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제24편 기사의 수련 검 (3)
텅 빈 콜로세움과 공간 전체를 울리는 음성.
[여기는 용사 중에 기사를 육성하기 위한 수련장입니다.]
전에 들었던 그대로였다.
나는 주머니에서 얼른 가지고 온 유물들을 꺼냈다.
반지를 손에 끼고, 목걸이를 걸고, 대검을 손에 들었다.
아카데미에서 지급한 검은 쇠뇌와 함께 한 쪽에 던져놓았고, 반대쪽 허리에 찼던 검도 다른 손에 쥐었다.
이제 싸울 준비는 끝났다.
이어서 설명이 이어졌고, 나는 차분히 반대쪽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한 달 이상을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그동안, 내 실력 자체가 확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보완할 방법은 최대한 준비해왔다.
나는 이길 생각이었다. 또 죽을 생각도 없었고, 한 달이 넘는 시간의 반복할 생각도 없었다.
지금, 그 결과를 보여줄 때였다.
촤르르르륵.
다시 쇠사슬이 감기는 소리가 들리고, 두꺼운 쇠창살로 만든 문이 올라갔다.
어두운 통로에서 갑옷을 입은 기사가 나타났다.
[첫 번째 상대는 처음 이 훈련장을 사용했던 15살의 카를로스입니다.]
다시 한번, 나이와 맞지 않는 덩치에 욕이 나왔지만, 이미 한번 싸워봤던 상대였다.
스르르릉.
기사, 아니 용사 카를로스가 검을 꺼내 들었다.
왕실 창고에 있던 검은 검이 아니었다.
'저게 왕이 대대로 가지고 다닌다는 기사의 검인가.'
한쪽은 창고에 처박혀서 이름도 없이 봉인되고, 다른 검은 '기사의 검'이라는 이름으로 축복을 받으며 왕가를 상징하는 검이 되었다.
뭐, 검을 잡는 사람들을 매번 죽여댔으니, 당연하기도 하지만.
'그런데, 처음 죽는 것을 봤으면서도 왜 계속 도전한 걸까.'
아니, 나는 왜 나답지 않게 덤벼든 거지?
용사가 다가오는 사이, 그런 생각이 잠시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용사가 검을 휘두르기 전.
나는 먼저 마나를 끌어올렸다.
우우우웅.
몸속에 있던 마나가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속에 만들어진 회로를 따라, 상속능력이 알려 준 심법에 따라 마나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마나를 가슴으로 돌려, 목걸이에 밀어 넣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마나가 목걸이 속에서 증폭되는 게 느껴졌다.
증폭된 마나가 다시 심법에 따라 몸속을 휘돌고,
팡!
넘쳐난 마나가 몸 주위로 뿜어졌다.
움찔.
다가오던 용사가 걸음을 멈추었다. 내 기세가 그를 멈춰 세운 것이었다.
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용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역시, 이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했다.
목걸이를 썼으니, 어차피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단기 승부.
나는 양손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우우우웅.
단검의 끝에서 보이지 않은 검기가 자라나고, 대검 날에서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동시에 움직였다. 선공을 줄 이유가 없었다.
크게 한 걸음 내디디며 대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대검이 막혔다.
용사가 검을 들어 검을 막은 것이다.
역시, 막힐 것 같았다.
어떻게 보이지 않는 검기를 막아섰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미리 휘둘러 대검을 막아냈다.
드드득.
하지만, 전과 달리, 내 검이 튕겨 나가지 않았다. 용사와 나는 검을 맞대고 대치하고 있었다.
자세는 내가 유리한 편이었다.
내가 대검으로 내리찍고 있었고, 용사가 장검으로 그 검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용사의 덩치 때문에 그 차이는 심하지 않았다.
'힘은 비등한 정도까지 올라온 건가.'
그때는 힘에서부터 완전히 밀려버리니, 뭔가 상대해볼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힘이 비등하다고 승부가 뒤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그그극.
검을 맞댄 상태로, 용사의 검이 보이지 않은 검날을 타고 아래로 밀려 내렸다.
거대한 덩치가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어느새 용사가 몸을 숙인 것이다.
몸을 낮추면서, 맞댄 상대 검날을 타고 검을 흘리는 기술.
분명, 왕국 기술 교범에도 나와 있는.
'용사 카를로스 검술 제12장'.
[검날 타고 들어가기.]
전부터, 왜 이렇게 검술 이름을 싼 티 나게 지었는지 궁금했었다.
에고 단검에 따르면 초대 왕이 작명 실력이 개판인 근육 바보라고 그렇다던데…….
지금, 그 근육 바보가 무시무시한 실력으로 나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분명, 내가 듣고 배운 카를로스 검술 12장은 이런 기술이 아니었다.
물론, 검술 자체는 상대 검날을 따라 검을 밀어 넣으면서, 적과 가깝게 접근해서 반격을 가하는 검술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마나를 움직여 검을 달라붙게 하는 기술은 아니었다.
저번 대결에서도 이런 식으로 검술이 마나와 같이 연동되는 바람에 허둥거리다가 된통 당해버렸다.
전에는 마나와 마나 심법은 단지, 육체를 강화하고, 검에 마나를 싣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용사와 싸워보니,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용사 카를로스가 남겨놓은 검술은 전부 마나와 연동되는 검술이었다.
하지만, 카를로스 초대 왕은 마나만 쏙 빼놓고 검술만 남겨 놓았었다.
그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이렇게 검술과 같이 마나를 움직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거기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선, 이렇게 검을 휘두르면서 마나를 조절하기 위해서는, 마나에 대한 엄청난 감각이 필요했다.
바로 '마나 감응력'이 필요했다.
바로 왕가만이 가질 수 있다는 그 능력이었다.
그 위에 검술에 따라 마나의 움직임을 바꿀 다양한 심법도 필요했고, 단단한 육체를 만들기 위해 '육체 최적화'도 필요했다.
거기다,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몇 가지 능력까지.
내가 당장 배울 수도, 따라 할 수도 없는 기술이었다.
마나 감응력은 아직 제대로 봉인이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외부의 감각은 엄청나게 강화되어 있지만, 반대로 몸 내부는 그 정도로 섬세하게 느낄 수 없었다.
마나 심법도 봉인이 해제되어 얻은 것과 어려서부터 기사들과 함께 훈련해서 얻은 가문의 심법, 두 가지밖에 없었다.
그나마 육체 최적화는 어느 정도 제대로 키운 것 같지만, 아직 얻지 못한 능력까지 포함하면 나는 용사 카를로스에 비해 반쪽도 못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 싸움에서 그것을 충분히 알게 되었고, 그래서 준비한 것이 바로 차르 제국의 검술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제국 검술에는 왕국 검술을 막아내기 위한 여러 기술이 들어있었다.
마나와 같이 움직이지 않게 된 지금의 왕국 검술에는 별로 효과가 없는 기술들이지만, 용사와 싸우게 된 나에게는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보이지 않는 마나 검날을 타고 검이 손잡이 쪽으로 밀려 내려오는 동안, 나는 대검에서 손을 놓고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손을 놓아도, 대검은 상대의 검에 묶여서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동시에, 몸을 숙이고 접근하는 용사를 향해 다른 손의 단검이 움직였다.
움찔하며 용사는 다가오던 몸을 멈추고, 검을 휘둘렀다.
깡!
보이지 않은 검기가 상대의 검과 충돌하고, 나는 몸을 옆으로 한걸음 움직여, 그제야 떨어져 내리는 대검을 잡았다.
대검을 달고서 다른 검을 막을 수 없으니, 마나로 묶어놓은 대검을 놓아준 것이다.
요하힘이 보여주었던 제국 검술과는 조금 달랐지만, 무기가 다른데 똑같이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원리만 비슷하면 그만이었다.
'좋아, 먹힌다!'
내가 그동안 준비한 것들이 쓸모가 없는 게 아니었다.
그 뒤에도, 찌르기가 도중에 갑자기 빨라지고, 검이 몇 배나 무거워지는 등, 이해하기 어려운 검술이 이어졌지만, 나도 제국 검술과 그동안 경험으로 어찌어찌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겨우 막아내는 것에 불과했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발전이었지만, 이래서는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마나가 미친 듯이 줄어들고 있었으니.
결국, 나는 저 무거워진 검에 튕겨 나가고 말았다.
콰앙!
몸무게가 차이 나니, 방법이 없었다.
댕구르르.
몇 바퀴나 바닥을 구른 뒤, 고개를 드니, 눈앞에 검이 다가와 있었다.
"괴물 같은! 한숨도 쉬지를 않냐!"
실제 용사의 실력을 똑같이 복제했다고 하던데, 다 뻥 같았다.
15살짜리 소년이 저렇게 쉬지도 않고 저렇게 달려들 리가 없었다.
이렇게 튕겨 나가고 그러면, 좀 기다려주는 게 정상이었다.
득달같이 달려와서 검을 휘두르는 게 이 나라의 초대 왕일 리가 없었다!
아무리 속으로 욕을 퍼부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더구나, 이번에는 용사가 달려들어 주기를 바랬다.
생각보다 너무 빨라 놀라버렸지만.
그래도, 내 마나 감응력은 봉인이 다 풀리지 않았는데도 제대로 움직여 주었다.
부우우웅.
위기가 느껴지는 순간, 손가락으로 마나가 흘러들었고, 내 주위에 반투명한 막이 만들어졌다.
콰직!
그 막은 만들어지는 순간, 바로 부서졌지만, 용사의 검을 멈춰 세울 수는 있었다.
검이 튕겨 나가고, 놀란 용사가 부서지고 있는 방어막을 보는 순간.
나는 바닥을 구르면서 집어 들었던, 쇠뇌를 들어 올렸다.
바닥에 던져놓았을 때, 검은 화살은 이미 장전해 놓은 상태였다.
지금도 웅크린 몸으로 쇠뇌를 숨기고, 화살촉만 겨드랑이 사이로 빠져나와 있었다.
기회는 지금 한 번밖에 없었다. 나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소리도, 기척도 없는 화살이었다.
용사의 마나 감응력이라면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가깝게 쐈는데, 내 반지 같은 게 없다면,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제대로 검술로 죽이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이대로는 몇 번이나 죽어나가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수련을 위한 장소였다. 검을 배우는 것은 이긴 뒤에 고민해도 될 문제였다.
'죽어라!'
나는 속으로 외치며 화살이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푸우욱.
내 예상대로 용사는 화살을 막지 못했다.
검은 화살은 용사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가죽 갑옷으로 막을 수 있는 화살이 아니었다.
"설마, 심장이 반대쪽에 있거나 하지 않겠지?"
"크윽."
처음으로 용사의 신음을 듣게 되었다.
쿨럭, 쿨럭.
화살이 꽂힌 곳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니 다행히 심장 위치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용사는 바로 죽지 않았다.
용사는 검을 다시 들어 올렸고, 나를 향해 휘둘렀다.
카앙!
"크윽. 젠장 아직도 힘이 남아 있냐!"
나는 급하게 단검을 들어 올려, 검을 막아냈다.
투덜거린 데로, 용사의 힘은 달라진 것 같지 않았다.
설마, 완전히 죽을 때까지 실력이 그대로인 전생의 게임 캐릭터 같은 것은 아니겠지?
나는 그런 걱정을 하면 검을 휘둘렀지만, 다행히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최대한 도망치면서 용사의 검을 막아냈고, 용사는 점점 느려졌다.
갑옷 위로 피가 퍼져나갔고, 용사의 걸음마다 피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결국, 쫓아오던 용사가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검을 들고 용사를 지켜보았다.
뭐라 말할까 지켜보았지만, 특별히 무슨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숨이 멈추었을 뿐이었다.
나는 숨이 멈춘 용사를 지켜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묘했다.
이겼다는 기쁨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용사이자, 초대 왕이 내 검에 죽은 것을 보는 것은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게 초대 왕의 시체를 보고 있자니, 시체가 점점 사라져갔다.
아무리 현실적이라고 해도, 역시 정신세계였다.
시체가 사라지니 좀 더 기분이 좋아졌다.
이겼다!
한 번에 끝낸 거다!
그렇게 기뻐하고 있는데, 예의 음성이 들려왔다.
[축하드립니다. 첫 번째 상대를 이겼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상대가 등장합니다.]
"아니, XXXXX!"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촤르르르르.
내가 얼마나 욕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반대쪽 쇠창살 문이 다시 올라갔다.
그 안에서 가죽 갑옷을 입은 기사가 나왔다. 조금 전 상대했던 용사가.
아니, 용사가 맞나? 덩치가 더 커진 것 같은데.
새로 나온 기사는 2m는 되어 보였다.
[두 번째 상대는 20살의 카를로스입니다.]
나는 욕할 기운도 없었다.
그저 멍하니, 문을 빠져나온 용사를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