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제18편 다시 아카데미로 (2)
역시, 공작과의 대화는 어머니가 원하던 그런 대화가 아니었다.
공작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언제나처럼 무미건조한 명령이었다.
"시몬 결혼식에서 있었던 일은 후작가를 공격했었던 잔당이 벌인 일이다. 그렇게 알고,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오지 않도록 해라."
잔당이 벌인 일이면 그렇게 말해주면 될 뿐이었다.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오지 않게 하라니. 결국,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내 예상대로일 가능성이 컸다.
"결국, 형수님의 오빠. 후작가 후계자가 벌인 일입니까?"
그걸, 공작은 숨길 생각일 테고.
내 말에 공작은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누가 알려 준 것은 아닐 테고, 어떻게 알았지?"
예상대로였다. 잔당은 진짜 범인을 묻기 위한 핑계일 뿐이었다.
"형수님의 손에 낀 유물 반지가 망가진 것을 봤습니다. 그전에는 형수님이 가장 실력이 있는 호위 기사를 요청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신전의 성가대에 암살자들을 숨겨놓을 권력도 있어야 하고, 반지의 기능을 미리 알고 망가뜨릴 수 있어야 하고, 아드리아가 그걸 눈치챌만한 가까운 사람이어야 했다.
그리고, 아드리아가 죽거나 결혼이 깨져야 이익을 얻을 사람.
그런 사람은 한 사람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쪽 팔이 잘려 나간 채로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서 후작령을 다스리는 후계자, 아드리아의 오빠였다.
나는 추리한 모든 내용을 공작에게 말했다.
물론, 모른 채하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게 머리가 덜 아픈 방법이었고, 책임도 덜 지게 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자작령에서 공작의 명령을 수행하다 알게 되었다.
나는 공작의 기사가 아니었다.
내게는 생각 없이 명령에 순종하는 게 정답이 아니었다.
그동안 나는 상대방의 명령을 그냥 따랐던 적이 없었다.
요청과 부탁을 들어준 적은 많았지만, 전부 내가 결정해서 한 일이었다.
다만, 공작의 아들이자, 공작가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생각 없이 공작의 말은 따랐었다.
하지만, 내가 다른 기사들처럼 마물과 강도들을 때려잡기만 했다면, 자작가에서 지금 같은 결과를 들고 오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공작의 명령을 생각 없이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실력도 내 머리도 어느 정도 알려진 상황이었다.
괜히 실력을 숨긴답시고, 모른 척 말을 따를 이유는 없었다.
이제, 아는 것은 안다고 말할 때였다.
생각 없이 명령을 따르는 것만으로는 공작의 장기 말 중 하나가 될 뿐이었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장기 말이 아니라, 거래 상대가 될 생각이었다.
내가 말을 끝내자, 공작은 생각에 잠겼다.
내 의도가 잘 전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공작은 내 생각에 뭐라 다른 말을 붙이지 않았다.
틀렸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입 다물라는 소리도 안 했다.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알렉스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이번에는 진로 상담이려나.
물론, 그런 뜻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나도 이제 말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우선 검을 좀 더 익혀볼 생각입니다."
이제 겨우 15살 용사를 이겼다. 그것도 기사 용사 한 명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그리고,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에는 독립할 생각입니다."
다른 귀족 아래에서 기사 노릇을 할 생각은 없었다.
누구 아래에 있으려면, 좀 더 높은 사람 아래에 있을 생각이었다.
왕족이나 왕 아래이거나, 아니면…….
하지만, 그것보다 아직 알고 싶은 것들이 남아 있었다.
망해버린 고대 제국에 대해, 봉인되었다는 마왕에 대해, 유물들과 반복되는 내 삶에 대해.
그리고, 용사가 대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전에 조금 돌아다니며 세상을 알아볼까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기사 수행 비슷한 게 되겠죠."
솔직히 꿈에 가까운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내전이 코앞으로 다가온 왕국이었다. 제국도 심상치 않고.
더구나, 내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생각하면 저렇게 한가하게 여행을 다닐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많은 시간이 있었다.
나중에는 없어지는 시간이었지만, 내 기억에 남겨 놓을 수 있다면 상관없는 일이었다.
공작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지금 나를 보는 공작의 표정은 전과 많이 달랐다.
"부럽군. 그래도 해 볼 수 있다는 점이."
공작도 내가 해내리라고 생각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뜻밖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똑똑하지만 그만큼 바보 같고, 현실적이지만 그만큼 로망에 빠져 있었군."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저 모든 것이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내 능력과 유물이, 반복되는 나의 삶이, 그리고, 이 세계가 나를 몰아가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렇지만, 휘말리지 않으려면 먼저 움직여야 했다.
다만, 공작은 나를 부러워했고 그만큼 실망한 것 같았다.
설마, 그렇게 말했는데 다시 후계자 자리라도 노릴 거로 생각했나?
아니면, 좋은 혼처에 데릴사위라도 보낼 생각이었을지도.
하지만, 나는 공작의 명령에 따를 생각이 없었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재산 이상으로 새로 얻은 배낭에 돈 되는 물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실력도 쑥쑥 자라고 있고, 재산도 충분했다.
거기다 나름대로 인맥도 있으니, 더는 공작에 메일 이유가 없었다.
공작의 아들이라는 위치와 어머니도 이곳에 계시니 공작과 관계를 끊을 수는 없겠지만, 전처럼 질질 끌려다닐 생각은 없었다.
결국, 이야기는 아무 결론 없이 끝났다.
평범한 아버지와 아들같이 잘 다녀오라는 인사와 다녀오겠다는 말도 없었고. 고생한다고 용돈을 주는 일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아무 결론도 못 내고, 공작과 이야기를 끝낸 건 처음이려나?'
하기야, 공작과는 그렇게 많이 만나지도 않았다. 특이한 일만 있으면 매번 새로운 일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날이 지나고, 수도로 출발할 날이 밝았다.
나는 아카데미 제복을 입고, 장검과 단검을 허리에 찬 뒤에, 대검과 다른 물건들을 유물 주머니에 넣었다.
유물 주머니는 전처럼 가슴 깊이 숨겨두고, 등에는 자작령에서 구한 배낭을 멨다.
방을 둘러보니, 남은 물건은 없었다.
나는 눈물짓는 플로라의 안내를 받으며 정문으로 향했다.
1년 전처럼 사람들이 문 앞에 나와 마누엘과 나를 배웅했다.
어머니도 계셨고, 기사단장과 미겔, 병사 우고, 시몬과 아드리아 형수도 보였다.
다행히 형수는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물론, 형수의 집안은 앞으로 더 힘든 시간을 보낼 게 분명했다.
공작에서 암살자라는 크나큰 약점을 잡혔으니, 후계자, 아니 미래의 후작은 앞으로도 공작에게 휘둘리는 삶이 될 터였다.
암살 위협까지 받은 형수가 처가를 도울 것 같지도 않았으니, 후작가의 앞날은 어둡기만 했다.
시몬 옆에는 1년 전처럼 공작부인이 나와 있었다.
공작부인은 1년 전과 달리 나를 따로 불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내가 저택에 있는 동안 나를 피하는 것 같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녀가 모른 척해준 덕분에 방학은 무척이나 편안했다.
지금도, 나를 반쯤 외면한 채로 마누엘과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방학 동안 북쪽 산맥에서 마물과 드잡이를 한 덕분인지, 마누엘은 수도에서 출발할 때보다 훨씬 날카로운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나도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마차에 올랐다.
언제나처럼 공작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총집사가 다시 품위 유지비라고 금화 몇 개를 건네주었다.
내 배낭과 주머니에 들어 있는 재산을 생각하면 한 줌도 안 되는 돈이었지만, 주는 돈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나는 냉큼 돈을 챙겼다.
마누엘도 마차에 오르고, 우리는 1년 전처럼 저택을 떠났다.
전보다 같이 가는 병사도, 기사도 숫자가 줄었다.
처음 가는 길이 아니었기에 숫자를 줄였다고 사람들은 생각했지만, 내 실력을 알고, 공작이 숫자를 줄인 것 같았다.
솔직히 더 줄어도 상관없었기에 나는 군말 없이 여행을 즐겼다.
다행히 마누엘도 어른이 되었는지 괜한 시비를 걸지 않았다.
시몬도 어른이 되더니 사람이 괜찮아지더니, 마누엘도 생각보다 멀쩡한 귀족이 될 것 같아서, 무척이나 마음이 흡족해졌다.
다만, 여행 중에 보이는 광경은 그리 좋지 않았다.
공작령으로 올 때와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그동안 정리도 안 되었다는 것에서, 얼마나 치안이 나빠졌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기사와 병사들과 함께 움직이는 마차를 습격하는 강도들은 없었다.
공작령으로 올 때는 마누엘이 나서서 강도들을 찾아다녔지만, 지금은 시간도 없었고, 마누엘도 나서지 않았기에 계속 수도로 달려갔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우리는 메세시아 남작가에 도착했다.
긴 시간도 아니었는데, 남작령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복구된 상태였다.
영지민의 표정도 나쁘지 않았고, 병사와 기사의 수는 줄었지만, 군의 기강도 문제없어 보였다.
다만, 우리를 맞이하는 남작 대리의 얼굴은 까맣게 죽어가고 있었다.
"영주 대리님이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저도 옆에서 열심히 도왔지만, 전부 영주 대리님이 하신 거예요."
옆에서 발레아가 열심히 칭찬했지만, 그녀가 칭찬할 때마다 남작 대리는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아무래도 그 고생이 자발적인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제가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 영지를 잘 부탁드릴게요."
평범한 작별 인사와 부탁이었지만, 뉘앙스가 마치 발레아가 영지를 맡겨놓은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영주 대리는 발레아가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기쁜 모양이었다.
첫 번째 남작 부인도 발레아를 대하는 게 전과 달라져 있었다.
"좀 더 남아있으면 안 되겠니? 영주 대리에게는 네가 필요하단다. 네가 없을 때 일이 터지면 어떻게 하니, 그냥 휴학하고 계속 있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하지만, 대하는 게 달라진 것은 그녀가 바뀌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발레아의 위상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다만, 그녀의 어머니, 남작의 둘째 부인은 정말로 달라져 있었다.
"몸조심하고, 어머니도 영지도 걱정하지 말렴. 네가 제일 중요하단다. 좋은 사람 있으면 이 어미에게도 보여주고."
"아니, 그, 다, 다녀올게요."
나는 발레아가 오히려 허둥대는 모습을 재미있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벌로 수도로 가는 내내 그녀의 수다를 들어주어야 했다.
수도는 방학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전처럼 활기찼고, 왕국의 다른 영지들처럼 흉험한 분위기도 풍기지 않았다.
마차는 수도의 저택으로 향했다.
결혼식 때문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내일이 바로 신입생 입학식,
그다음 날이 16살 알렉스가 아카데미 2학년이 되는 개학식이었다.
이틀 뒤, 아카데미 정복을 차려입고, 허리에 장검을 차고 배낭을 짊어진 채로 저택을 나섰다.
배낭을 저택에 둘 수는 없었다. 우선 기숙사에 가져다주고 하루빨리 처리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마누엘과 마차를 타고 아카데미로 향했다.
1년 전에 보았던 그 길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니, 수많은 마차와 함께 아카데미 정문이 보였다.
잠시 뒤, 정문을 지나, 마차가 멈춘 곳은 1년 전 입학식이 열렸던 중앙 강당이었다.
어제 다시 신입생의 입학식이 이곳에서 열렸고, 오늘은 2, 3학년의 개학식이 이곳에서 열릴 터였다.
예식을 좋아하는 귀족다운 행사였지만, 건물을 보는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 건물이 박살 난 것을 몇 번이나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없었던 일일 뿐이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학생들 사이에 섞여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눈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을 설정하시겠습니까?>
혹시나 했는데, 결국 떠올랐다.
이번에는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새로운 곳을 온 것도 아닌데 이 창이 떠올랐다는 것은, 이번 일 년도 평범한 일 년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도대체 평온할 때가 없는 모양이었다.
어라?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설정하시겠습니까?>
문구가 전과 달랐다.
분명 전에는 의문문으로 끝나지 않았었다.
의문문이라는 것은 내 대답을 원한다는 말이었다.
"설마, 이게 레벨 2가 된 효과인가?"
단지, 문구 하나가 달라졌을 뿐이었다.
별로라면 별로인 것 같고, 유용하게 생각하면 유용할 것 같은 그런 효과.
앞으로 달라진 효과에 대해 고민해야겠지만, 지금은 이 문구에 대답할 때였다.
나는 메시지의 질문에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