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제1편 소환 (2)
<위기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이 설정되었습니다.>
메시지 창이 나타난 것을 보니, 저번 삶에서 검을 잡았던 시간이 지났나 보다.
나는 단검을 다시 허리에 차고, 눈앞에 떠올라 있는 창을 모두 치워버렸다.
나는 쇠사슬이 둘러쳐져 있는 검을 고의로 무시하고는 공주와 창고지기 쪽으로 걸어갔다.
"이 흉갑은 착용하고 있는 사람의 마나를 흡수해서 외부의 충격을 분산시켜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네요."
"바로 아시는군요. 이 정도 유물은 왕국에 있는 감별사들도 이렇게 빠르게 파악하지는 못하던데……. 대단하시군요."
창고지기의 감탄에 대공녀가 고개를 저었다.
"빨리 파악한다고 해도 특별히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서요."
유물이 산처럼 쌓여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정확하게 확인만 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공주의 말이 틀린 게 아니기에 창고지기는 헛기침만 내뱉었다.
'의외로 젊으려나.'
목소리도 억지로 바꾸어서 나이를 알기가 어려웠는데, 대공녀를 대하는 모습이 쑥스러워하는 청년처럼 보였다.
아무튼 창고지기의 의외의 친절 덕분에 대공녀의 왕실 창고 방문은 좋은 분위기로 끝났다.
돌아오는 마차를 타자, 그제야 대공녀는 지친 기색을 내보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유물을 살펴보신 것 같더라고요."
"휴, 창고지기가 친절하셔서 많이 볼 수 있었어요."
"대공녀님이 친절하게 만드신 것 같은데요."
내 말에 대공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흠……. 그건 사실이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안 돼요. 특히 무도회에서 귀족 영애들에게 그렇게 말했다가는 춤 한번 못 춰볼 거예요."
대공녀는 정색한 얼굴로 내게 주의를 주었다.
확실히 예의 없이 말한 것 같았다. 조금 친해졌다고 너무 편하게 말했나.
책으로만 예절을 익히고,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니, 마음을 놓게 되면 본성이 마구 튀어나왔다.
원래, 이런 예절은 습관으로 가지고 있어야 했다. 검을 배울 때처럼 반사적으로 나올 정도로.
하지만, 나는 그런 습관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항상 긴장하고 있을 수도 없으니, 평상시에는 실수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사교계에 정식으로 데뷔도 할 수 없는 위치라 정식으로 배우는 것은 생각도 안 했는데.
내가 사과를 하자, 대공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제게 사과하실 일은 아니에요. 사과받으려고 한 말도 아니고."
그녀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기사로서도, 호위로서도 지적할 점이 없으신 분인데, 아카데미에서 귀족 여성들을 대할 때는 예절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가 있으시더라고요."
관계있는 사람들도 아닌데, 긴장하고 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다른 기사 학부 학생들처럼 평범하게 대했는데…….
"공주님도, 발레아도 알고 있을 텐데 왜 말을 해주지 않은 거죠?"
발레아라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해주지 않았을 거고, 공주는 본인이 예의에 까다롭지 않아서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 같았다.
"지위에 약점이 있다고 하지만, 얼굴도 미남이시고, 실력도 뛰어난데 왜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여성 학우들이 많은지 궁금했는데 이제 알 것 같네요."
그러고 보니, 나와 친한 여학생 중에는 평범한 귀족 여성은 없었다.
공주와 발레아, 브리아까지.
기사 학부 학생이 둘에다가, 발레아는…….
발레아를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거기다, 카트린까지 더한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었다.
아니, 나를 일부러 불러내서 정원을 박살 낸 여학생도 설마 내가 예의 없게 굴어서 화가 난 것일까?
그럼 좀 문제인데.
제발, 그런 이유는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무래도 아까워요."
뭐가 아까운 걸까? 여태까지 별문제 없이 살아왔는데.
"좋아요. 이렇게 하죠."
의자에 등을 붙이고 쉬고 있던 대공녀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유난히 반짝이는 눈을 보니 뭔가 재미있는 일을 찾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니, 저런 모습을 보이던 여자들은 조금 무서운데…….
"제2 왕자가 한 말처럼 저는 앞으로 무도회나 여러 모임에 참석할 일이 많을 거예요."
당연했다. 공국의 대공녀가 처음으로 왕국에 방문했는데, 무도회 같은 행사가 적을 리가 없었다.
"그 호위로 알렉스 공자를 부를게요. 저와 다니면서 사교계 예절을 익히시는 거예요."
"네?"
아니, 왜 갑자기 그런 의욕을 내시는 거지?
어차피 나는 서자라서 사교계 데뷔도 할 수 없었다.
공작을 승계할 리도 없고, 무도회에서 제대로 된 귀족 영애와 사귀게 될 리도 없었다.
그런데, 사교계 예절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저와 공주님 호위를 계속하려면 배우셔야 해요. 본인이 아니더라도, 공주님께 접근하는 남자들의 예절을 알고 있어야잖아요."
아니, 그런 건 책으로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만.
그 말 뒤에 작게 입속으로 중얼거리는 말이 있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못 들었을 중얼거림이었다.
"이런 인재를 썩히게 둘 수는 없어요. 제가 멋진 남자로 만들어 드릴게요."
저 중얼거림이 본심이었다.
중얼거리는 대공녀의 눈이 마구 반짝이고 있었다.
설마, 나를 가지고 프린세스 메X커를 하고 싶다는 건가.
겨우 아픈 게 나았다더니, 대공녀가 이상한 곳으로 욕망을 분출시키고 있었다.
"상속 능력 학부 지원은 거부권이 없다면서요? 대공녀가 선점했는데, 끼어들어서 저와 어색해지고 싶은 학생은 없겠죠."
대공녀는 마지막에 쐐기를 박아버렸다.
확실히 겨우 호위 때문에 대공녀와 척질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가게 되면, 나는 2학기 내내 대공녀의 호위로 돌아다녀야 할지도 몰랐다.
* * *
나는 대공녀를 그녀의 집까지 호위한 뒤에 피곤에 지친 몸으로 겨우 기숙사로 돌아왔다.
몸이 피곤한 것은 아닌데, 정신적으로 지쳐버렸다.
왕실 창고 안에서 벌어진 일에다가, 돌아오면서 대공녀가 꺼낸 말까지.
머리 아픈 일이 계속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 쉴 때가 아니었다. 확인해 봐야 할 일이 있었다.
다시 한번 정보창을 확인했다.
그중에 오늘 처음 나타난 정보.
'장비 소환: 레벨 1'
다른 능력들은 마나를 활용하는 기사의 능력 같아서 대충 이해하고 넘어갔었다.
하지만, 이번에 나타난 능력은 그런 능력들과 궤를 달리하는 능력이었다.
"이건, 완전히 상속 능력 학부생들의 능력이잖아."
지체가 높은 분들이라 그쪽 학부로 간 학생들 말고, 제대로 된 특수한 능력이라 상속 능력 학부로 간 학생들의 능력.
주변에 영역을 만들어 사물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번개를 쏘고, 불을 일으키고, 공간을 이동하는 신기한 능력들.
"공간 능력자와 비슷한 능력인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을 여러 명 옮길 수 있다는 점에서 그쪽이 훨씬 대단한 능력이었다.
다만, 기사 입장으로는 내가 얻게 된 능력이 더 유용해 보이기도 했다.
'소환.'
머릿속으로 능력을 떠올리고는 손에 나타난 단검을 확인했다.
[무기 소환이라니, 설마, 카를로스 기사의 능력은 다 가지고 있는 겁니까? 근데 왜 라텐하마르 용사의 능력은 그것밖에 안 되는 거죠? 차라리 카트린에게 절 주어서…….]
단검을 손에 들었더니, 머릿속으로 에고 단검의 수다가 들려왔다.
"주머니에 들어가기 싫으면 조용히."
나는 즉효 약을 써서 단검을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 단검을 벽을 향해 살짝 던졌다.
푹.
벽에 단검이 박혔고,
'소환.'
다시 능력을 떠올리니, 손에 단검이 나타났다.
"확실히 이쪽이 더 쓸모 있어."
마나 소모량이 많지 않고, 대기 시간도 길지 않았다.
공간 능력자는 한번 이동하면 며칠 동안 나가떨어지지만, 이 능력은 전투에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도 너무 기사에 맞춰진 능력인데……. 봉인된 검은 검도 그렇고, 설마 용사도, 용사의 능력도 누군가 만들어 낸 것일까."
내가 말을 꺼내고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런 능력을 줄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신이 주었다면, 그건 결국 용사의 전설과 같은 이야기였다.
"괜히 정보창 같은 게 보여서 그래."
전생에 정보창 비슷한 소설을 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정보창 덕분에 용사도 상속 능력도 신성해야 할 신도 현실로 내려온 것 같았다.
"이제 한가지 확인만 남았나."
그 검은 검을 소환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 봐야 했다.
하지만, 오늘 할 수는 없었다.
왕실 창고를 방문한 당일에 일을 벌일 수는 없었다.
거기다, 소환을 하면 손 위에 나타나는 것도 문제였다.
소환했다가 죽어버려서 과거로 돌아가게 되면, 어처구니가 없는 개그가 될 뿐이었다.
장갑을 껴도 의미가 없었고, 아마도 손을 대거나, 잡는다는 행위 자체로 발동되는 능력 같았다.
나는 고민을 하다가, 시간을 두기로 했다.
한 달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동안 나는 에고 단검 말고도 또 하나의 유물을 등록시킬 수 있었다.
후작가의 서자 마르틴이 남긴 단단하기만 한 대검이었다.
그토록 험하게 굴려도 멀쩡하기에 유물일 거로 생각했지만, 이렇게 등록이 될 줄은 몰랐다.
대검까지 등록이 되자, 나는 새로운 능력의 여러 가지 활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우선, 검을 놓치거나, 던져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상대의 시선도 교란할 수 있고, 갑자기 다른 손에 무기가 나타날 수도 있으니, 생각하고 연습할수록 활용법은 계속 늘어났다.
그 와중에 대공녀와 함께 무도회도 다녀오게 되었다.
분명 대공녀 호위로 무도회에 갔지만, 대공녀는 나를 제쳐두고 영애들과 수다를 떨었고, 나는 간간이 사람들을 상대하며 대공녀가 내준 숙제를 했다.
"확실히, 실수도 없고 잘하시네요."
무도회가 끝나고, 대공녀도 무도회에서의 내 모습에 만족했다. 긴장하고 있으면 내 예절도 완벽했다.
"결국,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제 생각이 맞았어요. 자, 앞으로도 힘내자고요."
하지만, 그 정도로는 대공녀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결국, 2학기 내내 대공녀를 호위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검을 얻게 된 뒤, 한 달이 지난 주말 낮.
드디어 왕실 창고에 있는 검을 불러낼 준비를 끝냈다.
옆 방의 피아르도 기숙사에 없는 것을 확인했고, 경매장 주인에게 그동안 수도에 별일이 없는 것도 확인했다.
소환할 때 손에 쥐게 되는 문제도 해결했다.
생각해 보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나는 손을 앞으로 뻗은 뒤, 손등이 보이도록 뒤집었다.
잡기 좋은 위치, 손바닥 위로 나타나는 게 문제였으니, 이렇게 손바닥을 아래로 하고 소환을 하면 그만이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검은 검을 떠올리며 능력을 움직였다.
'소환'
멀리서 불러서 그런지, 마나가 쑥 빠져나갔다.
화아아악!
내 손 아래에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재빨리 손을 빼냈다.
검은색 검.
쇠사슬에 둘러싸여 있던 그 검이었다.
터엉.
허공에 나타난 검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솔직히 초대 왕이 쓰던 검에 대한 취급이 조금 심한 것 같기는 했지만, 죽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이걸 어쩐다."
불러오기는 성공했지만, 이다음이 문제였다.
검이 사라졌으니, 왕실 창고는 개판이 되었을 테고, 아마 왕실도 소란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나는 창고지기에게 속으로 사과했다.
그리고, 검을 쳐다보았다.
"한번 실력을 확인해 봐도 될 것 같은데……."
새로운 능력을 얻었으니, 15살짜리 용사와도 싸울 만한 것 같았고.
다른 곳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모두 발휘해서 대련해볼 수도 없었다.
다른 능력들도 문제였지만, 이번에 얻은 능력은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다.
"정신세계에서라면 마음껏 싸울 수 있는데 말이야."
검이 유혹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절로 마음이 기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바닥에 놓인 검을 보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결정을 내렸다.
한 번만 잡아보기로. 어차피 한 달만 반복하면 그만이었다.
죽을 정도로 아프기는 하겠지만, 기간이 길어서 버텨낼 수 있을 듯하기도 했고.
어차피 잡아서 확인을 해봐야 했다. 그걸 위해 이 방으로 검을 소환한 것이었고.
"그리고, 주머니 속에 넣었다가 빼려면 잡아야 해."
결국, 완벽한 핑곗거리를 찾아낸 나는 검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죽지 않았다.
나는 정신세계로 바로 가지도 않았고,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현재 임시 사용자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검의 설정을 조정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