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제9편 귀향 (2)
숲 가운데 있는 연무장이라 해는 보이지 않았다.
어둡더라도 별 상관은 없었겠지만, 다행히 어둡지는 않았고, 그늘진 연무장을 보니, 새삼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곳에서 실력을 키워왔었다.
특혜라면 특혜인 것 같았지만, 공작부인도 허락한 한 일이었다.
아니, 특혜라기보다는 서자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싫어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커 보였다.
이 연무장에서는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플로라가 이곳에서 죽었었고, 나도 암살자에게 죽었었다.
물론, 전부 없었던 일이 되어버렸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 연무장에 지금 한 사람이 서 있었다.
1년 만에 보게 된 이 저택의 주인이자, 이 영지의 주인인 내 아버지.
안드레스 데 그레시아 공작. 그가 연무장 가운데 서 있었다.
솔직히 1년 전에도 그리 자주 보는 사람은 아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공식적인 행사 때나 가끔 보던 사람이었고, 가족에게도 아버지라기보다는 일족의 장 같은 느낌인 사람이려나.
서자인 내게는 남보다 못한 느낌일 때가 더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도 내가 왕실 아카데미를 다니게 해주고 높은 분들과 인사라도 하고 다니게 해준 것은 공작이 아버지라는 위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렇게 자란 것에 그의 도움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 속마음이 어떻든, 오늘도 이렇게 정중한 인사를 했다.
"부르셔서 왔습니다."
공작은 평상시에 입던 정복을 벗어두고, 활동복을 입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매일같이 하녀들이 쫙쫙 다려놓은 정복만 입은 것을 보다가, 이렇게 훈련 때 입는 활동복을 입은 것을 보니, 다른 사람 같았다.
"왕비의 초청장으로 수도에 가게 되었을 때, 대충 공주의 호위나 말벗으로 지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다. 수도의 상황이 복잡하니, 공주가 아카데미로 피신할 것 같기도 했고."
왕비에게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었는데, 공작은 처음부터 예상했던 모양이다.
생각보다 공작의 정보망이 대단했다. 이렇게 먼 영지에 있으면서도 수도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 공주가 아카데미로 가고, 네가 호위 비슷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그래도 네 앞길은 알아서 찾아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 뒤에 계속 들려오는 이야기가 그 수준을 넘어서더군."
공작에게 들키지 않는 게 무리였으려나.
그동안 벌인 일들을 생각해보니, 확실히 모르고 넘어가기 어려운 일들이 꽤 있었다.
"생각보다 실력이 뛰어나서 수업 중에 뽐내게 되는 것은 칭찬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이건, 현장 학습하고 실전 수업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아카데미 전체가 아는 일이니, 공작이 모를 리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성적 좋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고."
성적이야 솔직히 편견만 없었으면 훨씬 높은 등수를 받았을 거였다.
그런데, 공작의 말이 무척이나 길었다. 아직 본론도 나오지 않은 것 같은데.
더구나 듣고 보니, 뉘앙스가 이상했다.
설마, 이건 칭찬인가?
"그런데, 공국에서 벌인 일들은 내 생각 이상이었다. 성벽을 넘는 제국 기사들과 돌아오는 길에 습격해 오는 기사들을 아카데미 학생이 쓰러뜨린다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지."
확실히, 공국에서 벌인 일이 문제였던 모양이었다.
과거로 돌아와서 많은 사건이 없었던 일이 되었지만, 제국 기사들을 죽인 일들은 결국 남게 되었다.
같이 있던 기사들도 공작에게는 비밀로 하지 않은 것 같고.
하기야, 자식이 제국 기사들을 쓰러뜨렸다는 말을 부모에게 숨길 이유가 있을 리가 없었다.
"공주뿐만 아니라 대공녀까지, 인맥도 더 늘어난 것 같지만,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니,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평범한 귀족이라면 인맥 쪽이 더 궁금할 텐데. 역시 공작가의 패기려나?
"내가 궁금한 것은 네 실력이었다. 그래서 네가 올 때 마중을 나간 것이었고."
확실히 공작은 나를 보기 위해 마중을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를 이 자리에 부를 정도로 실력을 알아본 것일 테고.
"눈으로 봐서 알 수 없을 정도라니, 이 정도 실력이면 기사단장도 제대로 확인하기 어렵겠지."
솔직히 다른 기사들이 대련을 요청하면 대충 상대하면서 실력을 숨길 생각이었다.
괜한 시샘도 귀찮았고, 분란이 이는 것도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저택에 남아계실 어머니도 여러모로 힘드실 테고.
더구나 지금은 내 실력 올리기도 바빴다. 15살짜리 용사를 잡았으니, 이제 20살 용사를 잡을 때였다. 기사들과 안전한 대련을 할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계획은 초장에 틀려버린 것 같았다.
"너를 어떻게 대할지, 아니 어떻게 할지 정하기 위해서 지금 네 실력을 제대로 알아볼 생각이다."
검을 들고 서 있는 공작은 아무리 봐도 실력을 숨기며 대련할 상대가 아니었다.
어렸을 때 암살자를 처리하는 그의 실력을 조금이나마 본 적이 있었다.
기사 미겔을 한 수에 죽인 암살자를 도망가게 만들고, 쫓아가서 결국, 죽여버린 그 실력.
아직도 정정한 나이니, 실력이 늘면 늘었지, 줄었을 리는 없었다.
공작이 싸우자는데 거절도 불가능했고, 실력도 숨기기 어려웠으니, 결국 제대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다만, 쓸 수 없는 기술 몇 개는 봉인할 생각이었다.
설마 이것까지 들키지는 않을 터였다.
나는 손때가 묻은 철검을 들었다.
수련하면서 오랜 시간 잡았던 철검이었다.
벌써 1년이나 잡지 못한 검이긴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잡으니 검이 무척이나 가볍게 느껴졌다.
대검이나 단검을 쓸 때와는 감각이 달라지는 문제가 있지만, 제대로 된 검술을 펼치기는 이 평범한 장검이 더 좋을 수도 있었다.
쓸데없이 튀어나오는 능력들을 봉인하기도 좋고.
"다른 검도 있다고 들었는데……. 상관없겠지, 실력 확인이 목적이니."
설마 단검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검은색 검을 말하는 것일 리도 없고 대검을 말하는 게 분명할 거다.
그렇게 믿고, 자세를 잡았다.
"확실히, 이상하게 변형되었군. 그렇다고 잡스럽게 섞인 것도 아니고."
설마 자세만 보고도 아는 걸까.
"그럼, 나머지도 확인해 볼까."
공작이 마나를 퍼트리기 시작했다.
주변이 공작의 마나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젠장, 대련이라며!
저렇게 마나로 주변을 장악해버리면 움직이기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떻게 움직일지 바로 파악될 테고, 실력이 떨어진다면 움직이지도 못할 게 분명했다.
나는 마나를 퍼트리지 않아도 '마나 감응력' 덕분에 충분히 느낄 수 있지만, 공작의 마나를 막기 위해, 나도 같은 짓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나를 끌어 올려 주변을 장악해나갔다.
파파팍!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공작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팡!
공작의 움직임이 내 동체 시력을 넘어선 것이다.
초반부터 전력이라니! 어쨌거나 어린 아들이잖아! 좀 봐줘야지!
카앙!
눈에 보이지 않아도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더구나 마나까지 퍼트리고 있었으니,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내가 공작의 검을 막아내자, 공작이 입꼬리를 올렸다.
"재미있군. 이 검을 피하는 게 아니라 막아낸다고?"
아니, 피했어야 하는 거였어?
화아아악.
공작의 몸에서 다시 마나가 치솟는 게 느껴졌다.
덜컹.
기어가 한 단계 올라간 느낌이었다.
젠장, 이것도 전력이 아닌 모양이었다.
공작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명 공작은 공작가의 기사들이 배우는 검술과 같은 검술을 펼치고 있었다.
검이 나아가는 길도 같고, 순서도 같았다. 하지만, 이걸 같은 검술로 보기는 힘들었다.
카를로스 기사의 심법과 검술 일부에 불과한 검술이라고 비하했는데, 그런 내 생각을 한방에 박살 내주었다.
물론 공작은 각성하지 못한 기사와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각성한 심법의 완성도도, 귀족의 육체도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공작의 검은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심법과 맞지 않은 검술이라고 생각했던 검술이었지만, 그 속도와 힘이 배가 되고, 당사자가 훨씬 능숙하고 자유롭게 펼치니, 전혀 다른 검술이 되어 있었다.
심법과 맞지 않아 보이던 약점은 속도 때문에 사라진 것처럼 보였고, 뭔가 어색해 보이던 부분은 자유로운 변형으로 감춰졌다.
공작이 펼치는 검술 자체로 보면 이건 카를로스 기사 검술의 일부가 아니라 하나의 완성된 검술처럼 보였다.
이리저리 많던 생각은 공작의 검을 상대하기 시작하니, 전부 사라져버렸다.
딴생각하며 상대할 수 있는 검이 아니었다. 쓸 수 있는 능력과 없는 능력을 구별해가며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카앙! 캉!
막을 수 있는 검은 막아내고, 피할 수 있는 검은 무조건 피하고, 틈이 보이면 필사적으로 찔러넣어야 겨우 버틸 수 있었다.
15살 용사를 이겨서 가득 차 있던 자신감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사라져버렸다.
확실히 나와 대련을 하는 공작은 15살 용사를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물론, 나도 이길 수 있고.
그런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실력 테스트였다.
싸워서 이겨야 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나는 검 끝에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려던 것을 겨우 누를 수 있었다.
이어서, 마나를 변형해서 검을 밀어내려는 것도 참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되자, 바로 싸움이 기울어져 버렸다.
타앙!
검이 손에서 튕겨 나가고, 공작의 검이 내 목에 겨누어졌다.
나는 양손을 들어 올렸다.
"졌습니다."
내 목에 검을 겨눈 채로 공작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설마, 화가 난 건가.
저런 표정의 공작은 처음 보았다. 언제나 무표정한 공작이었는데.
잠시 뒤, 공작은 표정을 숨기고, 검을 거뒀다.
"왜 실력을 다 보여주지 않았지?"
"대련이니까요. 서로 죽이려는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네가 실력을 다 보여주면 내가 위험할 거라고 생각한 거냐?"
"그보다 제가 위험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내 말에 공작이 눈썹을 찌그러뜨렸다.
하지만, 내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더 격렬하게 싸우면, 공작이 나를 봐주면서 하기가 어려울 게 분명했다.
지금도 꽤 위험했다.
잘려나간 내 옷자락들을 보며 공작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런 위험이 없다고는 못하겠군. 네 말이 맞다."
이렇게 인정하는 것을 보면 성격도 나쁘지 않은 공작인데, 나와 어머니를 대하는 것은 왜 그 모양인지.
아니면 이 세계, 이 왕국에 내려온 규율과 규칙이 그 모양이었기 때문일까.
"이 정도로도 네 실력은 충분히 알겠다. 적어도 이 영지 안에서는 나와 기사단장을 제외하고는 너보다 강한 기사는 없을 것 같군."
다른 실력을 봉인한 채로 싸우면 기사단장에게 진다는 소리였다. 실력을 전부 풀어놓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으려나.
하지만, 그렇게 해도 공작에게는 이기기 어려울 것 같았다. 유물을 다 써도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럼 실력을 확인했으니 묻겠다."
이제야 본론이 나온 느낌이었다. 도대체 왜 이 저녁에 나와 싸우려 했는지, 이 물음으로 알 수 있겠지.
공작이 입을 열었다.
"알렉스, 너는 다음 대 공작에 도전할 생각이냐?"
나를 보는 공작의 눈이 석양을 받아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