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제15편 요새 전투 (3)
화려한 자작의 마차 안에는 배낭 이외에 다른 특별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없어서 나는 바로 배낭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해보았다.
하지만, 배낭을 열어보니, 바닥도 내부도 보이지 않고, 검은 공간만이 보일 뿐이었다.
"설마……."
이런 검은 공간은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유물 주머니였다.
침을 꿀꺽 삼키고, 조심스럽게 배낭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머릿속에 여러 물건이 떠올랐다.
죽은 자작이 말한 포션들과 술병들, 그리고 유물처럼 보이는 낡은 기물들.
아쉽게도 유물들은 멀쩡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다. 수도에 망가진 유물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자작이 가지고 있던 유물들이 있었지."
마물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몇 마리 죽이기까지 했던 유물들이었다.
하지만, 그 유물들은 손을 대기가 어려웠다.
시체가 자작이라는 증명도 필요했고, 그 유물들을 가져갔다가 괜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다.
아쉽지만 자작이 몸에 지닌 물건은 포기하기로 했다.
몸에 지니지 않은 물건은, 요새와 함께 불에 탄 것으로 하면 그만이었다.
귀한 배낭을 구했으니, 이 마차도 같이 태워버릴 생각이었다.
"어떻게 요새에 있는 약탈물들을 수도로 옮길 생각인지 궁금했는데, 이게 그 대답이려나."
나는 배낭을 쳐다보았다. 주머니와 차원이 다른 용량을 가진 배낭은 거의 비어 있었다.
분명 일부러 비운 게 분명했다.
유물 배낭이라니,
왕궁에나 있을 법한 물건을 어떻게 자작이 가지게 되었는지 궁금했지만, 이 배낭이라면 요새에 있는 장물들을 모두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결정을 내리니 더 바빠졌다.
배낭을 가지고 창고에 들어가 비싸 보이는 물건들을 쓸어모았다.
소설에 나오는 용사나 영웅들은 이 물건들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겠지만, 난 그렇게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
원래 착한 일을 하려고 이곳에 온 것도 아니었다.
창고에는 불에 탄 뒤에도 흔적이 남도록 장물 일부는 남겨두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마물들과 자작의 시체가 불에 타지 않는 곳에 있는지 확인했다.
모두 괜찮아 보였다.
나는 단검을 달궈서 창고와 자작의 마차에 불을 붙였다,
창고는 물론이고, 마차도 쉽게 불이 붙었다.
아쉽게도 목책은 불이 잘 붙는 나무가 아니었다.
나는 요새 곳곳을 돌아다니며, 최대한 많이 불을 질렀다.
어차피 요새를 감싸는 목책도 불에 안 타고, 요새와 숲은 거리가 있었다.
요새 안이 다 타버려도 숲까지 불탈 염려는 없었다.
나는 요새를 빠져나가기 전, 불길들 사이에 누워있는 마물들과 자작의 시체를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자작이 끌고 온 마물들에게 요새가 습격당하고, 습격 도중에 불이 나서 요새가 불타 남은 게 없었다.'
라는 시나리오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는 배낭을 등에 걸치고, 요새를 빠져나갔다.
배낭은 무척 가벼웠지만, 안에 들어 있는 물건들을 생각하니, 괜히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묵직한 배낭을 멘 채로 먼저 간 일행을 쫓아 숲을 달렸다.
빠르게 숲을 가로질러, 모이기로 했던 장소에 도착해 보니, 기사들과 병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기가 늦게 올라와서 걱정했습니다."
미겔의 말에 뒤를 돌아보니, 숲 너머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혹시 자작이 도착한 것을 보셨습니까?"
나는 미겔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미겔은 물론이고, 내가 자작과 만났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되어야 했다.
요새에 불이 난 것과 자작이 죽은 순서가 듣는 사람마다 조금 꼬이긴 하겠지만, 이 시대에 과학 수사대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나도 말에 올라탔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강도는 겨우 한 번 소탕했지만, 우리는 그 이상으로 공작이 만족할 만한 일을 해낸 상황이었다.
남의 영지를 침범해도 된다는 소리에 자작 영지를 반 이상 가로질렀고, 자작의 요새를 불태우기까지 했다.
거기다, 남들은 모르겠지만, 자작도 죽게 놔두었고.
이제는 더 성과를 낼 것도 없었다.
"그 배낭은 뭡니까?"
"기념품!"
마지막으로 미겔의 물음에 대답하고, 모두에게 크게 외쳤다.
"돌아갑시다!"
내 말에 모두 기쁜 얼굴이 되었다.
우리는 다시 자작의 영지를 가로질렀다.
돌아가는 길에는 마물도 강도도 보이지 않았다.
정찰을 나섰던 마물들은 요새에서 내게 죽었었고, 탈영병들은 위쪽에서 연락이 끊어지자, 일을 그만두고 본대로 귀환했기 때문이었다.
요새가 불타고, 자작이 죽은 일을 영주성에 있는 후계자가 알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정찰하던 마물들도 죽어, 그 후계자는 가문을 이을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이미 공작령으로 돌아가 있을 테고, 결국, 요새가 불타고 자작이 죽은 사건은 미궁에 빠지게 될 터였다.
그리고, 내 생각대로 일은 마무리되었다.
우리가 저택에 복귀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후계자가 자작 가문을 이었다는 말도 들려오지 않았고, 웨이브가 일어나 마물들이 대대적으로 침공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우리는 세 번째로 복귀한 조였다.
동쪽과 서쪽으로 떠났던 조들은 강도와 마물들을 잡다가, 다른 영지로 넘어가는 바람에 옆 영지의 기사들과 거친 말싸움을 벌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두 조는 처음 계획한 것처럼 옆 영지들에게 그레시아 공작가의 힘을 보여주고 돌아왔다.
다른 두 조는 이미 보고까지 끝낸 뒤였고, 우리 조는 내가 공작에게 보고하게 되었다.
내가 일행을 통솔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로 향하면서 어렸을 때 처음으로 공작의 집무실에 찾아갔을 때가 생각났다.
살기 위해 약속도 없이 플로라의 안내를 따라 찾아갔던 집무실.
이제는 누구의 안내도 받지 않고, 정식으로 찾아가는 중이었다.
집무실 문은 어렸을 때 보던 것과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토록 커다랗게 보였던 문이 작아 보이는 것은 내가 그만큼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라는 말이 들려왔다. 공작의 목소리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무실에는 공작만 있었다.
기사단이 움직인 거라, 기사단장도 같이 들을 만했지만, 기사단장은 아직 복귀 전이었다.
북쪽 산맥은 무척 험난하다고 하는데, 괜찮을지 모르겠다.
평상시처럼 집무실 책상 뒤에 앉아 있던 공작은 나를 보고 작성하던 서류를 옆으로 밀어놓았다.
이런 것도 어렸을 때와 비교하니 재미있었다.
그때는 내가 안에 들어왔는데도 서류를 보며 한참 동안 관심을 주지 않았었다.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을 보면, 그 일이 생각보다 마음에 남았던 모양이었다.
나와 달리, 공작은 그때 일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란사로테 영지를 다녀온 부대의 보고인가."
"네."
나를 대하는 모습은 달라졌지만, 공작의 성격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다.
언제나 삭막한 저 모습.
이래서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버지로 느껴질 수가 없었다.
나도 담담한 어조로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했다.
처음 강도들을 만나 처리한 일과 그들을 심문해서 영지의 사정을 파악한 것.
그리고, 그들이 탈영병 코스프레 중인 남작의 병사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 납품 고리를 쫓아서 요새를 찾아가게 된 것.
마지막으로 요새를 박살 내고, 창고를 불태운 일까지.
공작은 내 말을 말없이 들었다.
마지막까지 공작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요새 이야기를 듣는 중에 공작의 눈썹이 씰룩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 정도 움직임이면 공작도 꽤 놀란 것이다.
자작이 죽은 이야기까지 하면 더 놀라게 할 수 있겠지만, 내 안전을 위해 그 이야기는 꺼낼 수 없었다.
내 보고가 끝난 뒤에도 공작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나를 노려보더니, 그다음에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돌아가라는 말이 없으니, 나는 책상 앞에 서서 계속 기다려야 했다.
나는 한참 만에 공작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수고했다. 그리고, 요새를 불태운 건……. 잘했다."
마지막에 공작의 입에서 칭찬이 흘러나왔다.
처음으로 들은 칭찬이었다.
별로 받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기대도 없었지만, 들어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이래서 나쁜 남자의 칭찬은 위험하다는 건가.
그래도, 뿌듯하거나 감격하지는 않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을 뿐이었다.
나도 표정 없이 고개만 숙이고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기사들과 병사들은 원래 자리로 복귀했고, 얼마 뒤에는 북쪽 산맥으로 향했던 기사단장과 마누엘이 돌아왔다.
생각보다 고생이 많았던 것 같았다.
병사 중에는 사망자도 나왔고, 다친 기사도 보였다.
마누엘도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 * *
기사단장이 돌아온 날 밤.
공작은 집무실에서 기사단장의 보고를 들었다.
"예상보다 마물들이 강했습니다. 숫자도 늘었고, 돌연변이 마물 이외에도 봉인지에서 건너온 마물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평상시처럼 관리했다가는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고생 많았네."
기사단장의 말에 공작이 치하했다.
공작은 말을 하면서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날은 그토록 어렵게 칭찬했는데, 오늘은 이렇게 쉽게 말이 나오다니.
공작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공작의 칭찬 뒤에, 집무실에 남아있었던 총집사가 입을 열었다.
"북쪽 산맥의 마물들도 전과 달라졌다면, 란사로테 자작이 실책을 범한 게 아닐 수도 있겠군요."
총집사의 말에 공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병력을 중앙으로 모았다지만, 란사로테 자작은 너무 쉽게 마물들에게 밀렸었다.
그동안 자작이 실책을 범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자작의 실책보다 마물들의 움직임이 더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자작이 안 죽었으면, 요새가 불타건 말건 수도로 떠났을지도 모르겠군."
"운이 좋았습니다."
바로 오늘 공작과 총집사는 란사로테 자작이 불탄 요새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공작과 총집사는 뜻밖의 이야기에 무척이나 놀랐다.
처음에는 그냥 놀랐을 뿐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자작의 죽음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운이 좋았다는 총집사의 말에 공작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운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운이 너무 좋아. 자작이 요새를 방문하는 도중에 마물의 습격을 받고, 불타버린 요새를 찾아갔다가 도움도 못 받고 죽어버렸다는 말인데……."
"자작 쪽은 요새가 마물에게 습격을 당해서 자작도 죽고 불도 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쪽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고."
"하지만, 운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운이 아니라면 한가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운이 아니면, 결국, 누가 죽였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기사와 병사들에게 들은 것도, 자작에게 남겨진 상처도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내용과는 전혀 다른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작은 마물에게 죽은 것이었다.
"그냥, 운이 좋은 것으로 합시다."
결국, 공작도 총집사의 말에 동의했다.
어차피 자작의 후계자에게는 요새를 누가 불태웠는지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냥 운이 좋은 것으로 끝내는 게 제일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