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제21편 왕실 창고 (2)
내가 그 대신 호위를 한다는 말에 왕자는 나를 다시 째려보았다.
그래도 왕자는 내가 아이샤 공주의 호위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계속 대공녀에게 만나자고 권유했다.
"그럼, 다음 왕실 무도회 때 보자.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계속 미뤄지고 있지만, 어쨌든 한번은 해야 하니까. 혹시 보고 싶으면 아무 때나 찾아와도 되고."
"초청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대공녀는 예의를 갖추어 거절했고, 왕자는 마지막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로, 다른 귀족들과 함께 왕자궁으로 돌아갔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고, 대공녀는 이 나라의 왕을 만나러 걸음을 옮겼다.
왕실 집사장이 대공녀를 안내했고, 왕궁 기사들이 그녀를 호위했다.
공국 기사들은 그 관례 때문에 왕궁에 들어오지 못했다.
죽어버린 관례였고, 이상한 이유로 다시 꺼내 든 것이었지만, 다시 꺼낸 이상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공국의 기사들은 왕국 밖에서 대공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그녀와 같이 온 사람 중에 그녀를 따르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한 걸음 뒤에서 대공녀를 호위하며 왕궁 복도를 걸어갔다.
전에 왕궁 안에 들어와 본 적도 있긴 했지만, 이렇게 본궁 깊숙이 들어와 본 적은 없었다.
화려한 문의 알현실도 지나가고, 세월이 담겨있는 듯한 왕의 집무실도 지나가니, 복도 옆에 기사들이 지키고 있는 문이 보였다.
분명 침실과 붙어있는 응접실 문이었다. 하지만, 응접실 문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큰 문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본 응접실 문 중에 제일 큰 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문 안쪽에는 이 왕국 주인의 침실과 응접실이 있었다.
나는 당연히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대공녀는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멀뚱히 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벽을 보고 눈을 몇 번 깜빡이지도 않았는데, 대공녀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얼마나 빨리 나왔는지, 인사만 하고 끝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인사만 드렸어요."
나중에 대공녀의 말을 들으니, 정말 인사만 받은 모양이었다.
"제가 오래 아팠던 경험이 있어서 잘 아는데……. 단정한 모습이시긴 했지만, 건강이 무척이나 안 좋으신 것 같았어요."
왕은 대공녀에게 건강한 모습을 보여서 공국왕에게 자신의 건재함을 알릴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아쉽게도 그 계획은 대공녀에게 바로 들켜버렸다.
오래 아팠던 대공녀 때문인지, 아니면 왕이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아픈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왕의 병세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왕을 만난 뒤에 우리는 다시 왕궁 지하로 내려갔다.
이 왕궁을 방문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왕궁의 보물 창고는 왕궁의 기초가 만들어질 때, 제일 먼저 지하에 자리를 잡았다.
초대 왕인 카를로스 기사가 대전쟁 때 얻은 각종 보물을 제일 먼저 창고에 집어넣었고, 뒤를 이은 왕들이 더 많은 보물과 유물을 보관했다.
그렇게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왕실 창고는 온갖 소문의 진원지가 되어 지금은 왕국 소년들의 꿈의 유토피아가 되어 버렸다.
'나도 그런 소년 중의 한 명이니까.'
지하로 내려가는 동안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것은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한참을 내려갔다.
전생의 주차장 깊이를 지나서 지하철 승차장 이상을 내려간 것 같았다.
다행히 대공녀가 힘들어하지 않았지만, 올라갈 때는 조금 걱정이 될 정도였다.
보안도 무척이나 철저했다.
내려가는 중간에 문도 여러 개 있었고, 창고에 도착하기 전에 검문도 있었다.
미리 대공녀가 온다는 말을 들었는지, 중간의 철문들은 열려 있었다. 검문도 대공녀는 따로 질문 없이 통과했다.
하지만, 나는 검문에 걸려 내려가지 못 할 뻔했다.
"알렉스 데 그레시아? 그레시아 공작님에게 알렉스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은 없을 텐데."
반쯤 열린 철문 앞에서 딱 봐도 고지식해 보이는 늙은 귀족이 나를 노려보았다.
앞에서 기다리던 대공녀가 눈썹을 찡그렸고, 다른 기사가 다가와 그에게 속삭였다.
"그게……. 서자입니다."
"아니, 서자가 왜 여길 와."
기사가 조용히 말한 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검문하는 귀족의 목소리가 지하 통로 전체를 울렸다.
그의 말에 대공녀가 다가오려 했고, 기사가 다시 급하게 말했다.
"대공녀님의 호위로 온 겁니다. 같은 아카데미 학생이랍니다."
그는 대공녀와 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본 뒤에 나를 통과시켜주었다.
표정을 보지 않아도 대공녀와 나 사이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뻔히 보였다.
아무리 열심히 살고, 내 실력을 보여줘도,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내 위치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전에는 이럴 때마다 어머니를 모시고 조용한 곳에서 숨어지낼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이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거렸다.
서자를 무시하는 자들을 다 무릎 꿇리고, 머저리 같은 왕자도 왕도 모두 쓸어버리고 싶은 욕망이 머리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내 동료들이, 나를 아는 사람들이 가라앉혀 주고 있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나는 검문을 하던 귀족 얼굴을 머릿속 깊이 담가두었다.
마지막 검문소 앞에서 다른 기사들은 멈춰 섰다.
이곳에서 창고까지는 대상자와 한 명의 호위만 갈 수 있었다.
대공녀와 나는 오래된 통로를 지나 커다란 문 앞으로 걸어갔다.
이상한 문양이 가득 그려진 문.
다른 사람들이 왕실 창고 입구라고 말하는 문 앞에는 로브를 깊게 눌러 쓴 사람이 서 있었다.
"이번에 왕실 창고를 보겠다는 분들입니까."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풍기는 분위기도, 흘러나오는 마나도,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누구인지 알 수도 없었고, 누구인지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대공녀는 그의 물음에 잘 대처했다.
"창고지기입니까? 맞습니다. 저와 제 호위가 이번에 카를로스 왕실 창고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공국에도 비슷한 식으로 운영이 되는지, 아니면 따로 배운 것인지 모르겠지만, 공주의 대답에 창고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까지 같이 방문하는 분이 자주 있는 건 아니지만, 여성이시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군요."
창고지기가 하는 말이 조금 이상했다.
그는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금부터 문을 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안에 있는 물건은 공식적인 허락이 있지 않은 한 외부로 반출할 수 없습니다."
"들어가기 전에 유물을 빼놓지 않아도 괜찮나요?"
대공녀가 창고지기에게 자신의 손을 보여주었다.
반지들과 팔찌가 벽에 걸린 불빛에 반짝였다. 저 액세서리들은 전부 유물이었다.
그녀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물들이 왕실 창고에 들어가는 데 문제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녀의 손을 보면서 나도 마음속으로 빌었다.
단검 하나 정도는 괜찮기를.
창고지기의 대답이 들려왔다.
"괜찮습니다."
나이스!
"유물은 빼놓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왕실 창고에 들어 있는 유물은 전부 창고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유물과 섞이지도 않고, 몰래 가져나갈 수도 없습니다. 어떤 유물을 가지고 들어가셔도 상관없습니다."
나이스이긴 한데, 아니, 이러면 일부로 빼놓고 올 필요도 없었잖아!
중간 검문소도 괜히 내 이름만 물어보았고. 뭔가, 좋지만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이 왕실 창고가 하나의 유물입니다. 유물 속에 보물을 보관하고 있는 거지요. 저 같은 자가 왕실 창고지기를 맡은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창고지기가 문에 손을 올렸다.
우우우웅.
문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절로 검에 손이 올라갔다.
문으로 마나가 몰려드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웬만한 기사 이상, 보스급 마물보다 더 강한 기운이었다.
내가 검에 손을 올리는 것을 보고, 로브 안에서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 기운을 알아차리다니, 왕족이신가요?"
공작 아들이기는 하니까, 촌수로 따지면 몇 다리 건너 왕족이기는 했다.
하지만, 창고지기가 묻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카를로스 왕족만이 가지고 있다는 '마나 감응력', 내가 그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냐고 묻는 것이었다.
감각이 좋아지고, 마나를 느끼고 볼 수도 있는 것을 보니,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보창을 살펴봐도 아직 '마나 감응력'은 봉인 해제 중이었다.
어떻게 해제하는 건지도 전혀 모르겠고.
뭐, 봉인 해제 중이 아니더라도 왕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오해한 것 같군요."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고, 마나가 가득 흐르던 문은 오래 지나지 않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르르릉.
웅장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린 문.
신기하게도 문이 열리자, 안쪽 창고가 환해졌다.
밖에서 보아도 무척이나 눈이 부셨다.
"따라오시죠. 안을 구경하는 데에는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대공녀가 그를 따라 걸어갔고, 나도 대공녀의 뒤를 따라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 안은 말 그대로 보물 창고였다.
한쪽에는 금화가 가득 쌓여 있었고, 다른 쪽에는 보석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실수로 금화 하나도 가지고 나가시면 안 됩니다. 바로 이상이 알려져서 기사들도 달려오겠지만, 그전에 본인에게도 안 좋은 일이 생길 테니까요."
무슨 일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우리는 수많은 보물 사이를 계속 지나갔다.
창고지기는 매번 보아왔는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고, 대공녀도 이 정도 보물은 아무것도 아닌지, 무척이나 담담했다.
역시, 제일 가난한 내가 문제였다.
나도 유물로 돈을 벌어서 가난뱅이 수준은 벗어났지만, 이렇게 쌓여 있는 금은보화를 보니,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유물 욕심에 참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는 몰래 보물 창고를 털 구상이 계속 펼쳐지고 있었다.
그렇게 금은보화를 지나, 낡은 골동품들이 우리를 반기는 곳에 도착했다.
전생이었으면, 진품명품에 나올만한 골동품이겠지만, 이곳에 있는 물건들은 평범한 골동품이 아니었다.
전부 마나를 담은, 혹은 마나를 활용할 수 있는 유물들이었다.
"여기 유물들을 보기 위해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시간을 들여서 차분히 보셔도 됩니다."
조용하게 말하던 창고지기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다만, 이 검은 절대! 손을 대시면 안 됩니다."
창고지기는 멀찍이 따로 떨어진 곳에 세워진 검을 가리켰다.
검 주위에 쇠사슬이 처져 있었고, 그 앞에는 붉은 글씨로 경고문까지 쓰여 있었다.
[접근 금지, 손대지 말 것]
저런 무시무시한 경고라니. 방사능이라도 끼얹은 검인가.
나와 대공녀가 그를 쳐다보니, 창고지기가 검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이 검은 죽음의 검입니다. 카를로스 초대 왕께서 돌아가신 뒤, 검에 손을 댄 사람 중에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말, 죽는다고?
[저 검, 용사가 쓰던 유물이 맞습니다. 근육 바보 카를로스 기사가 쓰던 검입니다. 번쩍거리는 검하고 저 까만 검 두 개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기사의 검은 대를 이어 왕의 손에 들려졌지만, 이 검은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이곳에 봉인되어 버린 것입니다."
[카를로스는 잘만 사용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용사들은 손도 못 대게 한 게 그런 이유였었나요.]
손을 대는 자를 죽이는 검. 사람이 죽기 때문에 쓸모없는 검.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죽음과 가까웠고, 수많은 죽음을 경험했었다.
죽는다는 말은, 나에게는 엄청나게 아플 거라는 말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나는 검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