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제20편 왕실 창고 (1)
대공녀가 왕실 창고를 방문하게 되는 날이 다가오는 와중에, 다니에르 자작의 장례식이 있었다.
가족장에 가까운 단출한 장례식이었다.
다른 귀족들도 별로 오지 않았고, 심복이라고 말하던 제2 왕자도 본인이 오기는커녕, 사람조차 보내지 않았다고 했다.
역시, 사람이 죽으면 친분도 권력도 의미가 없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그만큼 인망이 없었던 것인지.
결국, 또 한 귀족이 죽었지만, 왕국의 수도는 여느 때처럼 잘 굴러갔다.
* * *
그동안 나는 교환 학생 요하힘에게서 도망을 다니고 있었다.
"다시 한번 붙어보고 싶습니다."
"싫습니다."
만날 때마다 대련을 요청하고 거절하는 일이 반복되자, 그는 기사 학부 수업까지 들어왔다.
"상속능력 학부로 등록하신 것 아닙니까? 지금은 기사 학부 수업입니다."
"교환학생의 의의는 왕국의 여러 교육을 경험해 보는 데 있습니다. 상속능력 학부 외에도 다른 학부를 경험해 보는 것이 제국과 왕국의 교류에는 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 물음에 대충 그럴듯한 말을 쏟아냈다.
정원이 박살 난 학생의 능력처럼 그럴듯하게 들리는 능력이 없으니, 어처구니없는 말이라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기사 학부의 다른 학생들도, 카르리네 교수도 그를 쫓아내지 않았다.
"제국에서 온 교환 학생이 이렇게 열심일 줄 몰랐는데. 좋아! 오늘은 대련 수업이다. 저렇게 원하는데 왕립 아카데미 기사 학부를 대표해서 알렉스, 네가 상대해 줘."
오히려 카트린은 흥이 나서 수업을 대련 수업으로 바꿔버렸다.
당연히 내 상대는 요하힘이었고.
"오래 기다렸습니다! 다시 한번 도전하겠습니다!"
그 잘난척하던 제국 소년이 이렇게 바뀌다니.
"제국 검술보다는 부족하지만, 당신은 제가 배우기에 충분한 상대입니다!"
아니, 크게 바뀐 것 같지는 않았다.
자긍심 덩어리 소년에서 자긍심 열혈 소년 정도로 달라졌을 뿐이었다.
저 제국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으니, 나도 다시 싸우고 싶어졌다.
아마도 싸움을 부르는 구호이려나.
"갑니다!"
요하힘의 힘찬 외침을 듣고 나도 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콰직.
얼마간의 대련 뒤에, 이번에는 검으로 갑옷 위로 힘껏 후려갈겨서 갈빗대를 몇 개 부러뜨렸다.
"크윽."
땅에 구르고 고통에 겨워했지만, 그래도 요하힘의 표정은 밝았다.
이 정도로는 부족한 건가.
대신 그는 옆구리를 붙잡고 일어나면서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정말, 대단한 실력입니다. 다음 교환 학생으로 제국 아카데미에 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곳에서 있기에는 아까운 실력입니다."
어이, 어이, 무슨 그런 불길한 소리를.
설마, 교환 학생이 이쪽 학생도 제국으로 가야 하는 거였던 건가?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이번에는 기필코 빠지기로 다짐 또 다짐했다.
* * *
그렇게 요하힘까지 상대해 주니, 왕궁으로 가는 날이 돌아왔다.
출발하기 전, 기숙사에서 가지고 있던 유물을 모두 빼내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구슬과 반지와 목걸이, 대검까지.
에고 단검만 남겨둔 채로 모두 주머니에 넣어 방 깊은 곳에 숨겨두었다.
왕실 창고에서 신체검사를 할 테니, 괜한 유물을 가지고 갔다가는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다른 유물은 모두 기숙사에 남겨놓은 것이다.
그렇지만, 불새 단검은 가지고 가야 했다.
용사의 유물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에고 단검이 꼭 필요했다.
대공녀와 함께 가니, 작은 유물 하나 정도는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아카데미 제복과 허리에 찬 아카데미 제식 철검을 확인한 뒤, 반대쪽 허리에 단검을 차고 기숙사 문을 나섰다.
교문 앞까지 걸어가는 동안, 지나가던 다른 학생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옷깃을 보니, 상급생들이었다.
분명 나를 아는 눈치였다. 동급생들도 아니고 상급생들이 나를 알다니.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반년 만에 아카데미 안에서는 꽤 유명해진 모양이었다.
정문 앞에 왕실 마차가 서 있었다.
대공녀는 이미 마차에 타고 있었고, 나를 태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반년 만에 여러 번 왕실 마차를 타는 것 같았다.
마부마저 나를 알고 있었다. 마부의 인사에 답례하고, 같이 따라온 공국 기사분들에게 인사를 했다.
대공녀가 유학하는 동안에 그녀를 지키기 위한 기사들이었고, 오늘도 왕궁까지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것이었다.
그들이 있으면 내 호위는 필요도 없겠지만, 아쉽게도 저들은 왕실 창고, 아니 왕궁 안에서 대공녀를 호위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공국으로 분리된 나라였고, 카를로스 왕실은 다른 나라 기사를 특별한 일 없이 왕궁으로 들일 수 없다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차에 올라 대공녀를 만나니, 그녀에게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상해서 살펴보니, 유명무실해진 관례였어요. 아마도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서 먼지에 뒤덮인 죽은 관례를 꺼내 온 거겠죠."
왕궁에 가기 때문일까?
대공녀는 완전 무장을 한 상태였다. 아름다운 드레스에 반짝이는 장신구, 멋지게 세팅된 머리까지.
무도회 복장은 아니었지만, 야회복치고는 엄청나게 힘을 준 모습이었다.
"왕국 기사들이 대신 지켜준다고 말을 하던데, 솔직히 처음 보는 사람들을 어떻게 믿겠어요. 왕국으로 올 때 같이 온 기사들도 아니라던데."
옷이 달라져서인지, 백합처럼 단아해 보이던 그녀가 지금은 화려하게 피어나는 장미처럼 보였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기사 학부 지원 제도가 있어서. 왜 이렇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앞에 아이샤 공주의 전설적인 호위 기사가 있잖아요. 이제 걱정할 필요는 없겠죠?"
"아……. 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확 변해버린 대공녀에게 시선을 빼앗겨서 제대로 말도 못 들을 뻔했다.
대공녀가 작게 웃는 것을 보니, 대답도 이상하게 한 것 같았다.
"사교계는 아니지만, 오늘이 카를로스 왕국에서의 제 첫 데뷔니까요. 공국에서도 아파서 사교계에 얼굴을 거의 못 내밀었으니, 이번이 제 생애 첫 데뷔이려나요. 어때요. 괜찮나요?"
대공녀의 말을 들으니, 호위 기사로 데려가기보다는, 긴장을 풀어줄 친구로 데려가는 느낌이었다.
뭐, 어느 쪽이든, 데려가 주기만 하면 나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나는 미사여구를 총동원해서 대공녀의 아름다움을 칭찬했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대공녀는 소리 내서 웃어버렸다.
"확실히, 공주말대로 아부는 정말 못 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진짜 칭찬인지 아부인지 바로 알 수 있으니, 사실을 확인하기에는 좋을지도 모르겠어요."
우울한 말이었다.
분명 어렸을 때는 다들 내 연기에 다 속아 넘어갔었다.
그런데, 이런 소리를 듣게 되다니.
그동안 너무 연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았다. 거기다 아부하는 연기는 연습도 하지 않았고.
어디 연기학원이라도 있으면 시간을 쪼개서 참가해야 할 것 같았다.
왕실 마차는 시내를 가로질러, 왕궁에 도착했다.
왕궁 앞에는 대공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내가 먼저 마차에서 내린 뒤, 대공녀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주자, 한 남자가 기분이 나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남자가 꽤 많았기에 처음에는 별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을 확인한 뒤에는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화려한 옷에 잘생긴 축에 들어가지만 날카로운 얼굴. 그리고 뒤에 늘어선 기사들까지.
공주를 마차에서 내려준 뒤에 나는 냉큼 그 남자에게 인사했다.
"두아르도 왕자님께 인사드립니다."
제2 왕자가 째려보는 것은 평범한 남자 놈들이 노려보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였다.
지금도 아슬아슬한데, 괜히 찍히기라도 하면 인생이 피곤해질 게 분명했다.
다행히 왕자가 대공녀를 보게 되자, 나 같은 것은 바로 잊어버렸다.
그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대공녀 앞으로 다가왔다.
"정말 건강해졌구나. 오랜만에 보는 거지? 프리다."
이름만 말하는 것을 보니, 제2 왕자는 대공녀와 많이 친했었던 것 같았다.
"어렸을 때 뵙고 두 번째 뵙습니다. 두아르도 저하."
아니, 친했던 게 아니잖아!
하지만, 제2 왕자는 이번에도 대공녀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말만 골라서 들은 것 같았다.
"이것 봐, 어렸을 때인데 프리다도 기억하고 있었잖아."
왕자는 자랑하는 얼굴로 옆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왕자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왕자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은 움찔 놀라고, 대공녀와 다른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설마, 자작이 죽은 것을 까먹은 건가?
왕자의 행동 덕분에 어디선가 까마귀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잠깐, 민망한 시간이 지나간 뒤, 왕자가 입을 열었다.
"충직한 수하가 죽어서 잠깐 내가 실수했군. 아름다운 사촌이 와서 내가 흥분한 모양이야."
확실히 흥분한 것 같기는 한데. 저 꼴을 보니, 예쁜 사람만 보면 매번 흥분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보다, 자작이 죽은 게 왕자에게 영향을 주기는 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대공녀를 마중 나온 제2 왕자의 행동도 어딘가 조금 어설픈 것 같았다.
제1 왕자와 달리 무척이나 교활한 왕자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왕자는 사촌 누이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흔한 난봉꾼처럼 보일 뿐이었다.
왕자는 어색해진 공기를 무시하고는 대공녀에게 손을 뻗었다.
"자, 내가 왕궁을 소개해 줄 테니, 따라오렴."
왕자의 말에 대공녀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내가 대공녀를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저건 화난 거다.
바람둥이라는 말에 여자에게 말이라도 잘할 줄 알았는데, 저렇게 쉽게 상대방을 화나게 하다니.
바람둥이라는 소문은 전부 왕자의 이름값 때문이었다.
대공녀는 크게 숨을 내쉬고는 왕자의 말에 답했다.
"죄송합니다. 일정이 있어서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왕께도 문안을 드려야 하고. 왕실 창고를 본 뒤에도 기다리는 분들이 계십니다."
"쯧, 이제 국사도 안 보시는데……."
대공녀의 말에 왕자가 작게 구시렁거렸다.
설마 그 정도로 나빠진 건가? 공주의 각성식에서 봤을 때는 그래도 거동은 잘하는 것 같았는데.
왕자는 나지막이 혀를 차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왕께서 보신다면 어쩔 수 없지. 그보다 왜 호위를 거절한 거야? 내가 직접 안내해줄 생각이었는데."
제2 왕자의 말에 대공녀의 표정이 다시 안 좋아졌다. 이번에는 표정을 감추기 어려웠는지, 고개까지 숙였다.
나도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왜 공국 기사들을 막는 낡은 관례를 끄집어냈나 했더니, 결국 그런 얄팍한 생각 때문이었냐!
뭔가 거창한 비밀이 숨어 있지 않나 걱정했는데, 결과를 알고 나니 허탈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봐도 저건 분명 자작이 빠진 여파가 분명했다.
아무래도 내가 제2 왕자 진영에 심각한 피해를 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