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제4편 남작 영지를 향해서 (1)
마물과 강도를 해결하면서 돌아간다고 해도, 사방을 쏘다니면서 수색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당하는 사람을 보던가, 우리 일행에게 덤비는 강도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쉽게 보일 리가 없었다.
기사와 병사들이 같이 움직이는 마차 행렬이었다.
웬만한 강도들은 덤벼들 생각도 못 할 행렬이었고, 덤빌만한 강도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 마차들을 습격할 이유가 없었다.
마누엘은 마차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필 정도로 노력했지만, 아쉽게도 마차 행렬은 아무 사고 없이 계속 이동했다.
물론, 우리가 무사하다고, 길이 안전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부서진 마차도 계속 보였고, 거지꼴로 움직이는 사람들 옆을 마차가 지나가기도 했다.
그렇게 평안하지만, 불안한 여행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덧 발레아의 집인 전 메세시아 남작의 영지가 가까워졌다.
"여기도 사정은 마찬가지군요."
숲 사이로 난 길에 싸웠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앙헬 기사의 말에 마부 옆에 앉아 있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보이는 놈은 하나도 없잖아."
마차 안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열심히 주변을 살피던 마누엘이 지쳤는지, 마차에 들어가서 쉬고 있었다.
그 대신 내가 이렇게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피는 중이었다.
앙헬과 마누엘은 내가 알아서 고개를 숙인다고 기뻐하고 있었다.
마누엘이 포기하고 마차에 들어간 것도, 그런 이유가 포함된 것일지도.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마차 밖으로 나와 있는 이유는 마누엘에게 머리를 숙이기 위함이 아니었다.
마누엘에게 감시를 맡겼더니, 내가 느꼈던 감각을 전부 놓쳐버렸기 때문이었다.
지나고 보니 평범한 들짐승들이었지만, 실전이 필요했던 나에게는 무척이나 답답한 일이었다.
그리고,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멀리 전방에서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살기, 혹은 싸움의 열기라고 불리는 그런 느낌이 앞에서 밀려오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방에 싸움이 있습니다."
내 말에 앙헬이 눈을 찡그렸다. 자신은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마차 안에서 마누엘이 바로 튀어나왔다.
달리는 마차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지만, 마누엘도 각성한 아카데미 학생이었다.
그는 쉽게 마차 지붕으로 올라가 멀리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기는 하는데. 숲이라서 그렇겠지? 서둘러! 또 놓치겠어!"
앙헬과 달리, 마누엘은 내 말을 믿어주었다.
마누엘은 아카데미에서 내 실력을 보았었다.
1학기 실전 수업 때 본 실력이긴 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마누엘에게 믿음을 주기는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리암, 브르노 먼저 가서 확인해 보도록!"
"넵!"
앙헬 기사는 나를 믿지는 않았지만, 마누엘의 지시는 그대로 행했다.
그는 말을 탄 기사 둘을 먼저 달려가게 했다.
"우리도 빨리 가야 해!"
아카데미와 수도에서 벗어나서인지 마누엘도 가식을 벗어버리고 크게 소리쳤다.
마부가 고개를 흔들더니, 힘껏 채찍을 휘둘렀다.
"이랴!"
마차도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전진 앞으로! 뒤떨어진 병사들은 놓치지 말고 따라와라!"
마차가 달려가자, 앙헬이 한숨을 내쉬며 마차를 따라 말을 달렸다. 다른 기사들도 말을 내달렸고, 뒤처진 병사들은 열심히 뛰기 시작했다.
마차가 열심히 달려가자, 앞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기사다!"
"살려주세요!"
"살려……. 으악!"
"젠장! 갑자기 기사가 왜 나오는데!"
"도망쳐야 하는 거야?"
"겨우 둘이야! 잡을 수 있어!"
창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과 욕을 퍼붓는 강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를 보고도 도망치지 않는다니. 생각보다 대단한 강도들인 것 같았다.
음성이 들리자, 말을 달리던 기사들도, 마차도 더 빨라졌다.
으랴! 으랴!
"젠장! 생각보다 강한 기사 들이잖아! 어디 대귀족 놈 기사 아냐?"
"어? 말발굽 소리에 마차 소리도 들린다! 더 있나 봐!"
"그럼 망한 거잖아! 철수! 철수다!"
기사 둘을 보고도 포기하지 않은 강도들이지만, 더 많은 수가 몰려오는 것을 듣고는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도망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현장에 도착했다.
부서진 마차들과 마차 주변에 누워있는 시체들이 보였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몇 명밖에 없었다. 그것도 대부분 다친 것처럼 보였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너무 늦게 온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 죽은 것은 아니었으니, 나로서는 너무 늦은 것은 아니었다.
마차를 포위하고 있는 것은 열 명이 넘는 강도들이었다.
아니, 입고 있는 장비들을 보니, 강도라고 하기보다는 용병으로 봐도 될 것 같았다.
어차피 용병과 강도는 의뢰를 받았는지로 구별한다는 말도 있었으니, 그리 다를 바도 없었다.
평범한 용병대로 알고 있었던 용병대가 대단한 강도단이었다는 이야기는 무척이나 흔한 이야기였고.
하기야 처음부터 평범한(?) 강도 같지는 않았다. 평범한 강도들이 기사를 보고 도망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강도들이 습격한 현장을 보고 마누엘이 크게 분노했다.
"도상에서 이런 살상을 벌이다니! 즉결 처형이다! 모두 죽여!"
솔직히 영지가 없는 마누엘이 내릴 수 있는 명령은 아니었지만, 다들 마누엘의 명령에 따랐다.
뭐, 알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마누엘이 한 말은 귀족이 책임을 진다는 말이었으니, 냉큼 말에 따르면 그만이었다.
나도 바로 그 말에 따랐다. 마차에서 뛰어내린 뒤, 기사들과 마누엘이 달려가는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숲과 수풀 때문에 부서진 마차들 반대편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마나를 한껏 뿌려놓았다. 그쪽에도 비슷한 숫자가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어느새 마차에서 빠져나온 발레아가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다 죽이면 안 돼요!"
자신이 죽일 강도들을 남겨달라는 말일까?
"몇 명 남겨서 고문해야 해요! 소굴이 어디인지 알아내야죠!"
죽일 강도들을 남겨달라는 말은 아니었지만, 이것도 저런 미모의 소녀에게서 들을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발레아 말대로였다.
여기 있는 강도 몇 명을 상대하는 것을 실전으로 보기는 힘들었다.
제대로 된 실전을 위해서는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
나는 걸음을 조금 늦추어 발레아가 따라올 수 있게 해주었다.
발레아가 눈으로 내게 감사를 표했고, 이어서 그녀는 손을 뻗었다.
콰르르르.
숲과 부서진 마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레아도 굉장히 실력이 늘어나 있었다. 이제는 제대로 영역을 선포하지 않아도 이렇게 사물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제대로 영역을 만들면 어떻게 될지, 상상만으로도 몸이 오싹했다.
"이게 뭐야!"
"뭐가 발을 감고 있어!"
"으악! 유령이다! 나무귀신이야!"
"살려줘! 귀신이 달라붙었어!"
제대로 영역을 선포한 것은 아니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나무뿌리가 다리를 감고, 박살 났던 마차가 꿈틀거리며 다가오는 것을 본 용병들은 공포에 질려버렸다.
덕분에 싸움은 실전과 몇 광년 정도 차이가 나버렸지만, 나는 충실하게 강도들을 제압해 나갔다.
팔다리를 부러뜨리고, 턱을 박살 내면서, 하나하나 정리해나가니,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의 반대쪽은 모두 정리할 수 있었다.
내가 마지막 용병 겸 강도의 갈비뼈를 주먹으로 박살 내는 것을 보더니 발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었나요?"
그녀가 이상하게 여길 만했다.
기사 둘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하던 용병들이었고, 용병 중에는 미약하지만 마나를 사용하는 자도 있었다.
발레아 탓에 공포에 질리기도 했지만, 그런 용병들을 장난하듯이 무력화시켰으니, 그런 말을 들을 만도 했다.
거기다, 아직 반대편은 열심히 싸우고 있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빠지지지직!
"감전된 놈들부터 처리해요!"
"기사들을 상대해본 놈들입니다! 진형을 갖추고 제대로 상대해야 합니다!"
전기가 뿌려지는 소리와 함께 마누엘의 고함과 앙헬 기사의 외침이 들려왔고,
"젠장! 뒤로 물러날 수 없어?"
"반대편에 있던 놈들 다 도망간 거야? 왜 조용한 건데!"
아직도 제압되지 않은 강도들이 외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마나를 뿌려 확인해 보니, 도와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기사들이 강도들을 크게 포위하고 있었고, 병사들도 차례로 전장에 진입하는 중이었다.
우리 쪽으로 도와주러 온 병사들은 이미 끝난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자, 그럼 소굴이 어디인지 물어볼까나."
발레아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강도들에게 다가갔다.
저렇게 흥분한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못 볼 꼴을 볼 것 같았지만, 발레아도 그 정도로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여기부터는 관람 불가예요."
멍하니 바라보는 병사들을 향해 윙크를 보낸 발레아는 나무와 마차를 움직여 그녀와 쓰러진 용병들 주위를 감쌌다.
"크아아아악!"
그리고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고 있지만, 비명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을 겁먹게 하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벌써 반대쪽 싸움이 애매하게 끝나가고 있었다.
비명을 들은 강도들이 검을 던지고 두 손을 들었고, 기사들도 비명을 듣고,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발레아가 만든 방벽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나로 만든 방음벽을 넓게 펼쳤다.
"아, 고마워요. 제가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어요."
내가 방음벽을 만든 것을 알아차렸는지, 방벽 안에서 발레아의 감사가 들려왔다.
문제는 그녀의 음성 사이로 비명이 들려와서 그녀의 말이 내가 듣기에도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결국, 심신의 안정을 위해 내 귀에도 방음벽을 펼쳤다. 비명이 들리지 않으니 무척이나 편안해졌다.
시간이 지나고, 반대쪽도 싸움이 끝난 뒤, 방벽이 움직였다.
고문을 당한 용병 중에는 죽은 사람은 없었다.
다만, 용병들 모두가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중 몇은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었고.
"소굴이 어디인지는 알아냈나요?"
"알아내긴 했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발레아의 표정이 좀 전과 달리 무척 나빠 보였다.
뭔가 고문을 하면서 안 좋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그녀는 바로 입에 거품을 물지 않은 용병 중 한 명을 지목했다.
"다시 한번 말해 주겠어요? 소굴이 어디고, 소굴을 지키는 사람은 누구고 나머지는 어디 갔는지."
그녀의 물음에 그 용병은 재깍 대답했다.
"저희 산채는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2,000 걸음 떨어진 절벽 아래 동굴에 있습니다. 그리고, 원래 지금 여기 있는 용병들이 산채를 지키던 조였습니다. 두목과 본대가 다른 용병들과 함께 영지를 털러 가는 동안, 잠깐 추가 수입을 얻으려다가 그만……."
두목이 없는 틈을 타서 소굴도 지키지 않고 외도를 하다 걸렸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두목이 어디를 갔다고? 어디 영지를 털어?
"모두 가까이 있는 남작 영지를 털러 갔습니다. 남작이 죽어 어린 아들이 대리로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데, 병사들도 기사들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답니다. 이번에 그 영지의 기사 몇 명과 병사들과 짜서 크게 한탕을 한다고 다들 달려갔습니다."
어디 영지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전 메세시아 남작의 영지. 발레아의 집이었다.
강도들과 용병들을 모아 영지를 털 생각을 하다니, 무척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생각이었지만, 다시 생각하면 꽤 그럴듯한 생각이었다.
통솔력이 없는 어린 남작 대리가 다스리는 남작 영지에다가, 내통자들마저 있었다.
크게 한탕하고 흩어진다면 이런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잡히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자, 발레아가 인상을 쓰며 나를 보고 있었다.
"다들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영지에는 엄마하고 죽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남아 있어요. 다들 그냥 죽게 놔둘 수는 없어요."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남작의 영지는 도적들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었다.
그녀는 인상을 쓰다 못해, 울먹이는 표정이 되었다.
"계약에 없는 일이지만, 아니 어떤 계약이든 다시 쓰겠어요. 저를 한 번만 도와주세요."
그녀는 나에게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