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제5편 남작 영지를 향해서 (2)
발레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대쪽 도적들도 모두 제압이 되었다.
남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살아남은 도적들을 묶어서 한곳에 몰아넣는 동안, 발레아는 도적에게 들은 이야기를 마누엘과 다른 기사들에게도 이야기했다.
그녀의 말에 모두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수긍하는 얼굴들이 되었다.
"왕국 초기에 그런 일이 빈번했다고 들었습니다."
"오래전 내전 때에도 있었던 일이었죠?"
"지금이 그런 내전 때와 비슷하다는 건가."
말을 나누던 기사들은 어두운 표정이 되었고,
"바로 갈 준비를 하죠."
마누엘은 서둘러 기사와 병사에게 출발 준비를 시켰다.
하지만, 발레아는 그들을 기다리지 않았다.
"저는 알렉스 공자님과 먼저 가겠어요."
"네? 위험……. 은 아니고, 말을 타고 가시는 게 더 빠르실 텐데요."
위험하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비명을 지르던 도적들이 생각난 마누엘은 다른 이유를 댔다.
발레아는 마누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숲을 가로지르면 훨씬 일찍 도착할 수 있어요. 거기다, 알렉스 공자님이라면 말보다 느리지 않으실 거예요. 그렇죠?"
마누엘은 여자가 기사급, 아니 기사와 함께 빠르게 숲을 가로지르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한 가지 방법이 바로 떠올랐고.
"숙녀가 함부로 행할 모습이 아닌……."
하지만, 마누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레아가 말을 끊어버렸다.
예의에 어긋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런 작은 명예보다, 지금은 더 중요한 게 있어요."
그녀는 치마 옆 단을 부욱 찢어버려 움직이기 편하게 한 뒤에 내 등에 올라탔다.
다행히 그동안 키가 커져서 발레아의 발이 땅에 닿지는 않았다.
나는 슬쩍 불만을 이야기했다.
"아직 승낙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그럼, 거절하실 거예요?"
그럴 수야 없었다. 지금 사태에는 내 책임도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녀는 등에 업힌 채로 팔로 목을 감고, 내 귀에 속삭였다.
"실제로는 말보다 빨리 달릴 수 있죠? 이 근처였나요? 그날 하룻밤 만에 우리 집에 갔다가 왔잖아요."
"그날은 큰 멧돼지를 사냥해 왔습니다만."
"네에, 네에. 어쨌든 어서 달려요! 제발 늦지 않게!"
그 틈을 못 참고 장난치듯 말로 공격해왔지만, 그 장난 속에서도 서두르는 기색이 가득 담겨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발레아가 업힌 모습을 보기가 그랬는지, 마누엘과 기사들은 우리를 슬쩍 외면하고 있었다.
"먼저 가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따라갈 테니, 발레아 양이 절대 다치지 않게 해라."
내 실력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발레아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으니, 마누엘은 우리를 보내 주었다.
대신 그는 눈을 부라리면서 발레아를 먼저 지키라고 말했다.
괜히 여기서 대꾸를 하면 시간만 지체될 테니,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무기가 있어야……."
기사 하나가 무기 이야기를 꺼냈지만, 나는 이미 숲 안으로 뛰어든 뒤였다.
발레아는 내가 슬슬 달리기 시작하자, 내 목을 양팔로 꽉 감쌌다.
나는 그녀의 엉덩이를 팔로 받치고, 마나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처럼 다리에 마나를 밀어 넣지 않았다.
지난 반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카를로스와 대련을 하면서 배운 것이 있었다.
몸속에 만들어진 마나 회로를 통해 마나를 움직이면서도 여러 가지 효과를 만들어 내는 방법이었다.
검이 맞닿았을 때 떨어지지 않게 하는 방법이라든지, 갑자기 검이 무거워지게 하는 방법같이 검을 이용하는 방법 외에도, 몸의 움직임을 바꾸는 방법도 있었다.
물론, 알고 있는 마나 심법이 많지 않아서 용사가 쓰던 기술을 모두 쓸 수는 없었지만, 아는 마나 심법으로도 대충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기술들이 있었다.
'전생에 보았던 무협지의 신법이 이런 거였으려나.'
마나 심법을 따라 움직이는 마나가 다리를 통과할 때, 마나에 변형을 주었다.
왼쪽 다리가 땅을 미는 순간, 마나에 반발력을 주고, 다른 쪽 다리가 앞으로 쭉 나가는 순간, 마나로 인력을 만들어냈다.
땅을 밀고, 땅을 당기고, 솔직히 플라세보 효과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실제로 내 몸은 쭉쭉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빠져나가고, 바위를 뛰어넘고, 개울을 건너뛰면서 나는 엄청난 속도로 숲을 가로질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중에, 귀 옆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에도 이렇게 달렸었나요? 마차에 타고 있을 때보다 왜 더 편안한 거죠?."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걱정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도 다른 기사들도, 이런 식으로 달리는 사람은 없었다.
왕국의 기사들은 전부 마나를 발에 퍼부어 포탄처럼 쏘아져 나가는 방법으로 달리는 방법밖에 알지 못했다.
마나를 변형할 수 있어야만 이런 식으로 달릴 수 있기에 초대 왕이 알려 주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아예 달리기만 특화된 심법을 가르쳐줘도 되었을 터였다.
싸우면서 달리지는 못하겠지만, 단지 멀리 달릴 때는 무척이나 유용할 게 분명했다.
물론, 어떻게 개조하고, 어떻게 기사들에게 가르칠지는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면, 왕가만 가지고 있으려고 했을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그냥 아무에게도 안 가르쳐줬을지도.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수련 검을 설정해 놓은 것을 봐도, 초대 왕의 성격은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평범한 정도가 아니지. 자기보다 강하지 않으면 검을 잡을 생각도 하지 말라는 소리였잖아!'
꼬여도 너무 꼬여 있었다. 나름 무슨 이유가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풀기만 했어도 제국에게 이렇게 밀리지도 않았을 게 분명했다.
초대 왕의 더러운 성격에 대한 불만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나는 달리는 데 더욱 집중했다.
내가 대답하지 않으니 발레아도 다시 묻지 않았다.
신기해서 물었을 뿐 특별히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닌듯했다.
"정말, 신기한 사람이에요. 공자님은. 까도 까도 계속 나온다니까요. 그 안에 숨겨놓은 게 얼마나 더 있을까요."
다만, 의미심장한 말을 한마디 남기고, 내 뒷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다른 때였으면, 무척이나 좋은 분위기였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아니, 이 세상이라면 스캔들 이상이었으려나.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장소와 상황이 아니었다.
발레아를 업고 달리고 있었지만, 일 년 전에 이 숲을 달릴 때보다 더 빠르고 덜 힘들었다.
솔직히 저택이 넘어가기 전에 도착할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훨씬 일찍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목걸이를 쓰면 더 빠르겠지만, 목걸이를 지금 사용할 수는 없었다. 마나 소모가 너무 빨랐다.
도착하기 전에 마나가 떨어져서 나가떨어질 게 분명했다.
그렇게 한 시간 이상을 달리니, 멀리 마을이 보였다.
마을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집들이 불에 타고 있었다.
멀리서도 사람들이 달려 나와 불을 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약탈을 하는 사람, 그리고, 싸우고 죽이는 사람도 보였다.
그래도 생각보다, 마을은 엉망이 되지는 않았다.
전부 남작 저택으로 몰려간 건가.
내 목을 감은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집. 집으로 먼저 가주세요."
말을 하지 않아도 먼저 저택으로 달려갈 생각이었다.
마을 바깥으로 빠르게 달린 끝에 나는 저택 바깥쪽 언덕에 도착할 수 있었다.
1년 전 남작을 죽였을 때 야영지에서 달려왔던 언덕이었다.
언덕 위로 올라가 보니, 저택은 난장판으로 변해 있었다.
크아악!
저택을 지키던 병사들이 사방에서 이미 죽고, 죽어가고 있었다.
"다 죽이고 빼앗아!"
와아!
그리고, 팔에 붉은 띠를 두른 용병과 강도들이 병사와 하녀들을 죽이며 저택 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똑같은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싸우는 모습도 보였다.
"네놈이 배반해?"
"내가 그 꼬맹이에게 계속 머리를 숙일 거로 생각했냐! 솔직히 남작도 마음에 안 들었어!"
푹.
"크악."
그들의 대화는 난입한 용병이 막아서던 기사를 죽이면서 끝이 났다.
"이놈의 판금 갑옷, 틈 사이를 찌르기가 매번 어렵다니까. 친구와의 인사는 나중에 하고 빨리 마무리를 짓자고. 다른 영지에서 도와주러 오기라도 하면 곤란해져."
상대를 빼앗긴 기사였지만, 전혀 개의치 않은 얼굴로 다른 병사에게 검을 휘둘렀다.
"크아악!"
"하하, 그럴 영지도 없습니다."
그리고, 도와준 용병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싸움은 일방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언덕에서 싸움을 확인한 발레아의 표정은 오히려 밝아졌다.
"정말, 늦지 않았어요! 빨리 집안으로!"
이미, 집안에서도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발레아 말처럼 아직 희망은 있었다.
이번에는 몸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단검을 한 손에 쉬고, 다른 손은 발레아의 몸을 받친 뒤, 언덕에서 몸을 날렸다.
마나가 몸을 가볍게 해 주었다.
높은 언덕이었지만, 나는 한걸음에 바닥에 내려설 수 있었다.
검에 마나를 밀어 넣으며, 계속 앞으로 달려갔다.
아쉽게도 달리는 속도는 확 줄어들었다. 아직 달리는 형태를 마나를 변형하면서 카트린의 능력을 사용하기는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대신, 단검에서 보이지 않는 마나가 길게 자라났다.
"누가 온다!"
"아군이야?"
"아니, 엄청나게 빨라! 팔에 띠도 없다 적이야! 속도를 보니 기사급!"
활짝 열린 정문을 지키는 용병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히 제대로 체계가 잡힌 강도들이었다. 아니 용병들인가.
기사급이라는 말을 들은 용병들이 정문에 모여들었다.
용병들은 창과 도끼를 들어, 갑옷 입은 기사를 대비했지만, 다가오는 나와 발레아를 보고 모두 어리둥절했다.
"갑옷도 안 입었잖아."
"아직 어린데? 저거 혹시 아카데미 복장 아냐?"
"아니, 왜 머리가 둘인데, 설마 사람을 업은 거야? 거기다, 머리 하나는 왜 머리카락이 긴데."
우리를 보고 어이가 없었는지, 다들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댔다.
하지만, 채 일절도 말을 끝내기 전에 내가 그들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검이 닿지 않은 곳에서 몸을 멈춰 세우고, 단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용병들은 다시 한번 어이가 없어 했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달랐다.
서걱!
피가 허공을 수놓고, 창과 도끼를 들고 앞에 서 있던 용병들이 한순간에 허물어졌다.
여기서 이들을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무너지는 진형 사이를 뚫고 안으로 달려갔다.
미로 정원도 엉망이 되어 있었다. 더는 미로라고 불리기도 어려운 모습이었고, 나도 그런 정원을 빠르게 돌파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는 이미 싸움이 끝나 침입자들이 조각상들과 벽에 걸린 그림들을 뜯어내고 있었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는지, 갑자기 들어선 나와 발레아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도 없었다.
제대로 된 실력자들은 이미 안쪽 깊숙이 들어간 것 같았다.
어느 쪽으로 가야 빠를지 발레아에게 물어보려고 했지만, 발레아가 먼저 내 어깨를 두들겼다.
"됐어요! 정말 고마워요. 이제 내려 주세요."
왜 벌써 내려달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를 내려 주었다.
바닥에 내려선 발레아가 바닥을 발로 두들겼다.
콩, 콩.
뜻밖의 소리에, 도둑질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모두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발레아는 그들을 이해시키는 대신에,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큰소리로 선언을 했다.
"이 집은 오래전부터 준비한 나의 왕국. 내 영역을 침입한 적들이여. 이제 주인의 징벌을 받을 때다!"
그녀의 말은 황당하게도 저택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저택은 그녀의 말에 화답했다.
쿠구구구궁.
저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