릴 거야."
나도 불만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단순한 푸념이었지만, 내 귀에는 묘하게 예언처럼 들렸다.
"좋아,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첫 주 동안 나 혼자 훈련하는 것을 보던 카트린은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을 하고는 다음 날부터 수업을 빠져버렸다.
다른 교수가 수업을 진행하기는 했지만, 갑자기 교수가 바뀌게 되어 학생들은 웅성거렸고, 나는 난감하기만 했다.
그렇게 어수선한 첫 주가 지나고, 약속이 많이 잡힌 주말이 찾아왔다.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방 깊숙이 숨겨두었던 배낭을 꺼냈다.
오늘, 자작령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처분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 나는 하루 동안 전세를 낸 마차를 타고 수도 동쪽 상업지구로 향했다.
상업지구 깊숙이 자리 잡은 암시장. 그 암시장 가운데 내가 알고 자주 이용하던 곳이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마차를 세워두고, 전에 왔던 3층 건물로 걸어갔다.
이곳을 처음 방문한 지도 거의 1년은 지났는데, 이곳은 그때와 달라지지 않았다.
첫 방문 때는 열심히 변장도 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로브를 깊게 눌러써서 얼굴이 안 보여도 괜찮았다.
손가락에 낀 반지만 보여주면 그만이었다.
경매장에서 반지를 산 뒤로, 반지만으로도 신분 확인이 끝낼 수 있었다.
계단과 통로 곳곳에 덩치들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손가락에 끼어 있는 반지를 보고, 냉큼 자리를 피해주었다.
뭔가, 소문이 이상하게 난 모양이었다.
3층에 올라가 경매를 진행하던 여성을 보았다. 처음 봤을 때처럼 그녀는 안내석에 앉아 있었다.
반대쪽 자리에는 용병들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오늘은 진짜 용병들이 꽤 있었다.
불황이 지나간 모양이었다.
줄을 서야 하나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앞 손님이 나오시네요. 바로 들어가시면 돼요."
경매를 진행하던 목소리로 여성이 안쪽을 가리켰다. 여전히 그녀의 말은 전생에 들었던 은행원의 말 같았다.
"아니, 다음은 나잖아!"
용병 하나가 그 모습을 보고 소리쳤지만, 옆에서 다른 용병이 속삭여주는 말을 듣고 바로 조용해졌다.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데, 저렇게 한방에 조용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묘한 분위기 속에 나는 매번 들렸던 방으로 향했다.
먼저 방에서 나온 용병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주인에게 후려치기를 당한 모양이었다.
용병이 나온 방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평범해 보이는 주인이 나를 반겼다.
"오늘은 무슨 정보를 사러 오셨나요."
그에게 나는 좋은 물주이자 호구일 터였다. 하지만, 전에도 느꼈지만, 그것보다 더 나를 반기는 것 같았다.
내가 이곳까지 올라올 동안 본 것을 포함해서 물어보니, 그는 묘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경매 날 자작이 보낸 암살자가 죽고, 얼마 뒤에는 자작도 죽어버렸습니다."
그는 손을 모으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상황에서 겁먹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확실히 이상한 소문이 퍼질 만했다.
관련이 없다고 말할까 했지만, 믿지도 않을 것 같았고, 사실 관련이 너무 많기도 했다.
다니는데 오히려 편해진 것 같으니, 그 소문은 무시하기로 했다.
"정보보다는 물건을 팔 생각입니다."
내 말에 그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유물입니까?"
아쉽지만 유물은 아니었다. 자작령에서 구한 것은 망가진 유물이었다.
멀쩡한 유물들은 자작의 시체에 남겨져 있었다.
그때 가져왔어야 했나?
잠시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배낭에 들어 있는 물건들을 떠올리니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설마, 암시장에서 유물 장사만 하는 것은 아니겠죠?"
유물이 아니라는 말에 주인은 내밀었던 몸을 다시 의자에 기댔다.
그는 여유로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요. 유물이 수익이 더 크기는 하지만, 그걸로 유지하기는 무리죠. 어찌 되었건 우리의 주된 고객은 용병이나 일반들이니까요."
유물로는 한탕 크게 할 수 있지만, 안정적인 기반과 수익을 위해서는 다른 비합법적인 거래를 계속 이어가는 모양이었다.
"혹시, 드러내지 못하는 물건들을 가져오신 건가요?"
그는 내 등에 멘 배낭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런 것은 상관없을 텐데요."
"그럼요. 암시장인걸요. 몰래 집안에서 훔쳐 나왔든, 누구에게 빼앗은 물건이든 아무 상관 없습니다. 다만, 가격은 유물 때처럼 많이 받지는 못하신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설마, 나도 후려칠 생각이려나.
하지만, 후려치기에는 너무 많은 물건일 텐데.
나는 어깨를 으쓱였고, 그는 다시 손을 폈다.
"그럼 물건을 볼까요?"
나는 방을 둘러보았다.
여기서는 무리였다.
"다른 창고 없나요? 여기서는 보여드리기 어렵군요."
"아, 유물 주머니도 있으시죠? 그럼, 생각보다 많을 수도 있겠군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이 많으면 잘 쳐 드릴 수 있습니다. 평범한 물건들이 아니라면 꽤 돈이 되겠는데요."
그는 나를 데리고 지하로 내려갔다.
2층은 전시실이었고, 1층은 자신들이 쓰는 회의실 겸 사무실이더니, 지하는 창고로 쓰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생각보다 창고는 커다랗고 텅 비어 있었다.
내가 텅 빈 창고를 둘러보자, 경매장 주인은 머리를 긁적였다.
"다른 분도 아니고, 매번 정보를 사시는 분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암시장도 물건이 매우 부족합니다. 왕국의 암울한 상황이 암시장까지 영향을 준 거죠. 가끔 한탕 한 물건들이 들어오기는 하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입니다. 몰래 물자를 모으는 영지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남는 물건이 없습니다."
그동안 정보를 거래해왔기 때문일지, 아니면 내가 무서워서인지, 그는 슬쩍 정보를 건네주었다.
암시장이 이 정도라면 영지민과 서민들이 물건을 사는 시장은 어떨지 말 안 해도 알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몇 년 안에 내전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폭동이 벌어질 것 같았다.
"차라리 빨리 죽어주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경매장 주인마저도 저렇게 중얼거릴 정도였다.
아무튼 이 크기의 창고라면 넘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등에 멘 배낭을 내려놓고, 입구를 막아놓은 줄을 풀었다.
"배낭에는 뭐가 있나요? 꽤 큰 물건인가 보군요. 유물 주머니에 넣지 못한 것을 보면."
암, 유물 주머니에는 넣기 힘들지.
나는 배낭을 거꾸로 뒤집어 탈탈 털었다.
와르르르르.
배낭에서 물건이 쏟아졌다.
고급 옷감들도 튀어나왔고, 은그릇과 금수저, 각종 무기에 갑옷까지 마구 쏟아졌다.
"아니, 이건……."
점점 쌓여가는 물건들을 보고, 경매장 주인, '신검 추적자'가 입을 딱 벌렸다.
그의 눈은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벌어진 입에는 침이 흐를 정도였다.
하지만, 입을 벌린 채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바닥에 쌓이는 물자가 아니었다.
그는 계속 물건이 쏟아지고 있는 배낭을 보고 있었다.
투두두둑.
그렇게 창고를 가득 메울 정도로 물자를 쌓으니, 겨우 배낭에서 물건이 나오지 않았다.
"이게 전부입니다. 계산해주시겠습니까?"
내 말에 배낭을 보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이상하게 빛나고 있었다.
"물론 계산해드리겠습니다. 아니, 아니, 이익은 한 푼도 받지 않고 사겠습니다. 손해를 봐도 됩니다. 제발, 그 배낭을 파세요!"
그는 바닥에 쌓인 물자들을 보지도 않고, 내 다리에 매달렸다.
"얼마 만에 시중에 나온 마법 배낭인지 모릅니다. 이 정도 용량이면 얼마를 주더라도 사겠다는 사람이 가득할 겁니다. 저에게 파십시오. 아니, 제가 경매로 내놓겠습니다. 바로 진행해도 될까요?"
유물 주머니를 봤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유물 가방이라는 게 내 생각보다 더 대단한 물건인 모양이었다.
그런 대단한 물건을 팔 리가 없었다.
"아뇨. 이건 팔 물건이 아닙니다."
그는 바로 침울해졌다.
"그렇겠죠. 그게 당연하겠죠."
내가 팔지 않겠다고 하니, 다행히 주인이 욕심을 거두었다.
나에 대해 이상한 소문이 퍼진 게 다행이었다. 잘못했다가는 정보상 하나를 죽일 뻔했다.
잠시 뒤, 제정신을 차린 경매장 주인은 창고에 쌓인 물자를 계산해서 값을 치렀다.
확실히 유물이 비싸긴 했다.
손에 낀 반지 하나가 창고에 가득한 물자의 반이나 되다니.
무척이나 많은 양이었지만, 처음 유물을 판 금액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수도에서 저택 하나는 살만한 금액이었다.
장물이라서 금액이 깎인 게 그 정도였으니, 자작이 얼마나 수탈했는지 알만했다.
금화를 주면서도 주인은 계속 배낭을 보며 구시렁댔지만, 그렇게 중요한 물건을 팔 리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전쟁에서 이 배낭이 얼마나 대단한 역할을 하게 될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배낭 하나면 백인대, 아니 기사단 하나는 보급대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전생에서 본 책에서도, 봉인지의 유적에서도 잘 보았었다.
나는 세 배로 늘어난 재산에 배가 부르고 가슴이 넉넉해졌다.
하지만, 대공녀에게 그 넉넉함을 베풀 생각은 없었다.
암시장에서 일을 마치고, 공국왕의 저택에 방문해서 대공녀 앞에 유물을 펼쳤다.
"여기 제가 구해온 유물들입니다. 망가진 것들이지만, 대공녀시라면 충분히 고치실 수 있을 겁니다."
대공녀는 내가 늘어놓은 유물들을 보고 크게 놀랐다.
방학에 집에 가더니, 망가진 유물을 가득 들고 왔기 때문이었다.
"고치시면 말씀해주십시오. 다시 찾아가겠습니다."
"네? 그냥 가져간다고요?"
"네, 대공녀의 실력을 끌어올리려고 힘들게 구한 물건들입니다. 죄송합니다만 그냥 드릴 수는 없습니다."
"아니, 달라는 게 아니고요. 수리비는요? 고치면 가격이 달라지잖아요."
'젠장, 이게 안 통하네.'
나는 대공녀 몰래 혀를 찼다.
공주였으면 먹혔을 텐데, 대공녀는 겉보기와 달리, 무척이나 현실적인 여자였다.
결국, 우리는 협상에 돌입했다.
"열심히 구한 물건입니다. 팔게 되면 수익의 반을 드리겠습니다."
"아뇨. 수익의 8할은 주셔야죠."
"그럼, 6할."
"그래도 7할까지는 받아야 해요."
노련한 대공녀의 말에 작게 투덜거렸다.
"아니 무슨 돈이 그렇게 필요하시다고."
"저도 언제까지 공국에 매여있을 수는 없어요. 이참에 독립해야죠."
아무래도 계속 이야기를 하다가 대공녀가 말을 실수한 것 같았다.
난처해하는 눈을 보고 나는 못 들은 척을 했다.
"6할로 하죠."
"……네."
못 들은 척한 대신에 내가 1할 더 가져가기로 합의되었다.
물론, 판 가격의 6할이 아니라 이익의 6할이었다.
대공녀는 모르지만, 이 망가진 유물들은 원가는 제로이었다. 전부 장물이니, 원가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 유물들은 원가를 내 마음대로 책정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착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원가는 크게 부풀게 분명했다.
정직한 대공녀에게 감사를.
그렇게 대공녀에게 유물도 건네주고, 편한 마음으로 기숙사에 돌아왔다.
그리고, 월요일.
아무래도 대공녀에게 너무 갑질을 한 모양이었다.
2학년 조별 과제의 조가 정해졌는데, 대공녀와 공주가 힘을 너무 써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들어간 조는 역대 최고, 최악의 조별 과제 조가 될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