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제8편 귀향 (1)
남작 영지에서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우리는 길을 서둘렀다.
마물과 강도를 잡으며 가자고 했던 마누엘도 반대하지 않았다.
남작 영지에서 벌어진 일을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빠르게 영지들을 주파해 나갔다.
수도에서 멀어질수록, 분위기가 안 좋아지는 게 한눈에 보였다.
1년 전 들려서 쉬었던 마을 중에 폐허가 된 마을도 있었다.
마물이 쓸고 간 것 같았다.
오지에서는 자주 벌어지는 일이라지만, 이렇게 영지 사이의 마을이 사라지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이 마을을 다스리는 영주도, 병사도 폐허가 된 마을에 찾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런 마을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고의로 방치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뭔가 빨리 결정되었으면 좋겠군요."
폐허를 보는 기사 중 하나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행정이 마비되는 것을 보니, 왕국의 앞날이 걱정되었던 것일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앙헬 기사가 말을 하는 기사에게 주의를 주고 일행을 다시 이끌었다.
하지만, 정말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지 알 수 없었다.
두 왕자 중 하나가 왕이 되면 전부 멀쩡해질지, 아니면 더 나빠질지, 거기다 공국왕에, 제국까지 시비를 걸고 있었다.
수도에 잠깐 있었다고, 머리만 복잡해진 것 같았다.
영지에 있었을 때는 가족과 영지에만 신경 쓰면 되었다. 요 몇 년은 그래서 편하게 보내기도 했고.
하지만, 수도에서는 1년 동안 정신이 없었다. 몇 번을 죽었는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반 정도는 검 때문에 자살에 가까운 죽음이긴 했지만.
그래서 공작령에 다녀오는 동안은 쉴 생각이었다.
카를로스 유령과 싸우는 것도 좀 쉬고, 방학다운 방학을 보낼 생각이었다.
남작가에서 엉뚱한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겨우 집에 다녀오는 동안에 그런 일이 또 벌어질 리는 없었다.
실력 테스트도 충분히 했으니, 이제는 정말 쉴 생각이었다.
물론, 마지막까지 살려주었던 덩치는 결국 죽어 버렸다. 일부러 죽일 필요도 없었다.
신경이 반쯤 맛이 갔던 덩치는 발레아의 고문에 결국 자살을 해버렸다.
다들, 발레아를 더 무서워하게 되었지만, 망가진 영지를 고치는 데는 그런 공포가 더 필요한 것일지도 몰랐다.
우리가 떠날 때까지 발레아의 위엄이 영지를 지배하고 있었다.
살아남은 병사와 기사들, 영지민들까지 영주 대리의 명령을 잘 따랐고, 영주 대리는 발레아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누가 영주인지 애매한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영지는 잘 굴러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영주가 되는 것도 괜찮아 보였지만, 그게 쉽게 될 리가 없었다.
이 세상은 서자만큼이나 여자도 인정을 받기 어려운 곳이었으니, 거기다, 발레아는 영주 자리를 그리 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원래 카를로스 초대 왕이 이 나라를 세울 때는 이런 나라가 아니었다. 이렇게 변한 건 이 나라가 수백 년간 고여버렸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런 일을 볼 때마다, 한번 뒤집히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움직이자, 마침내 그레시아 공작령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레시아 공작은 좋은 영주였다.
눈에 보이지 않은 경계를 넘자, 길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도, 마을의 모습도 달라졌다.
공작의 영지는 다른 영지들과 달리, 경계에 있는 마을들까지 잘 관리되어 있었다.
똑똑한 공작이니만큼 지금 상황을 충분히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영지가 잘 관리되고 있다니. 그만큼 공작령의 저력이 대단한 것일지도 몰랐다.
기사와 마차의 문장을 보고,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사람들의 모습은, 왕실 마차를 타고 갈 때 보았던 광경과 또 달랐다.
'이런 걸 애증이라고 하는 건가.'
외국에 나가 살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이런 것일지도 몰랐다.
공작가에서 있을 때는 분노가 훨씬 컸는데, 수도에 다녀오니 분노와 다른 기분이 섞여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쌓여있는 분노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에 기분만 애매해져 버렸다.
그렇게 인사를 받으며 마차는 영지의 중심, 영주가 지내는 도시. 메세타 시로 향했다.
시까지 가는 동안에도 영지는 다른 영지들과 달리,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농작물을 수거한 벌판과 한해 농사를 마무리해서 풍족해 보이는 마을들.
메세타 시로 농작물을 가득 실어나르는 마차들까지.
어디에도 위험한 왕국 사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사들도 가득 끌어올렸던 긴장을 내려놓았다.
당연하게도 메세타 시까지 가는 동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얼마 뒤, 지금은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 예비 형수와의 탐험을 떠올리게 하는 마요르카 유적을 지난 뒤,
마차는 남쪽 성문을 통과해 메세타 시로 들어섰다.
마차는 영지민들의 인사를 받으며 중심가를 지났고, 얼마 뒤에는 북쪽 언덕 위의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문을 지나, 잘 가꿔진 정원을 지나 마차는 저택 문 앞에 멈춰 섰다.
1년 만에 돌아왔기 때문일까.
저택 앞에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첫 번째 공작부인과 시몬 형도 보였고, 시몬 형 옆에는 곧 결혼할 예비 형수도 보였다.
그 말대로 시몬 형과 이에로 후작의 딸인 아드리아 영애는 곧 결혼할 예정이었다.
이 겨울이 다 지나가기 전에. 나와 마누엘이 다시 수도로 가기 전에 결혼식을 할 계획이었다.
그 결혼식 때문에 내가 이렇게 열심히 공작령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어머니를 뵙고 싶은 마음이 더 컸었다.
당연히 어머니를 뵙고 싶은 마음에 비하면, 결혼식은 아주 조그마한 지분에 불과했다.
그래도 정략결혼치고는 사이가 나쁘지 않아 보이니, 나도 만족스러웠다.
시몬도 성격이 나쁜 인간은 아니었고, 아드리아도 그 고생을 해서 살려온 보람이 있는 사람이었다.
마누엘만 좀 더 정신교육을 하면, 나중에 늙은 뒤에도 이 영지 안에서의 삶은 꽤 편할 것 같았다.
물론, 첫 번째 공작부인과 그 옆에 서 있는 공작 나리가 물러난 뒤인 먼 미래 이야기이겠지만.
신기하게도 공작 나리께서 우리를 마중하는 자리에 나와 있었다.
물론, 나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 테지만, 저 공작께서 마누엘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설마 예비 며느리에게 품위 있는 가장의 모습을 보일 생각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 정도의 사건이었다.
마누엘도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공작을 보고 있었다.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나는 공작부인의 반대편에 서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1년이 지났지만, 하나도 달라지지 않으셨다. 아기 때 보았던 미모와는 다르지만, 지금도 무척이나 아름다우신 분.
전생의 기억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저분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내 어머니였다.
내가 지켜야 할 가족.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발레아가 엄마만은 지켜야 한다는 말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마누엘 다음으로 마차에서 내린 나는 공작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바로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싶었지만, 공작이 나와 있었으니, 예절을 지켜야 했다.
"이렇게 나와주실 줄 몰랐습니다. 수도에서 1년간 열심히 수학하고 돌아왔습니다."
내 앞에서 마누엘이 먼저 공작에게 인사를 했다. 마누엘은 무척이나 감격한 얼굴이었지만, 공작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했다.
"고생했다. 시몬 결혼식이 얼마 안 남았으니, 잘 도와줘라. 다음 학년 준비도 잘하고."
"알겠습니다."
무척이나 평범한 말이었지만, 마누엘은 힘차게 대답했다.
하긴, 나는 공작에게서 저런 비슷한 말도 들은 적이 없었다. 별로 듣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이번에도 한마디나 들으려나 모르겠다.
마누엘이 인사를 하고 공작 부인에게 안길 때, 나도 공작에게 인사를 했다.
가슴에 손을 올리는 기사의 인사를 하며, 나는 공작에게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몸 건강히 돌아온 것을 보았으니, 별다른 인사는 필요 없었다. 공작도 바라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공작은 금방 내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른 행동을 하지도 않고, 마나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는 한참을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수도에서 재미있는 일들을 벌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직접 보니, 생각보다 더 재미있어 보이는구나."
정다운 아버지의 인사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엉뚱한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
공작답다면 공작다운 말이었지만, 자식들을 마중 나온 자리에서 할 말이 아니었다.
당연히 다들 놀라서 공작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공작은 주위의 시선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말을 남기고는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뒤에 서 있던 총집사도 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공작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자리에서 나에게 인사라니. 집사장도 전에 안 하던 행동을 했다.
공작이 뭔가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하긴 왕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대귀족이 정보 수집에 게을리할 리가 없었다.
어디까지 아는 것일까.
수도 저택에 있는 집사장에게 소식을 들어온 공작부인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까. 아니면 공주와 대공녀 이야기만 듣고 저러는 걸까.
'아니, 그럼 설마 나 때문에 나와 있었다는 건가? 그 공작 나리가?'
나는 다시 열려 있는 저택의 문을 바라보았지만, 문 안에는 텅 빈 홀만 보일 뿐이었다.
공작이 들어가 버리고, 나는 공작부인에게 인사를 했다.
"다녀왔습니다."
"수고했다."
평범하고 딱딱한 인사. 공작부인과 나 사이의 모습 같은 인사였다.
다만 공작부인이 거기서 말을 끝내지는 않았다.
"사람들을 많이 사귀었다고 들었다. 그걸 두고 뭐라 할 생각은 없지만, 공작가의 품위를 훼손하는 일은 없도록 해라."
보고 받은 내용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공작부인은 제대로 된 귀족이었다.
정론으로 훈계를 하니, 받아칠 말이 없었다.
거기다, 빨리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받아칠 생각도 없었다.
"주의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이번에는 시몬과 예비 형수 차례였다.
둘에게 결혼을 축하하니, 그제야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가족 중에 어머니가 마지막이었다. 혼자 귀족이 아니니 관례상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관례는 다 부숴버리고 싶었지만, 아직은 마음속에 담아두었다.
나는 어머니를 꽉 껴안았다.
"이제는 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구나."
어머니는 나를 안고는 미소를 지으셨다.
"다녀왔습니다."
"무슨 일인지 잘 모르지만, 수도에서도 열심히 살았던 것 같구나. 이곳에서도 네 이야기가 여러 번 들리더구나."
다른 사람들이 저택 안으로 들어간 뒤에,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나는 오랫동안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모자간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방에 돌아왔다.
이제야 쉴까 했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쉴 때가 아니었다.
방에서 쉬고 있는 나에게 총집사가 찾아왔다.
"무슨 일이죠?"
"공작님이 부르십니다."
"저를요? 알겠습니다. 집무실로 가면 되죠?"
수도에서 벌였던 일을 들었다면, 확인을 위해 나를 따로 부를 만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지만, 총집사는 고개를 저었다.
"집무실이 아닙니다. 저택 뒤에 있는 가족 연무장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자님도 복장과 무기를 갖추시고 연무장으로 오시랍니다."
누가 연무장에 있다고? 거기다 무장을 갖추라고?
황당한 소리에 멍하니 총집사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