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제6편 저택의 주인 (1)
알렉스가 발레아를 업고 로비로 진입하기 얼마 전.
전 용병대 '푸른 깃발'의 대장인 발칸은 한껏 눈살을 찌푸리며 저택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옆에서 같이 걸어가고 있는 다른 용병대 놈들도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모두 이 영지, 이 저택이 생각보다 먹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다른 용병에게서 영지에 불만이 있다는 기사를 소개받을 때는 하늘에서 금덩이가 쏟아지는 줄 알았다.
뜬금없이 배덕한 기사를 소개한 용병들은 영지의 주인인 남작이 살아있을 때 영지와 저택을 들락거렸다던 남자 용병과 여자 용병이었다.
의심도 해 보고, 슬쩍 작업도 해 보았지만, 한방에 나가떨어지게 되어 그들 말대로 기사를 만나봐야 했다.
기사를 만나본 뒤에는 의심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기사의 불만은 대단했고, 그와 함께 일에 가담하겠다는 다른 기사와 병사도 여럿 있었다.
죽었다던 남작이 다스릴 때도, 영주의 권위는 좋은 편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대리로 세워진 아들을 따르는 자가 있을 리가 없었다.
엉망이 된 영지의 사정을 다른 곳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고, 주변에 비슷한 놈들을 끌어모으니, 이건 실패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죽었다는 남작이 수탈에 가깝게 돈을 끌어모았다는 이야기를 다들 들었기에 생각보다 훨씬 더 쟁쟁한 놈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오히려 분배를 어떻게 할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다행히 일이 끝나고 한몫 달라고 할 것 같았던, 두 용병은 중간에 훌쩍 사라져 버렸다.
지분이 꽤 있었던 두 사람이 사라지자, 발칸은 어디서 천사가 나타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뻔했다.
그들이 떠나기 전에 일가족 모두를 죽이는 게 안전하다면서, 아카데미에서 딸이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일을 벌이라는 요구가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말을 꺼낸 놈들이 사라졌는데 자신들이 그런 말을 따를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신나게 영지로 쳐들어왔는데, 지금까지는 생각보다 훨씬 별로였다.
아직, 영주 대리라는 어린놈과 여편네들은 보지 못했지만, 운이 나쁘면 적자를 볼지도 모를 것 같아 발칸은 속이 답답했다.
"전 영주가 보물을 따로 모아놓은 곳이 있을 겁니다. 죽은 남작의 지시로 저도 여러 번 보물을 운반한 적도 있었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아들이나 아내들은 분명 알고 있을 겁니다."
용병대들을 안내하던 기사가 분위기가 안 좋아지는 것을 눈치챘는지, 열심히 말을 늘어놓았다.
이 복도를 걸으며 계속 들은 말이었다. 저 말을 믿고, 다들 참고 있는 것이기도 했고.
그렇게 걸음을 이어가다 보니, 어는 순간, 용병들이 휘청거렸다.
"왜? 땅이 흔들리지?"
"벽도 울렁거리는 것 같은데……."
이상한 현상에 다들 검을 치켜들었지만, 안내하던 기사는 기쁜 얼굴로 복도 안쪽을 가리켰다.
"영주 대리의 능력입니다. 예상대로 도망가지 못했습니다. 저 안쪽 침실에 여자들과 숨어 있는 게 확실합니다."
"호, 그래도 귀족이라 이건가. 전장에서 펼치면 정신없겠군."
흥미 있어 하는 발칸의 말에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하하, 남작도 그 정도 능력은 아니었습니다. 기사 정도만 되면, 충분히 버틸만한 능력입니다. 솔직히 쓸모없는 능력이죠. 마녀 정도는 돼야……."
"마녀?"
"아, 아카데미에 가 있는 딸을 말하는 겁니다. 성격도 실력도 모두 무시무시하죠."
기사는 말을 하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용병 겸 강도들은 기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카데미라면 여자애잖아. 아, 맞다. 그 애도 같이 처리해 달라고 했었지?"
발칸의 머릿속에 잊어버렸던 두 용병의 말이 잠깐 떠올랐다.
"뭐, 마녀건 뭐건 여기 없는 애를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 다른 나라에 팔아먹을 귀족은 셋 정도면 충분하잖아. 어린 여자애는 끌고 다니기도 귀찮고."
성인 여성 쪽을 좋아하는 발칸에게는 아카데미에 다닌다는 꼬맹이는 관심 밖이었다.
물론, 기사의 말을 듣고 침을 삼키는 놈도 있었지만, 용병대 대장들은 지금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한탕하고 튀기.
아카데미에 다닌다는 꼬맹이를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조금 더 걸어가자, 일렁거리던 복도와 바닥이 멀쩡해졌다.
용병들은 능력이 발휘된 짧은 시간에 헛웃음을 웃었고, 안내하던 기사도 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허접한 능력이 아니었으면 배반할 리도 없었겠지."
어차피 자기기만에 불과했지만, 기사는 그렇게 믿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그게 이유라고 말하고 다닐 생각이었다. 물론, 배반했다는 것은 숨겨야겠지만.
그들은 복도 끝,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섰고, 발칸이 나서서 도끼로 문을 부숴버렸다.
콰앙!
"꺄아악!"
문 안에서 여자들의 비명이 들렸다.
그리고, 어린 소년의 고함도 들려왔다.
"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이는 거냐!"
하지만, 그 고함은 마구 떨리는 중이라 귀족의 대단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쨌거나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았다.
발칸은 피식 웃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서 다른 귀족들도 우르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방은 누군가의 침실이었다.
방구석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두 여성과 그 주변에 하녀들로 보이는 여자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방 중앙에는 소년 한 명이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서 있었다.
발칸은 이제 좀 만족스러웠다.
소년이 들고 있는 검도 유물로 보였고, 두 여성이 차고 있는 액세서리에도 유물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이들을 족치면 그래도 적자는 안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적자는 무슨, 운이 좋으면 대박이 나올 수도 있었다.
"먼저 다리 하나 정도 자르고 시작할까."
발칸이 도끼를 들어 올리며 그렇게 말하는 순간이었다.
[이 집은 오래전부터 준비한 나의 왕국. 내 영역을 침입한 적들이여. 이제 주인의 징벌을 받을 때다!]
방안에, 아니 저택 전체에 소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이게 무슨?"
발칸이 놀라, 기사를 돌아보았지만, 기사의 표정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설마, 마녀가……."
"마녀?"
"아까 딸이라고 말했던 애 아닌가?"
전 용병과 강도들이 웅성거렸지만, 그것보다 먼저 구석에 몰려 있던 두 여성이 큰소리로 외쳤다.
"발레아니? 우리는 여기 있어, 빨리 도와줘!"
"안 돼. 이리 오면 안 돼. 애야 빨리 도망쳐, 이곳에 다시 돌아오면 안 돼!"
전혀 다른 말을 하는 두 여성.
누가 그녀의 엄마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콰르르르르.
그녀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벽과 바닥이 흔들렸다.
"아니, 이 영지 귀족들은 전부 이런 능력인가."
"하하, 그래도 여자애는 크게 외칠 수도 있군요?"
벽과 바닥이 조금 전과 똑같이 움직이자, 한껏 긴장했던 강도들이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다시 여자들과 영주 대리를 잡기 위해 움직이려고 했다.
쿠과과과과.
하지만, 흔들림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바닥이 흔들리다 못해 출렁이고, 벽이 배배 꼬이며 근처에 있는 용병들을 밀어냈다.
용병들은 서 있기도 쉽지 않았다.
"이게 뭐야! 왜 이렇게 심해!"
발칸의 말에 기사가 질린 얼굴로 크게 외쳤다.
"마녀라고 했잖습니까! 그녀가 영역을 선포했으니 빨리 빠져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대화는 거기서 더 진행되지 않았다.
이제 출렁거리던 벽과 바닥이 아예 따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바닥이 사라져서 용병이 아래로 떨어져 버리고, 벽이 튀어나와 근처의 용병을 날려버렸다.
바람이 날카롭게 변해 피부를 가르고, 침대보가 날아가서 용병의 목을 졸랐다.
바닥도, 벽도, 천장도, 모든 사물이 용병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방만이 아니었다.
복도에서도, 다른 방에서도, 멀리 로비에서도, 저택 모든 곳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마녀가, 마녀가 더 무서워졌어……."
기사가 얼이 빠져서 사방으로 검을 휘둘러댔다.
용병들도 미친 듯이 자신의 무기를 휘둘렀다.
하지만, 그들이 상대하는 것은 벽이자, 바닥이었고, 평범한 물건들이었다.
잘라내고, 베어내도, 물건을 죽일 수 없었다. 물건들은 잘려 나간 그대로 계속 용병들에게 달려들었다.
평범한 물건들로 인해 용병들이 차례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저택에 있던 고용인과 가족들은 털끝만 한 상처로 입지 않았다.
물건들은, 저택은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영주 대리는 넋을 놓고 물건들이 움직이는 걸 보고 있었고, 다른 여성들은 공포에 질린 채로 물건이 날아다니는 것을 바라보았다.
다만, 두 번째 남작 부인, 발레아의 어머니는 멍한 얼굴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멍한 얼굴은 여러 표정을 담고 있었다.
그것이 공포일지, 아니면 후회일지, 아니면 속죄일지, 그렇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일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잠시 뒤, 싸움을 지켜보는 가족들 앞쪽 바닥이 위로 치솟았다. 천장도 벽도 움직였다.
결국, 미친 듯이 싸우는 용병들의 시야에 남작 가족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마지막 희망도 사라졌을 때, 발칸이 고함을 질렀다.
"젠장! 이런 미친 곳에서 죽을 까보냐! 모두 뭐해! 창을 부숴!"
'푸른 깃발'이 피에 젖어 이제는 피에 굶주린 강도단이 되어버렸지만, 그 경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영지전도 경험하고, 지옥 같은 마물 사냥에도 참여한 경험이 발칸과 다른 용병들을 깨어나게 했다.
목적을 이루지 못했지만,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남아 있는 생존 의지가 용병들을 움직였다.
살아있는 용병들이 창문을 향해 달려갔다.
이곳에 있는 강도와 용병들은 전부 정예들이었다. 이곳에는 강도단의 두목과 전 용병대의 대장들이 모여 있었다.
다른 곳과 용병처럼, 이상한 환경에 정신이 나가 맥을 놓고 죽을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옆에 있는 용병이 죽으면 사체를 다가오는 벽에 던져 버렸고, 다친 용병이 있으면 먹이를 원하는 바닥에 던져 주었다.
그리고, 반쯤 미쳐버린 기사를 창문으로 던졌다.
콰직.
기사가 창문에 부딪혀서 온몸이 난자되었지만, 발칸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결국 부서지긴 부서지잖아! 주변에 잘려 나간 팔다리라도 던져! 창문으로 빠져나간다!"
창문은 부서지면서 수십 개의 날카로운 흉기가 되었지만, 용병들은 그 흉기들을 시체와 부상자로 막아 냈다.
그들은 그렇게 창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콰당! 쾅! 우당탕!
용병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건물 아래로 떨어졌다.
그들은 부상도 생각지 않고, 급하게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이곳에서는 공격해 오는 게 없었다.
"젠장, 정말 집안은 전부 그년 영역이 된 거야, 뭐야."
살아남은 용병 하나가 투덜거렸지만, 다른 용병들은 그의 말에 대꾸할 정신도 없었다.
"빨리 밖에 있는 애들을 모아서 저택에 불을 질러버립시다."
"그럼, 저택에 있다는 보물들은……."
"보물은 무슨, 완전 귀신 집이던데."
"그래, 그렇게 하자."
발칸도 그들의 말에 찬성했다. 조금 아까웠지만, 조금 전까지 느꼈던 끔찍한 경험을 다시 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모두 모여 상처를 확인하고 있자니, 그들은 조금 이상한 것을 느끼게 되었다.
시끄러운 저택 안과 달리 밖이 너무 조용했다.
분명, 저택에 들어가기 전에 부하들을 밖에 배치해 놓았었다.
마을 쪽에는 아직 연기가 솟구치는 것을 보니,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다.
저택만, 이 주위만 너무 조용했다.
스르르르.
놀라 주위를 다시 한번 둘러보니, 조금 전까지 보지 못하던 사람이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어딘가의 제복처럼 보이는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었다.
키에 비해 어려 보이는 남자이었다. 아니 소년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발칸을 향해 소년은 대검을 치켜들었다.
"이번에는 실전 느낌이 나려나."
소년은 발칸을 보며 씩 웃었다.
아직 어려 보이는 소년의 망발이었지만, 발칸은 화를 낼 수 없었다.
소년이 뿌린 마나가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