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0화
제10편 귀향 (3)
"아뇨. 할 생각이 없습니다. 관심 없습니다."
공작의 물음에 잠시 멍했지만, 나는 오래지 않아 대답할 수 있었다.
전에 들었다면, 절대 생각도 안 하고 있다고 두 손 싹싹 빌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엄청난 난리를 일으키고, 풍파를 일으키겠지만, 내가 공작자리를 원한다면 도전 자체는 가능해 보였다.
공작이 알지 못하는, 내가 가진 유물과 내 능력이라면 가능성은 더 올라갈 테고.
공작의 말도 그런 가능성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일 테지.
아니면 그런 싹을 없애버릴 생각이던지.
어느 쪽이든 지금 나는 내 진심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나는 공작자리를 원하지 않고 있었다.
공작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일들을 감내할 생각도 없었고, 그사이에 힘들 어머니를 볼 생각도 없었다.
거기다 수도에 있다 보니, 공작자리가 그렇게 대단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물론, 잘만하면 공국까지 가능해 보이는 대단한 위치였지만, 다음 대 왕을 노리는 두 왕자를 보니 자리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 실력을 키워놓으면 자리에 매달리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도 내 실력이 이 정도 올라온 덕분에 공작이 저런 소리를 하는 거였다.
아직 아카데미도 1년이 겨우 지난 터였다. 앞으로 남은 2년 동안 무슨 일들이 일어날지 몰랐다.
지금 꼴을 보니, 얼마 안 있어 내전으로 왕국이 풍비박산 날지도 모르겠고,
지금은 공작자리 하나를 탐하기 위해 가족과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가족에게 죽는 것은 어렸을 때의 경험으로 충분했다.
내 말에 공작은 나를 한참을 쳐다보았다. 나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좋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지.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도 네 실력을 숨길 생각이냐."
"괜한 풍파를 일으킬 생각은 없습니다. 원래 조용히 방학을 즐기다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놈이 수도에서 그런 일을 벌이다니……."
그거야,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벌인 일들이었다.
솔직히 그냥 무시하면 아무 일도 없었겠지만, 그 당시에는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것보다 나는 지금 이 시각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공작과 검을 나눈 것도, 공작하고 이렇게 대화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생각이 없다고 하니, 너도 시몬의 결혼식을 도와라."
어차피 도울 일이 있으면 도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작이 말하는 것은 그런 도움이 아닌 것 같았다.
"나머지는 총집사가 알려줄 거다."
그렇게 말하고, 공작은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 버렸다.
역시 공작은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내 높이가 그만큼 올라간 것뿐이었다.
지금은 이 정도 대화가 전부겠지만, 언젠가는 실력이든 위치든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할 때가 올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떠나가는 공작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그날 밤.
공작의 집무실에 총집사가 찾아왔다.
언제나처럼 공작이 일을 마치기 전, 저택의 일과를 보고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총집사도 공작에게 들어야 할 일이 있었다.
집무실에 들어가니, 언제나처럼 공작이 책상 뒤에 앉아있었다.
다만, 항상 책상 위에 쌓여있던 서류들이 옆으로 치워져 있었고 그 대신, 반쯤 채워진 와인 잔이 올라와 있었다.
잔을 보니, 아직 손을 대지는 않은 것 같았다.
총집사는 처음 보는 공작의 모습에 의아해했지만,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는 공작에게 고개를 숙이고, 보고를 시작했다.
"결혼식 준비는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청첩장은 모두 전달되었고, 대부분 참여한다는 확답을 받았습니다. 진행되는 다른 계획도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선……."
제일 중요한 결혼식에 대한 보고가 길게 이어졌다, 이어서 다른 자잘한 보고가 뒤를 이었고, 마지막으로 오늘 도착한 두 공자에 관한 보고를 했다.
"……마지막으로 마누엘 공자도 별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공작부인도 만족해하시고, 오랜만에 만난 고용인들과도 잘 지내는 것 같습니다. 1년 만에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하신 것 같습니다."
마누엘은 생각보다 칭찬이 많아서 보고하는 총집사도 흡족한 상태였다.
문제는 그다음 공자였다.
"알렉스 공자는……."
그는 보고를 하기 전에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을 보니 이 보고는 의미가 없어 보였다.
대신 그는 공작에게 물어보았다.
"직접 보시니 알렉스 공자의 실력은 어땠습니까?"
오늘 알렉스와 공작이 대련한 것은 총집사만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작은 대부분의 일을 총집사와 공유하고 있었다.
기사단장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도, 아내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도 그에게는 이야기했다.
선대 공작부터 이어온 충성 때문이기도 했고, 공작이 어렸을 때 신전에서 계약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제껏 총집사는 공작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다른 일들도 그렇지만, 총집사가 수도에 만들어두었던 정보망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 정보망 덕분에 알렉스가 그동안 벌인 일을 들을 수 있었다.
알렉스에 대해 알지 못했다면 오늘 마중도 나가지 않았을 것이었고, 대련도 하지 않았을 거였다.
"정보가 아니었다면, 알렉스의 실력을 계속 몰랐겠지. 지금이 아니면 나도 파악하기 어려웠을지도……."
"설마, 그 정도였었습니까?"
공작의 말에 공작의 실력을 잘 아는 총집사는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작이 어떤 사람이었던가.
실력을 뽐내지 않아서 그렇지, 공작은 이 왕국에서 제일 강한 능력자 중 한 명이었다.
왕자들이 선대에서 내려온 능력을 낭비하고 있는 지금, 솔직히 공작은 초대 왕에 제일 가까운 다섯 사람 중 하나였다.
"몇 년 뒤면 내가 실력을 알 수 없을 테고, 20살 정도 되면 나보다 뛰어날 테지."
공작의 말에 총집사는 아연실색했다.
수도에서 알렉스 공자가 한 일을 알아내 왔지만, 이런 실력인 줄은 추후도 몰랐다.
거기다, 지금 공작이 한 말은 무서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공작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말은 20살이 되면 공작가에서는 누구도 알렉스 공자를 상대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마누엘도, 시몬도.
알렉스 공자가 서자이긴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공작가가 어떻게 될지 장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더 문제야. 서자라서.'
평범한 셋째 아들이라면 후계자를 갈아치우면 그만이었다.
형들이 불만을 품겠지만, 실력 차가 크면 상관없었다. 같은 귀족 사이에는 실력이 제일 중요했다.
가끔 불만을 느낀 전 후계자가 반란을 일으키는 일도 있지만, 실력 차가 확실하면 가문의 다른 사람들이 누굴 지원할지는 뻔했다.
하지만, 알렉스 공자는 서자였다.
아무리 실력이 대단해도, 핏줄을 더 중요시하는 인간이 가문에는 많았다.
더구나 그레시아 공작가는 왕가에서 갈라진 지 겨우 두 세대에 불과했다.
그레시아 공작가는 아직도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가문의 장로들 대다수는 평민 여자에게서 태어난 가주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알렉스 공자의 실력이 대단할수록 가문은 반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내전으로 가게 되는, 가문에게는 최악의 결과였다.
총집사는 조심스럽게 최악의 방법을 꺼내 보았다.
"힘으로 막는 것은……."
"늦었지. 이미 그 정도 실력은 넘었어. 도망친다고 하면 나도 못 막을 정도니까."
공작의 말에 총집사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후작가에서 벌어진 일을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괜히 일을 벌였다가 실패하면, 불만을 품은 서자가 무슨 일을 벌일 수 있는지 충분히 볼 수 있었다.
후작가에서 벌어진 일을 봐도 서자가 일을 벌이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후계자는 서자의 검에 죽어버렸고, 둘째 아들도 팔 하나가 날아갔다고 했나.
덕분에 시몬 공자의 결혼도 어려워질 뻔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알렉스 공자가 그런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불만을 품은 서자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럼 어떻게……."
"그래서 직접 물어보았지. 내 자리를 원하느냐고."
빙 둘러 가지 않는 말은 공작다웠다.
문제는 알렉스 공자의 대답이었다.
"알렉스 공자는 어떤 대답을 했습니까?"
"싫다고 하더군. 관심이 없다더라고."
다행스러운 대답이었다. 총집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이 말을 계속 믿을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다행이군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글쎄, 그거야 알 수 없지. 지금 사실이라고 해도 앞으로 어떨지 알 수도 없고."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부터 서자라고 목숨을 위협받았던 알렉스 공자였다.
불만이 없을 리가 없었다.
생각보다 훨씬 훌륭히 자라주었지만, 그 마음속에 무엇을 품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공작은 와인잔을 들어 올리며 말았다.
"관심이 없다는 것은 사실일 거야."
그는 와인잔에 담긴 붉은 와인을 노려보았다.
"나도 후계자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공작이라는 자리에 매여있고 싶지 않았으니까."
총집사는 문득 젊었을 때 공작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렇게 차가운 모습도 아니었었다.
그때의 공작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지 않았었다.
그는 땀에 젖은 채로 검을 들고 활짝 웃고 있었다.
"그렇다고 후회를 하는 것도, 내 책임을 외면할 생각을 한 적도 없었지만, 내가 만일 알렉스라면 절대 공작자리를 노릴 생각을 안 할 거야. 물론, 그 이상으로 화가 나 있다면 모를까."
공작은 침대 옆에서 자신을 노려보던 아이가 떠올랐다.
암살자를 상대로 자신이 올 때까지 혼자 버티던 어린아이. 그때도 평범치 않았던 아이였다.
생각해보면 화도 많이 나 있을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 알렉스 실력이라면 이 저택은 너무 좁았다.
"알렉스가 나보다 실력이 뛰어나게 된다면 어떨 것 같나. 모두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서자가 문제가 아닐 것이다.
아니 서자라서 더 좋을 수도 있었다.
후계자를 주는 것도 아니고, 가문의 전력을 올리기에는 다른 가문에 지위가 없는 서자가 안성맞춤이었다.
오히려 서자이기에 별의별 귀족 가문이 영입하려고 난리를 칠 게 분명했다.
공작의 말에 총집사는 내전으로 다가가는 왕국 사정을 떠올렸다.
그때까지 이 상황이거나, 내전이라도 벌어진다면, 알렉스의 가치는 엄청나게 올라갈 것이었다.
후계자 문제만 없다면, 가문에서 붙들고 있는 것이 제일 좋아 보일 정도였다.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알렉스가 실력을 뽐낼 생각이 없다고 했지만, 결국 소문은 날 수밖에 없으니, 대충 물을 타 놓는 게 좋겠지."
그렇다고 전부 알려지게 둘 수도 없었다.
"형을 위해 노력하는 우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 안 좋은 소문도 줄어들겠고."
"그러면……."
"이번 결혼 기념 마물 사냥에 기사 한 분대를 맡길 생각이야. 어떻게 하더래도 실력을 보일 테고, 그 결과 발표는 어느 정도 내가 알맞은 수준으로 조절할 수 있으니까."
평범한 마물 사냥이 아니었다.
마물 사냥을 핑계로 그레시아 공작가는 대규모 기동 훈련을 벌일 생각이었다.
그동안 가만히 있기만 한 게 아니었다. 공작가도 충분히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 마물 사냥으로 감히 간을 보는 주위 영지에게 경고를 보내고, 그레시아 공작령의 위엄을 왕국 전체에 알릴 생각이었다.
공작은 그사이에 알렉스의 실력을 슬쩍 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임시방편일듯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모두 알게 될 겁니다."
총집사의 말대로이긴 했다. 이건 몇 개월 몇 년 정도 시간을 벌 방법일 뿐이었다.
하지만,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가 되면 오히려 아무 문제가 없을 거야. 이 나라가 그때쯤이면 이런 모습이 아닐 테니까, 우리 가문도 그렇고."
공작의 눈이 깊어졌다.
왕국의 손꼽히는 능력자가, 왕위계승권이 남아있는 공작이 아무 생각이 없을 리가 없었다.
공국 왕이 욕심을 부리는 것처럼, 이 환난에 공작도 노리는 것이 있었다.
공작은 잔을 흔들었다. 붉은 와인이 출렁거렸다.
공작은 붉은 와인 속에서 처음 자신을 쳐다보던 아기를 떠올렸다.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던 아기였지만, 그 눈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기대하지 않던 아픈 손가락이 커서 이제는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되었다.
이 변수가 그의 손에 든 검이 될지, 아니면 그를 찌를 검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그는 감당할 생각이었다.
그게 그가 서 있는 공작이라는 자리였다.
공작이 들고 있던 와인을 쭉 들이켰다.
* * *
며칠 뒤.
정말 푹 쉬고 있는 나에게 공작의 명령이 내려왔다.
결혼식 기념으로 기사단 일부를 데리고, 남쪽 영지 경계에서 설치고 있는 마물들을 처리하는 명령이었다.
일부라지만 기사단을 내가 통솔하라는 것도 황당했고, 그 기사단을 데리고 옆 영지 경계를 넘어도 좋다는 말은 더 황당했다.
잘못하면 영지전 빌미를 만들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기사단을 데리고 출동하는 것처럼 다른 기사들과 병사들도 움직였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커다란 용병대 여럿을 고용해서.
결혼식을 기념해서 영지민들을 고통에 빠뜨리는 마물과 강도들을 정리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렇지만, 옆 영지 깊숙이 쫓아 들어가서 처리해도 된다는 말에, 다른 뜻이 있다는 의심이 풀풀 풍겨왔다.
그보다 이런 대규모 출진이라니.
공작은 1년 세금을 결혼식 축하 사냥으로 다 탕진할 모양이었다.
결혼식을 도우라는 말이 이런 식일 줄 전혀 예상 못 한 나는, 다음날 기사들과 병사들과 함께 수도를 나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