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제19편 2학년 개학 (1)
삶을 한 번 더 반복하면 대부분 더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었다.
아마, 이번 방학에 있었던 일들도 다시 한다면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테지.
남작 영지에 먼저 도착해 사람들이 죽기 전에 강도와 용병들을 처리할 수 있을 테고, 자작과 요새의 처리도 더 깔끔하게 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결혼식이 있기 전에 미리 암살자들을 처리해서 평온한 결혼식이 되게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가정일 뿐이었다. 잘못해서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사람들의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삶을 반복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남들과 다른 시간을 산다는 것도 힘든 일이었고, 함께 지냈던 시간이 사라진다는 것도 무서운 일이었다.
내가 매번 최선을 다하는 것도, 고통 때문도 있지만, 다시 시간을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성장이 끝나지 않은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은 실력이 줄어드는 것이 눈에 보여서 더 답답했다.
이번에는 다른 것보다 공작을 다시 만나서 똑같은 말을 떠들어대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이번 방학 정도면 꽤 잘 해낸 편이었고, 나는 이 방학을 다시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메시지의 물음에 '네'라고 대답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이 설정되었습니다.>
갑자기 멈춰선 나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나는 메시지창을 치우고, 2학년 기사 학부생들 쪽으로 향했다.
작년 신입생 때는 널찍해 보이던 강당이 꽉 차 있었다.
2학년과 3학년이 모두 모여있으니 그럴만했다.
잠시, 오랜만에 만난 동급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공주와 멀리 떨어져 있는 대공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다들 괜찮아 보였다.
식순이 시작되었다.
작년 신입생 때처럼 학장이 나와서 졸음이 쏟아지는 연설을 한참 동안 이어갔다.
능력을 사용할 때는 전문가답고 멋져 보였는데, 지금은 다시 입학식의 낙하산 관료로 보였다.
그래도, 입학식 때와는 달리, 연설 내용 중에 들어둘 만한 이야기가 조금 섞여 있었다.
학장은 졸업한 학생들이 어디로 가게 되었는지, 잘 된 학생들 위주로 조목조목 이야기했다.
전생에 졸업생 자랑을 하는 교장을 보는 것 같았지만, 덕분에 하비에르 선배가 졸업한 뒤에 왕실 기사단에 들어간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졸업생들도 다들 관청이나 왕실 기사단, 그리고 큰 영지의 관료나 기사로 간 모양이었다.
귀족의 후계자들이 자기 영지로 돌아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 아카데미가 왕립 아카데미인 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들어오게 된 신입생들 이야기도 있었다.
우리 학년처럼 공주나 대공녀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대단한 귀족 자녀들이 들어온 것 같았다.
후작의 후계자라던가, 공작의 딸이라던가. 나도 아는 이름들이 귀에 들려왔다.
다만, 다시 지루해지는 바람에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학장 연설이 끝나고, 3학년 된 벤자민 선배가 대표로 나와 선서 비슷한 것을 한 뒤에 개학식이 끝났다.
왕실 아카데미의 학년은 3학년으로 이루어졌다.
1학년 때는 아카데미 적응과 처음으로 각종 실습에 참여하고, 3학년 때는 졸업 이후를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실질적으로 대부분의 아카데미 수업은 2학년에 이루어진다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었다.
다만, 1학년 때 난리를 피운 나는 예외이겠지만.
거기다, 1학년 때는 수업에 반이나 차지하던 교양 공통 수업이 확 줄어들었다.
다른 학부와는 만날 시간이 줄어든 것이다.
물론, 왕실 아카데미는 수업만큼이나 학생들의 교류를 중요시하는 곳인 만큼, 대안이 마련되어 있었다.
세 학부 인원을 섞어서 조를 만들어 1년 내내 과제를 부여해서 그 결과를 학년 성적에 큰 영향을 주게 만든 것이다.
맞다. 이건 전생에 경험한 조별 과제, 그 자체였다.
더구나, 이 세상은 전생보다 더 권력과 배경이 중시되는 곳이었다.
어떤 조원이 걸리고, 어떤 과제가 걸릴지 알 수 없는 조별 과제.
결국, 내가 믿을 곳은 공주님과 대공녀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이제 20살 용사에게 도전해볼 시간이었다.
이길 가능성은 별로 되지 않았다. 처음 멋도 모르고 20살 용사에게 도전했을 때는 실력 확인도 못 해보고 끝이 났었다.
그때는 15살 용사도 이기지 못할 때였지만, 20살 용사와의 격차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직은 차이가 상당할 게 분명했다.
그래도, 이제는 도전할 때가 되었다.
때마침 개학식 때로 저장 시점도 맞춰졌으니, 긴 시간을 반복할 필요도 없었다.
개학식 날 저녁.
다른 학생들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아카데미와 거리를 쏘다닐 때, 나는 기숙사 방에 앉아 장비를 하나씩 갖추었다.
대검을 등에 메고, 단검을 허리에 차고, 반지와 목걸이를 확인했다.
가슴속에 넣어둔 유물 주머니에는 일회용 필살 무기인 유물 쇠뇌와 검은 화살이 들어 있었다.
정신세계에서는 벌써 여러 번 망가졌지만, 현실에서는 대공녀에게 수리를 받은 뒤에 지금까지 멀쩡했다.
'맞다. 자작령에서 가져온 망가진 유물들도 대공녀에게 건네줘야 하는데.'
떠오른 생각을 한 쪽에 미뤄두고, 나는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검은색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임시 사용자 알렉스 확인되었습니다. 설정을 조정하시겠습니까? 바로 진입하시겠습니까?]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나는 긴장을 가득 끌어올리고, 음성에 대답했다.
"진입."
화아악!
다시 세계가 어두워졌다.
그리고, 잠시 뒤 밝아진 눈앞에 텅 빈 투기장이 보였다.
철창문이 열리고, 전혀 15살처럼 보이지 않는 15살 용사 카를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씩 웃었다.
이제 검 하나로 이기는 상대였다. 완전 무장을 하고 왔는데 질 리가 없었다.
나는 심법을 돌리며 용사에게 달려갔다.
쾅!
예상대로 싸움은 어렵지 않게 끝이 났다.
오랫동안 싸워서 습관과 검술을 모두 보고 경험한 상대였다.
같지는 않지만, 얼추 비슷한 형태의 검술도 펼칠 수 있었고, 힘도 이제는 밀리지 않고, 거기다 보이지 않는 검기를 마구 뿜어내니 15살 용사는 더는 버티지 못했다.
10여 분의 격렬한 싸움 끝에 용사의 검을 날려버리는 것으로 대련은 끝이 났다.
만족한 승리였지만, 이제 예행연습이 끝난 거였다.
지금부터가 본편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첫 번째 상대를 이겼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상대가 등장합니다. 두 번째 상대는 20살의 카를로스입니다.]
시체가 사라지고, 2m가 넘는 덩치를 가진 20살 용사가 등장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마나 목걸이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20살 용사에게 달려갔다.
퍽!
몇 합을 싸웠을까,
갑자기 시야가 흐려지더니, 개학식 때로 돌아와 있었다.
학생들이 꽉 찬 강당.
나는 그 입구에 서 있었다.
오래 서 있었는지,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고 있었다.
나는 고통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전에 앉았던 자리로 걸어갔다.
알아차리지도 못한 검에 목이 잘려 나간 모양이었다. 목 주변의 신경이 마구 날뛰고 있었다.
평범하게 죽었을 때와 달리, 신경이 손상되어 죽는 것은 그 괴이한 느낌 때문에 기분이 더 안 좋았다.
나는 통증을 참으며 겨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급생들과 인사를 나눌 수도 없었고, 공주와 대공녀에게 눈인사를 보낼 정신도 없었다.
표정이 안 좋은 것을 알아차렸는지, 다들 내 눈치를 보고는 말을 걸지 않았다.
'생각보다 실력 차가 심하네.'
실력 차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였다.
검은 화살을 쏠 시간도 없었다.
싸움이 시작되기 무섭게 계속 밀려났을 뿐이었다.
그것도 대충 봐주고 있다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대충 볼 것 다 봤다고 생각되는 순간, 목이 잘려 나간 게 분명했다.
유물 검이 만들어낸 가짜에 불과한데, 이렇게 사람을 농락하다니.
20살 용사에게서는 공작과 싸울 때도 느끼지 못한 벽이 느껴졌다.
하기야 그 정도 되니, 마왕을 봉인했을 테지.
어차피 수백 년 뒤의 지금 세상은 용사들의 능력이 후손에게서 나누어져서 만들어진 왕국이자 세상이었다.
너무도 강한 능력이기에 나뉜 능력으로도 귀족들은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고, 더 발전시킬 필요도 못 느끼고 있었다.
'얼마나 비슷하게 따라갈지가 귀족들의 목표이고, 나도 지금 그런 처지니까.'
그래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20살 용사를 이기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었다.
다른 심법으로 얼추 비슷하게 만든 검술로는 제대로 된 검술을 이길 수가 없었다.
처음 15살 용사와 싸울 때도 느꼈던 것이긴 했지만, 다른 심법을 구하기 어려워 편법을 사용했었다.
그걸로 15살 용사도 이길 수 있었다. 자신감이 붙어서 20살 용사에게도 덤볐던 것이었는데…….
역시, 무리였다.
제대로 된 심법이 필요했다. 여러 갈래로 갈라진 용사 카를로스의 심법을 배워야 했다. 그리고 왕실 기사단의 심법도.
2학년 때의 계획을 다시 점검해봐야 할 것 같았다.
평범한 훈련으로 실력을 키울 생각이었는데, 그런 방법으로는 20살 용사를 이기기 어려워 보였다.
한참을 고심하고 있는데, 옆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고개를 드니, 벌써 개학식이 끝난 뒤였다.
많은 학생이 강당을 나갔고, 남은 학생들도 이리저리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 주위에도 어느새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공주도, 대공녀도, 발레아와 브리아까지
남들이 보면 꽃밭이라고 하겠지만, 내게는 든든한 배경들이었다.
"아, 대공녀님께 드릴 게 있습니다."
"네?"
뒤로 미룰 이유가 없었다. 자작령에서 가져온 망가진 유물들을 대공녀에게 바로 넘기기로 했다.
"그리고, 공주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네? 저에게요?"
공주도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걱정이 되어 찾아왔는데, 갑자기 부탁한다는 소리를 들으니 어리둥절할 만했다.
"저는요! 선물이나 부탁은 없나요?"
옆에서 발레아가 손을 들었지만, 그녀에게 줄 선물이나 부탁은 없었다.
대신 선물을 받는 것이면 모를까.
"오히려 제가 감사를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러고 보니, 계약서를 다시 쓴다고 하지 않았나요?"
"앗! 저는 잠깐 꽃을 따러……."
발레아는 화장실을 간다는 말을 적나라하게 말하고는 냉큼 도망갔다.
그래도, 약속을 지키는 편이었으니, 발레아 걱정은 하지 않았다.
다만, 감사 인사가 이상하지 않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
같이 왔던 브리아는 뭔가 부러운 눈치였다.
자신에게도 뭔가 말해달라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평범하게 인사를 했고, 그것만으로도 브리아는 환한 얼굴로 내 인사를 받았다.
그렇게 나중에 각자 만날 날을 약속한 뒤 나는 강당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