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제17편 다시 아카데미로 (1)
성가대 복을 입은 남녀들이 꺼낸 단도의 날은 푸른 빛이 흐르고 있었다.
날에 뭔가 바른 단도였다. 아마도 독이겠지.
나는 신부와 신랑의 앞을 막아서면서 암살자들에게 달려갔다.
"꺄악!"
파파팡!
비명과 함께 사방에서 마나가 치솟았다.
마나 장벽들이 펼쳐지고 귀족들이 마나를 끌어모으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무슨 생각으로 결혼식에 암살할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곳은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귀족과 유물이 있는 세계였다.
독을 바른 단검 정도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눈앞의 암살자들도 마나 정도는 다룰 수 있어 보였지만, 평범한 기사보다 못한 실력이었다.
어릴 적 나를 죽이러 왔던 암살자는 기사를 한 수에 베어버릴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런 암살자도 공작을 이길 수 없었다.
이곳에는 그 공작은 물론이고 수십 명의 귀족이 하객으로 와 있었다.
눈앞의 암살자들이라면 암살은커녕 신부의 옷깃도 상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렇다고, 호위 된 입장으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성가대석 앞에 도착한 나는 검을 휘둘렀다.
동시에, 등 뒤에서 신부의 감탄사를 들을 수 있었다.
"아, 이것까지 망가뜨리다니……."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다만,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더 확실하게 막을 필요가 있었다.
내 검에 암살자 한 명의 목이 잘리는 순간, 다른 암살자들은 사방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들고 있던 단검을 던지려 했다.
하지만, 암살자들만 단검이 있는 게 아니었다.
목을 자른 반동을 이용해서 왼쪽으로 몸을 날리며 반대쪽으로 몸을 피한 암살자에게 달려오면서 꺼낸 단검을 날렸다.
퍽!
독이 묻은 단검이 암살자의 손을 떠나기 전에 내가 던진 단검이 암살자의 목을 꿰뚫었다.
단검을 날린 뒤, 결과를 보지 않고, 대검을 앞에 있는 암살자의 가슴에 밀어 넣었다.
컥.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암살자는 즉사했고,
나는 가슴에 박힌 대검에서 손을 떼고는 그 손을 옆으로 뻗었다.
텅!
손에 낀 건틀릿에 단검이 튕겨 올랐다.
내 대검에 죽은 암살자 뒤에 있던 암살자가 던진 단검이 내 건틀릿에 맞아 퉁겨진 것이다.
나는 쓰러지는 암살자 뒤로 보이는 여자 암살자를 향해 다시 단검을 던졌다.
텅 빈 손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단검에 암살자의 눈이 커졌지만, 그 눈은 바로 죽은 자의 눈으로 변했다.
여자 암살자가 죽으며 반대쪽 손에 들린 단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총 네 명, 음습한 마나가 흘러나오던 사람의 숫자이고, 성가대석에서 검을 꺼냈던 사람들의 수였다.
그리고, 지금 내 검에 죽은 사람들의 인원수였다.
역시 그냥 적을 죽이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지키는 것이 훨씬 힘들었다.
지금도 아슬아슬했다.
단검을 던지고 회수할 수 없었더라면 암살자들이 단검을 던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휴우.
참아왔던 숨을 내쉬고,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다들 괜찮은지 확인해봐야 했고, 신부가 내뱉은 말이 무슨 뜻인지도 알아야 했다.
몸을 돌리자, 나를 보는 수많은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신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보고 있었다.
원래 나보다는 암살자들을 보고 있었겠지만, 그들이 다 죽어버렸으니, 다들 나를 보게 된 것 같았다.
나는 내 쪽을 향해 가득 기세를 세우고 있는 마나들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신전을 가득 메운 건 마나만이 아니었다. 붉은 화염과 물 덩어리가 공중에 떠올라 있었고, 마나가 가득 담긴 검들이 뽑혀 나와 있었다.
곳곳에 마나 장벽들까지 펼쳐져 있는 것을 보니, 귀족들이 모여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귀족들의 모습을 보니, 내가 암살자들을 죽이지 못했거나, 조금만 늦게 죽였어도, 이 성가대석은 쑥밭이 되었을 게 분명했다.
성가대석에 앉아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평범한 성가대원들은 다 죽었을 테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 성가대원들은 몸 성하게 집에 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암살자와 같이 있었으니, 길고 무서운 조사가 이어질 터였다.
나는 귀족들을 거쳐서 신랑과 신부를 보았다.
시몬은 검을 빼 들고 신부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멋진 예복을 입고, 검을 세워 신부를 지키는 멋진 모습이었지만, 시몬이 신부 앞에 나선 것은 암살자들이 모두 죽은 뒤였다.
능력은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보기에 시몬은 기사와 검사로서의 실력은 조금 부족해 보였다.
신부, 아드리아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아드리아는 자신의 손가락, 아니 반지를 보고 있었다.
손가락에 반지가 하나 끼워져 있었다.
아직 반지를 교환하지 않았으니, 결혼반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 오래된 반지, 유물 반지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귀족들 자리 곳곳에 펼쳐져 있는 마나 방벽이 신부와 신랑에게는 펼쳐지지 않고 있었다.
시몬이야 검도 차고 있었고, 심법을 가지고 있는 공작의 후계자라 유물을 안 가지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부도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척 이상했다.
아니, 반지를 보니 방비는 했었던 것 같았다.
'망가뜨렸다는 말이 그런 말인가?'
거기다, 아드리아는 누가 망가뜨린 것인지 아는 것처럼 말했다.
아니, 잠깐, 분명 아드리아는 실력 있는 호위 기사를 요청했다고 말했었다.
내가 추천되어서 놀랐다는 말도 했었고.
그럼, 그녀가 필요했던 호위 기사는 결혼식장의 장식이 아니었다.
결혼식에서 그녀를 지킬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결혼식장에서 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저 반지를 망가뜨리는 것까지는 생각 못 했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 그래야 하는 사람이라면…….
내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 * *
한바탕 난리가 났지만, 결혼식은 중단되지 않았다.
성가대석은 비워졌고, 주교는 진땀을 흘려댔지만, 결국 결혼식은 순서대로 마무리되었다.
암살자가 습격했는데, 결혼식을 계속 진행하다니.
나는 이쪽 세상의 터프함에 질려버렸지만, 귀족들은 결혼식이 중단되는 불명예가 더 나쁘게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불만도 없었고, 결혼식장을 떠나는 사람도 없었다.
신랑 신부는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을 마쳤고, 이어진 피로연도 성황리에 잘 치렀다.
물론, 습격 이후로는 결혼식장과 피로연 장소에 철통같은 경계가 펼쳐졌다.
멀찍이 지켜보던 기사들이 곳곳에 배치되었고, 병사들도 투입되어 외곽을 지켰다.
나는 마지막까지 충실히 임무를 수행했다.
습격 이후로 결혼식에 온 귀족들이 내가 누구인지 궁금해했지만, 신부를 호위하는 기사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내게 갑옷을 빌려주었던 기사는 귀족들의 연락으로 한동안 혼쭐이 난 모양이었다.
그렇게 결혼식이 끝나고, 신랑과 신부는 저택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원래는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부부는 후작가로 갔었어야 했다.
후작가에서 아파서 결혼식에 오지 못한 후작과 아드리아의 가족들에게 인사를 해야 했지만, 결혼식 습격을 이유로 두 사람은 후작가 방문을 포기했다.
그렇게 결혼식과 피로연도 끝나고, 방문한 귀족들과 공작의 회담들도 끝이 나니, 이제 수도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출발하기 전날, 나는 여느 때처럼 어머니와 다과를 나누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혼식 이야기와 내 아카데미 생활과 여러 잡다한 이야기들.
중요한 이야기도 없었고, 결정해야 할 일도 없는 소소한 잡담이었다.
하지만, 그런 중요한 시간보다 훨씬 보람 있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다만, 이제는 한번 물어볼 때가 된 것 같았다.
"혹시,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에 저와 따로 나가서 사시는 것은 어떠세요?"
혼자 이리저리 생각한 적은 많았지만, 어머니께 이렇게 직접 물어본 적은 없었다.
그동안은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살 자신도 없었고, 나 스스로에 대한 확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어머니를 데리고 이 저택을 떠나는 게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제는 어머니께 물어보고 싶었다.
내 말에 내 어머니, 아만다가 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이어, 미소를 지으셨다.
"가만히 있어도, 너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들려오더구나. 대단한 이야기도 있었고, 믿기 힘든 이야기도 있고."
공주라던가, 대공녀라던가.
어머니가 뒤이어 중얼거리시는 말은 듣기가 조금 난감했다.
"너는 어렸을 때부터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지. 키우기도 어렵지 않았고, 아니, 내가 키운 것은 하나도 없다고 느낄 정도였단다."
이어서 꺼내시는 말은 나를 칭찬하면서도 아쉬움이 담긴 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였던 너였으니, 여러 가지 소문들은 모두 사실이겠지."
그리고, 어머니는 나에게 다시 물으셨다.
"이제 나를 데리고 살 만한 자신이 생긴 거니?"
"네, 그 정도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리겠지만, 내 실력과 이런 내전에 가까운 상황을 이용하면 남작이나 단승 작위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 뭐하면 공주나 대공녀에게 부탁하면 어떻게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작위로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영지나 마을을 얻는다면, 큰 위험 없이 어머니와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솔직히 고민할 것은 많았다.
내전의 승자가 누가 될지도 따져봐야 했고, 제국이 끼어들면 어떻게 될지도 생각해봐야 하고, 공작과는 어떻게 관계를 끊을지도 연구해봐야 했다.
하지만, 지금 내 실력이라면 어머니와 둘만 지내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내 대답에 어머니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네 생각보다 훨씬 힘들 것 같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우리 아들이 강해진 걸 테지. 하지만……."
내가 물어보면서도 걱정하지 않았던 것은 어머니의 저 미소였다. 부드러워 보이는 저 미소 뒤에는 강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나는 이 집을 나갈 생각이 없단다."
내 어머니는 이야기 속에 나오는 본처에게 구박을 받고 고통 속에 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알렉스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안드레스 공작의 아내기도 하단다. 남들이 무시하고, 이상한 눈으로 보더라도, 내가 한 결정이고, 이곳은 내 자리란다."
어머니의 미소가 더욱 뚜렷해졌다. 어머니는 모르고 공작과 결혼한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닥칠 고난과 고통도 감안하고 공작과 결혼 한 것이었다.
그 이유가 공작에 대한 사랑이었을 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어머니의 결정에 뭐라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나 때문에 고통받는 우리 아들이 걱정이었단다. 지금 내 아들이 홀로 설 수 있다니 이제 더는 걱정이 없단다."
내가 어머니를 걱정하듯이 어머니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거기다, 네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잖니. 나 때문에 네 꿈을 포기하지 말렴."
내가 숨긴 것들은 알지 못하시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나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행복하시나요?"
나는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물었다.
어머니는 내 말에 피식 웃으셨다.
"너는 행복하니?"
어머니의 물음에 나는 금방 대답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행복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꽤 잘 지내고 있단다. 우리 아들이 계속 즐거운 소식을 보내주고 있고."
내 물음은 어머니의 대답으로 끝이 났다.
공작이 나를 찾는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가려고 하자, 어머니가 내게 말씀하셨다.
"그래도 안드레스 공작님은 네 아버지란다. 그걸 잊지 말렴."
언제나 착한 아들이 되고 싶었지만, 이것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제가 아들이면, 공작은 제 아버지입니다. 제가 아들인 것을 잊지 않으려면, 공작도 제가 아들인 것을 잊지 않았어야 합니다."
공작을 쓸데없이 미워할 생각은 없었다. 공작이 내게 한 것처럼 나도 공작을 대할 뿐이었다.
어머니의 한숨을 들으며 나는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