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제14편 요새 전투 (2)
반란을 일으킬 거로 생각했던 사람은 자작의 아들이었다.
그는 나 같은 서자가 아니라, 자작의 정식 후계자였다.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도 아니고 무슨 그런 막장 드라마가 있냐고 했지만, 말을 들어보니 꽤 그럴듯했다.
지금 수도로 도망치려고 하는 것은 이 영지의 영주인 늙은 자작이었다.
젊었을 때는 꽤 괜찮았던 영주였다지만, 지금은 자기 보신에만 급급한 노인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다행히 자작의 아들은 꽤 괜찮은 귀족이었고, 영지의 관료들과 기사들도 그를 좋아하는 듯했다.
문제는 영주인 아버지가 오래도록 죽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성격이 좋다는 말처럼 늙은 아버지라도 아들로서 잘 대해준 모양이지만, 이번 일로 둘 사이가 갈라진 모양이었다.
그 후계자는 영지를 지키자고 매일같이 영주에게 이야기하는 중이었고, 영주는 후계자에게 검까지 들이댄 상황.
병사들이 반란 이야기를 꺼내는 게 별로 안 이상해 보였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내가 남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았다.
이야기를 들은 뒤, 내 지시로 기사와 병사들은 빠르게 요새에서 물러났다.
기사들과 병사들은 마지막까지 내 명령에 따라 움직였고, 요새에는 이제 나 이외에 살아있는 사람은 남지 않았다.
시체가 가득한 요새.
전부 내가 지시한 일이었기에 기분이 조금 우울해졌지만, 바로 털어낼 수 있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죽음에서 돌아온 시간까지 포함하면 이미 이 세상에서 지낸 시간이 더 많았다.
전생의 가치관과 기억으로 계속 우울해질 수는 없었다.
나는 창고로 향했다.
오래전 지어진 커다란 창고의 문에는 큰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단검을 꺼내 자물쇠에 대고 내려그었다.
서걱.
보이지 않는 검기가 자물쇠를 잘랐다.
자물쇠가 떨어져 나가고, 굳게 닫힌 통나무 문을 힘껏 열자, 창고 안이 보였다.
창고 안에는 여러 가지 물건이 가득 쌓여 있었다.
식량이나 농기구 같은 평범한 물건은 없었다.
영지민에게 수탈할 때는 식량도, 농기구도 같이 빼앗았다고 들었는데, 그런 것은 병사들과 기사들끼리 나눠 가진 모양이었다.
이곳에 있는 것은 그래도 돈이 되는 물건들이었다.
상인들에게서 빼앗은 것으로 보이는 고급 천들과 은으로 만든 식기들.
그림과 조각, 낡아 보이는 액세서리들, 무기와 갑옷들도 보였다.
한 짐을 싣고 가면 큰돈이 되겠지만, 굳이 챙겨야겠다고 생각되지는 않는 물건들이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눈만 높아진 모양이었다.
반 이상 털렸다고 해도 아직 돈도 많이 남아있었고.
솔직히 그것보다, 이 많은 물건을 가지고 갈 방법이 없었다.
아쉽게도 유물 주머니가 그렇게 크지를 않았다.
"이 안에 유물이 굴러다니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골라서 넣을 시간도 없을 것 같고, 아무래도 자작이 오기 전에 태워버리는 게 좋겠지?"
자작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긴 했지만, 할 일은 미리 처리해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리저리 불을 놓을 곳을 확인하고, 나무로 돼 있는 물건들을 이곳저곳에 던져 놓은 뒤, 단검에 변형된 마나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단검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마나 변형은 솔직히 실패한 것이었다.
비드라는 제국 기사가 검으로 불길을 뿜어내는 것을 보고 만들어 본 것이었는데, 예상보다 효과가 떨어졌다.
마나를 한참 동안 밀어 넣었지만, 결국, 말린 나뭇가지에 불을 붙일 정도의 열기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칼에서 불길을 뿜어내던 비드에게는 비할 바도 아니었고, 유물이 아니라 평범한 발화석을 쓰는 것보다 효율이 떨어졌다.
그래도 나는 발화석을 안 가지고 다녀도 되는 게 아니냐고 정신승리를 하는 중이었다.
"지금 같은 때도 도움이 되니까."
혼자서 만족을 하며 검에 마나를 불어넣고 있자니, 단검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제 높게 쌓인 천에 불을 붙일 차례였다.
검을 천에 가까이 가져가던 그 순간.
나는 엉뚱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크왕! 커엉!
아우우웅!
개가 짖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늑대의 하울링과 닮은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저 소리는 짐승의 소리가 아니었다.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마나가 실려있는 소리, 마물이었다.
나는 밖으로 몸을 날렸다.
먼저 떠난 기사와 병사들이 걱정이었다.
갑자기 마물이라니, 분명 이곳은 마물이 사라진 숲이었을 텐데.
다행히 마물의 소리는 일행이 떠난 방향이 아니라 다른 방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숲에 난 외길, 수도로 이어진 길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니, 마물들 소리 사이로 다른 소리도 들려왔다.
촤악!
"더 빨리! 요새까지만 버터! 달려!"
히이이잉!
채찍질하는 소리와 사람의 고함, 그리고 마차가 달리는 소리였다.
나는 마나를 돌려 몸을 가볍게 한 뒤에,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요새를 빠져나와 짧은 벌판을 지난 뒤, 나는 길옆의 나무로 뛰어올랐다.
분명, 조금 전에 오늘 자작이 마차를 타고 온다는 말을 들었었다.
물론, 약탈한 물건을 싣고 오는 마차일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되었건 먼저 몸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나뭇가지를 밟고, 다른 나무로 몸을 날렸다.
얼마 전 봉인지에서 나무를 타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마나를 퍼부어 억지로 나무를 탔었다.
그 당시에는 마나의 위대함에 놀라고 있었지만, 지금 보면 무식한 방법으로 나무를 타고 있었다.
빨리 달리게 해주는 심법을 이용하면 나무를 타기도 무척이나 쉽고, 편했다.
몸이 가벼워지니, 밟은 나뭇가지가 휘청이지도 않았고, 나뭇가지가 움직이지도 않으니, 전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무 사이를 나는 내 모습은 바람을 타고 나르는 날다람쥐 같았다.
그렇게 나무 사이를 뛰어넘다 보니, 요새를 향해 달려오는 마차를 볼 수 있었다.
무척이나 화려한 마차였다. 아무리 봐도 약탈한 물건을 싣고 오는 마차는 아니었다.
마차 옆을 기사 두 명이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원래 호위가 두 명이었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마차 겉에도 피가 가득 튀어 있었고, 두 명 기사도 몸이 성하지 않은 것을 보니, 오면서 이미 여러 기사가 낙오한 모양이었다.
남은 두 기사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말은 이미 피투성이였고, 다친 기사들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다행히 마차는 멀쩡했다. 무척이나 튼튼하게 만든 마차인 것 같았다.
아니면, 기사들이 열심히 마차를 지켰던가.
마차와 기사들 옆에는 붉은 털 네발짐승들이 달리고 있었다.
늑대와 비슷한 점이 많았지만, 거대한 덩치에 뿔이 달렸으니, 평범한 늑대로 보기는 무리였다.
이리저리 살펴봐도, 저런 짐승은 없었다.
저 마물들은 짐승이 마나로 변형된 것이 아니라 봉인지에서 온 마물들이었다.
'정찰병이라는 마물들인가.'
딱 봐도 마물들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는 게 머리가 좋아 보였다.
지금 마차를 습격하는 것도, 일종의 몰이사냥이었다.
마물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마차를 움직이고, 마차 뒤에서 우두머리 마물이 하울링으로 마물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똑똑하다면, 저런 기사들이 호위하는 마차를 습격할 리가 없을 텐데.'
다른 영지와 구분도 할 줄 아는 마물들이었다. 그런 마물들이 기사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설마, 저렇게 호위하는 마차에는 높은 사람이 타고 있다는 것을 아는 걸까?'
너무 과한 생각 같지만, 지금은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나무 위에 서서 달리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마차는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같이 위험했지만, 나는 나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는 조금 전까지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이곳에 오는 자작을 내가 죽여야 하는지.
귀족을 죽이는 것이 문제는 아니었다.
이미 다른 자작도, 남작도 죽여봤는데, 귀족을 죽이는 것으로 고민할 이유는 없었다.
죽은 병사들의 말대로라면, 자작만 죽으면 후계자가 이 영지를 열심히 지켜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 모르게 이곳에서 자작을 죽이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공작은 손 안 대고 마물을 막을 수 있어서 좋고, 후계자는 영지를 지킬 수 있어서 좋고, 영지민들은 나쁜 영주가 죽고, 제대로 된 영주가 서게 되니 좋을 터였다.
하지만, 내게는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내가 직접 죽이게 되면 의심을 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죽인 모습을 본 사람은 없겠지만, 우리가 이곳에 왔다가 간 것을 아는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바로 나와 같이 왔던 기사와 병사들이었다.
공작이 물어보거나, 가문의 윗사람이 물어보면 전부 말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래서 계속 고민이었는데, 이렇게 마물들이 공격해주다니.
이건 하늘이 준 기회였다.
* * *
"조금만 더 가면 돼! 다들 몸을 던져서라도 마차를 지켜!"
자작은 몸을 덜덜 떨면서도 고함을 질렀다.
그래야 두려움이 조금이나마 사라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자작은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토록 조심했는데, 이런 위기라니.
물론, 요새로 들어가기만 하면 괜찮아지겠지만, 이런 일은 자신의 심장에 무척이나 안 좋았다.
자작은 요새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떠올리고, 마차 한쪽에 세워둔 배낭을 보며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생각을 이어가던 자작은 결국 영주성에 있는 아들이 떠올랐다.
"네놈도 나이가 들면 알 수 있을 거야."
어제 영주성을 나올 때도 자신에게 와서 사정했던 아들.
검까지 겨누었는데, 계속 사정을 하는 것을 보니, 자식을 잘 키우기는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자식 때문에 자작은 요즘 무척 힘이 들었다.
자작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그도 젊었을 때는 무척이나 호탕했던 귀족이자 영주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몸이 안 좋아지자, 생각이 점점 바뀌었다.
호탕한 모습에서 침울한 모습으로.
배려하는 성격에서 날카로운 성격으로.
남과 영지를 생각하던 삶에서 자신을 생각하는 삶으로.
자작은 살고 싶었다. 몸이 아플수록, 나이가 들수록, 그는 살고 싶었다.
이제는 영지를 수탈해서 수도로 가는 것도 전혀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젊었을 때 영지를 키우느라 고생한 덕분에 이렇게 몸이 안 좋아졌는데, 이제야 자신을 위해 영지를 사용하는 게 뭐가 어떻다는 말이지.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자식의 눈치를 보느라, 일이 복잡해졌지만, 그래도 이렇게 해낼 수 있었다.
"네놈도 수도에 가게 되면 내가 잘했다고 생각할 거야."
어차피 내전이 벌어지면 승자의 기준으로 다시 영지들이 배분될 터였다.
승리할 가능성이 제일 큰 제2 왕자에게 줄을 섰으니, 수도에 가서 제2 왕자 옆에 계속 붙어있기만 해도 충분했다.
나중에 다시 이 영지로 돌아와도 좋고, 운이 좋으면 저 그레시아 공작 영지를 얻게 될 수도 있었다.
"그건 너무 심한 생각이려나."
이어지는 생각에 희쭉 웃었던 그는 마차가 멈춘 것을 알게 되었다.
드디어 요새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요새를 지키는 기사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병사들의 외침도 들리지 않았다.
마차를 멈춘 마부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같이 달려왔던 호위 기사들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크르르릉.
대신 마차 문밖에서 마물들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자작은 표정을 굳혔다.
요새에 채 도착하기 전에 마차가 멈춘 모양이었다.
요새에서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싶었지만, 마차밖에서 으르렁거리는 마물들 소리가 너무 귀에 거슬렸다.
그는 용기를 냈다.
여기까지 버텨왔는데 마차 안에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의자 옆에 세워둔 검을 잡았다. 그리고, 몸에 걸친 유물들을 확인했다.
기사도 아니었고, 싸우기 좋은 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지만, 유물을 쓰면 요새까지는 갈 수 있을 게 분명했다.
'하나, 둘, 셋'
속으로 숫자를 센 그는 힘껏 마차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행스럽게도 늙은 몸이 제대로 움직여주었다.
그는 유물을 낀 손을 내밀어 발동시킬 준비를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말도 안 돼. 요새 안이라고?"
마차는 부서진 목책 사이에 걸려있었다.
말들은 죽어 있었고, 호위 기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마부는 앞에서 마물들에게 먹히고 있었고, 나머지 마물들은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요새는 폐허로 변해있었다.
마차가 걸려있는 목책만 부서진 게 아니었다.
시체가 곳곳에 널려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자작은 넋을 놓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어느 순간 눈이 반짝였다.
활짝 열린 창고 안에는 아직도 물건이 가득 쌓여 있었다.
폐허가 되었지만, 아직 물건들은 남아있었다.
"좋아, 내 물건들만 무사하면 아직 방법이……."
자작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마물들이 달려들었다.
"안돼!"
비명과 함께 유물들이 빛을 발했다.
반투명한 방벽이 펼쳐지고,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바닥에는 전기가 흐르기까지,
동시에 여러 개의 유물과 능력이 발동된 것이다.
마물들이 비명을 지르고, 몇 마리는 불에 타기도 했다.
하지만, 그사이에 마나 방벽은 부서졌고, 마나가 바닥난 그는 마물 아래에 깔렸다.
"커억."
마물에 깔린 그는 이미 배가 반쯤 갈라져서 창자가 보이고 있었고, 팔 하나는 떨어져 나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늙은 몸이라 오래 버티기는 어려워 보였다.
자작이 죽어가자, 멀리서 지켜보던 우두머리 마물이 다가왔다.
마물은 마지막까지 조심했던 모양이었다. 정말 머리가 좋은 마물이었다.
하지만, 그 마물을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다.
츄악!
우두머리 마물의 목이 잘려 나가고, 이어서 단도가 날아와 자작을 밟고 있던 마물의 머리에 박혔다.
점점 어두워지는 자작의 눈에 폭풍처럼 움직이며 마물을 쓰러뜨리는 사람이 보였다.
아직 어려 보였지만, 죽어가는 자작이 보기에는 용사가 재림한 것 같았다.
마물들이 모두 쓰러지고, 대검을 든 남자가 다가왔다.
자작이 힘을 냈다.
조금 전에는 죽음을 각오했었지만, 역시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마, 마차 안 가방에 포, 포션을……."
하지만, 젊은, 아니 어려 보이는 남자는 자작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제발 살려……. 포, 포션만 있으면……."
* * *
내가 보기에는 포션으로도 살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리고, 살려줄 생각도 없었다.
마지막에 내가 나선 이유는 마물들이 습격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였다.
머리가 좋은 마물들이었다.
마물들을 살려두었다가는 자작도 먹어버리고, 죽어버린 마물들을 끌고 갈 수도 있었다.
"용, 용사가 왜……."
자작은 알 수 없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나는 죽은 자작을 잠시 쳐다보다가 마차로 걸어갔다.
포션이 들어 있는 배낭이라니.
저 창고에 들어 있는 물건들보다 내게 더 쓸모있는 물건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열심히 움직였다.
결혼식에 늦지 않으려면 바쁘게 서둘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