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제11편 주변 정리 (1)
"이제는 어른이라고 해도 될 것 같군요."
미겔은 나와 같이 길을 나서는 것이 무척이나 기쁜 것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르쳤던 미겔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나의 성장이 기쁠 만도 했다.
하지만, 그의 말과 달리, 아직 나는 다 자란 게 아니었다.
병사 중에는 나와 비슷한 덩치를 가진 자들이 꽤 있었지만, 아직 기사들의 몸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마나가 육체를 강화한 덕분에 기사들은 일반인보다 평균적으로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육체적 능력을 각성한 귀족들도 다를 바가 없었다.
"어린 꼬맹이가 이끌어서 불만은 없고요?"
"하하, 그럴 리가요. 그리고 어차피 실무야 저에게 맡기지 않았잖습니까."
미겔도 이제 선임 기사였다. 기사단의 셋밖에 없는 선임 기사.
제일 어린 선임 기사로 아직 30대 중반이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젊었을 때 보이지 않던 관록이 느껴졌다.
공작가의 기사단은 수도에 남게 되는 일부를 제외하고 넷으로 나뉘어 병사들과 함께 수도를 떠났다.
북쪽 산맥은 기사단장 알론소가 많은 수의 기사와 병사들을 이끌고 출진했고, 동쪽은 부 기사단장, 서쪽은 우고 기사가 기사와 병사들을 이끌고 움직였다.
원래대로라면 공작가의 후계자인 시몬이 기사단장 알론소와 같이 움직여야겠지만, 결혼식을 앞둔 신랑이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 대신 형 마누엘이 알론소와 움직이게 되었다.
영지 북쪽이라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나는 마누엘에게 속으로 위로를 보냈다.
그리고, 남쪽은 내가 선임 기사인 미겔과 같이 담당하게 되었다.
아마도 미겔이 내 교육을 담당했다는 이유로 같이 보낸 것 같았다.
운이 좋게도 후안도 같이 가게 되었다.
후안은 스스로 나서서 내 수발을 들어주었다.
기사 중에 많은 이들은 여행 중에는 종자를 데리고 다녔다.
판금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여행하기에는 여러 가지 불편함이 있었다.
종자는 그런 불편함을 해결해 주고, 대신 기사의 검을 배우는 일종의 문하생이었다.
종자까지 수당을 지급하기 힘든 개인 기사들이나 아카데미 기사들은 데리고 다니기 힘들었지만, 귀족 가문의 기사나 왕실 기사들은 대부분 종자를 데리고 다녔다.
어차피 귀족 가문에게는 기사의 종자들도 한 명의 병사였다.
하지만, 나는 종자가 필요가 없었다.
내 무기들은 전부 유물 무기였기에 다른 무기들보다 보수와 정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대검은 부러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금도 상처도 나지 않았다. 천으로 잘 닦아 주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단검은 대공녀에게 유물 수리를 받은 뒤로 반짝반짝했고.
물론, 아카데미에서 지급한 검은 여러 번 해 먹었지만, 그건 카트린 빽으로 다시 구하면 그만이었다.
갑옷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입는 옷은 아카데미 제복과 가끔 입는 가죽 갑옷이었다.
망가지기는 금방 망가졌지만, 판금 갑옷보다 보수와 정비하기는 훨씬 편했다.
망가지면 유물 주머니 속에 있는 다른 옷과 가죽 갑옷으로 갈아입으면 그만이었고.
지금도 가죽 갑옷 위에 가슴만 철 흉갑을 걸치고 있었다.
이 철 흉갑도 귀찮기만 했지만, 주위의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말을 타고 움직인다고 해도 더 특별히 어려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 더 귀찮아지기만 했을 뿐.
하지만, 기사들과 같이 움직이는데 공작 아들이 말 먹이를 주러 돌아다니는 것도 보기에 좋은 것은 아니었다.
서자라고 수군거리면서 또 그런 것은 안 좋게 보는 것이 웃기긴 했지만, 귀족의 허세라는 게 그런 것이었다.
"후안 정도면 다른 기사 종자로 들어가도 되었을 텐데……."
"제 주제를 잘 압니다. 나중에 공자님이 성공하시면 십인 대장 정도만 주시면 됩니다."
후안은 지금도 십인대 정도는 충분히 맡을 수 있었다.
내가 카트린과 던전에 들어갔을 때, 우물에 남았다가 왕실 기사에게 한바탕 혼쭐이 난 뒤, 후안은 피나는 노력을 했었다.
마나를 가지지 못해 기사들은 상대할 수 없겠지만, 병사 중에는 단연코 뛰어났다.
하지만, 후안은 내 수발을 들기 위해 따로 직책을 맡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후안이 끌어주는 준마를 타고, 기사들과 함께 길을 나아갔다.
등에는 대검을 매고, 허리에는 단검을 차고, 만약을 대비해서 목걸이와 반지까지 차고 있었다.
"남쪽이면 란사로테 자작령까지 가는 거겠죠?"
내 말에 미겔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이나 강도가 다른 영지까지 도망치면 그 영지를 침범해도 된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영지 경계를 꼭 넘으라는 말과 다른 말이 아니었다.
결국, 옆 영지에 시비를 걸라는 말이었다.
북쪽은 산맥의 마물을 처리하는 것이라 상관없지만, 다른 세 방향은 분명 다른 영지들과 시비가 붙을 게 분명했다.
후계자 시몬의 결혼을 과시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분명 과한 행동이었다.
뒤숭숭한 지금 같은 때에, 저런 시비를 건다니.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공작의 목적이 무엇일지 지금은 알기 어려웠다.
"최악의 경우 마물이나 강도가 아니라 다른 영지의 기사들과 싸울 수도 있습니다. 공자님의 실력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기사들과 싸우게 되면 우선은 뒤로 물러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미겔이 내 실력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은, 몇 년 전이었다. 그가 더는 가르칠 게 없다면서 내 교육을 그만두었을 때였다.
그 뒤로 몇 번 대련하기는 했지만, 그는 제대로 된 내 실력을 보지 못했다.
내가 실전을 경험했다는 것도 말로만 들었었고,
이번에도 공작과 대련한 뒤에 열심히 기사들을 피해 다녀서 1년간 성장한 실력을 기사들은 알지 못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상황 보는 것은 잘하니까요. 하지만, 내가 통솔자라는 것은 잊지 마셨으면 합니다."
내 실력을 알지 못하는 것도 알고 있었고, 나를 걱정해주는 것도 고마웠지만, 너무 지나치면 곤란했다.
내 말에 미겔은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월권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주의하겠습니다."
그는 그 말을 큰 소리로 말했다.
주위 기사와 병사에게 자신의 사과를 알린 것이다.
그의 말 뒤에, 기사들과 병사들이 나를 훨씬 조심하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내 반응을 시험한 건가요?"
"그럴 리가요."
야영할 때 낮의 일을 물었지만, 미겔은 강하게 부정했다.
"제가 실수한 게 맞습니다. 공자님은 제가 깨닫게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말을 하면서 미소를 짓는 것을 보니, 지금 저 말도 믿기 어려울 것 같았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전생을 기억한다고, 복잡하고 미래적인 현대생활을 했다고, 주위에 있는 이들보다 나을 게 없었다.
어렸을 때는 천재 흉내도 내보긴 했지만, 좀 더 일찍 머리가 깨었고, 좀 더 지식이 많았을 뿐이었다.
이 세계에는 나보다 더 대단한 지혜와 깨달음을 가진 사람이 산처럼 많았다.
'전생을 기억한다고 천재가 되었다면 내가 그렇게 많이 죽을 리가 없었겠지.'
오늘도 미겔을 보며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말이 없는 병사들과 함께 움직이니, 영지의 경계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쉬기로 한 방학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에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이동하니, 영지의 경계에서 순찰하던 병사들과 만날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작은 마을에서 열 명의 병사. 십인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십인 대장이 대표로 나와 미겔에게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문제가 될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동안 란사로테 쪽에서만 일을 벌였는데, 요즘은 영지 경계를 자주 넘어오곤 했습니다."
강도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물도 비슷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 근처에 있는 마물들은 무척 똑똑한 놈들입니다. 치안도 대충 파악해서 약한 곳만 공격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란사로테 자작령은 제대로 운영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라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간 너무 어려워졌는지 이제는 우리 영지도 넘보고 있습니다."
힘이 있는 영지들도 힘을 모으느라 힘 드는데, 작은 영지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더 먹어 치울 게 없어서 우리 영지로 넘어오려고 한다니. 영지가 얼마나 망가졌길래 그런 말이 나오는 걸까?
"그 정도면 우리 영지에 도와 달라고 할 만도 할 텐데요."
내 물음에 미겔도 병사도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영지를 제대로 운영 못 해서 도움을 받는 게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건데요."
그놈의 쓸데없는 명예. 영지가 망하게 돼버리면 아무 쓸데가 없는 명예였다.
말을 듣던 다른 기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것보다, 란사로테 자작이 제2 왕자님을 지지해서가 아닐지……."
그레시아 공작은 공작령답게 중립을 표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1 왕자에 가까운 편이었다.
그레시아 공작은 언제나 말없이 왕실을 후원하고 있었다.
제1 왕자가 정식 후계자였으니, 왕실의 후원자인 공작으로서는 당연히 제1 왕자를 지원할 것으로 다들 생각하고 있었다.
수도에서도 그렇게 보고 있었고.
하지만, 공작의 모습을 떠올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1 왕자의 뒤를 따르는 공작의 모습을 생각하니, 영 그림이 안 나왔다.
공작이라면 차라리 제1 왕자를 베어버리는 그림이 그럴듯할 것 같았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보다, 그런 이유라면 오히려 말이 되었다.
기사들이 알 정도로 공공연하게 제2 왕자 편에 붙었다면 공작에게 손을 벌리기는 어려웠을 게 분명했다.
우리는 병사들에게서 강도들의 이동 경로와 마물들의 영역이 그려진 지도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다른 영지에서 움직이고 있는 게 대부분이라 자세한 지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디서 찾아야 할지는 알 수 있었다.
이 지도가 없었다면 시몬 결혼식에 참가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고, 개학 때까지 수도에 돌아가지 못할뻔했다.
그렇게 우리는 시작부터 다른 영지로 넘어가게 되었다.
마을에서 마지막 휴식을 취하고, 바로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평범한 길이었지만, 경계로 세워진 팻말을 넘으니,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정말 망한 영지 같은데요."
부서진 마차들과, 버려진 시체들.
지나가다 본 마을도 폐허가 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엉망이었다. 이렇게 엉망이 된 영지와는 교역도 불가능해 보였다.
주된 교역로는 아니었으니, 공작령은 별 상관이 없었지만, 이 영지의 영지민들은 어떻게 버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영지 안으로 들어가다가 처음으로 마주친 사람들이 있었다.
예상했다면 예상했던 대로 처음 마주친 사람들은 강도들이었다.
그것도 더러워진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와 병사들로 이루어진 강도였다.
"탈영병들인가?"
남작 영지에서 용병들이 강도로 전업을 한 것을 보긴 했지만, 기사와 병사들이 강도가 된 것은 처음 봤다.
"강도라니! 나는 란사로테 자작의 기사다! 그레시아 공작의 병사들이 말도 없이 경계를 넘다니, 자작님이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미겔의 말에 기사는 뜻밖의 소리를 했다.
어라? 잘못 본 걸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엉망인 채로 기사와 병사들이 움직일 리가 있나?
뜻밖의 대답에 미겔이 난감해하고 있을 때 내가 나섰다.
"우리는 란사로테 자작의 요청을 받고 왔다!"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어떻게 대답하려나.
"그, 그럴 리가……."
"그러면 큰일 아닙니까. 어서 알려야."
기사는 얼굴을 찌푸리고 병사들은 웅성거렸다.
거짓말에 속다니, 역시 탈영병들이었다.
나는 손을 들었다.
"공격! 강도들을 정리한다!"
내 말에 기사들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