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제19편 대공녀와 함께 왕궁으로
방패로 능력을 사용하기도 전에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 때문이었다.
혹시나 길을 가다가 용사가 쓰던 유물을 발견할지도 몰라 허리에 계속 차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난리를 칠 줄은 몰랐다.
[이 방패는 첫 번째 주인님이 쓰시던 방패입니다!]
카트린이 건네주는 방패를 보고 에고 단검이 외쳤다.
머릿속을 울리는 고성에 어질어질해졌지만, 소리를 친 에고 단검에게 뭐라 할 수는 없었다.
용사가 쓰던 유물을 발견하면 알려달라고 했으니, 에고 단검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
방패로 능력을 시연하고, 이번에는 검을 빌렸더니, 에고 단검이 다시 소리쳤다.
[앗, 이 검도 마찬가지입니다.]
검도 바로 알아보는 것을 보니, 에고 단검이 말한 대로 눈썰미가 나쁘지 않았다.
[저와 검과 방패, 셋이 모였습니다! 이제 첫 번째 주인님의 장비는 모두 모이게 된 것입니다!]
에고 단검이 기운차게 외쳤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예정이었다.
카트린이 아니었으면 단검도 지키지 못 할 뻔했는데, 여기서 방패와 검을 욕심 내는 것은 무리였다.
차라리, 내 각성 능력의 모태가 되는 카를로스 기사의 장비를 노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레시아 공작가에도 카를로스 초대 왕의 무기가 있으려나? 아니면 왕실 창고에 있을 텐데…….'
왕실 창고를 떠올린 나는 깨끗하게 단념했다. 왕족이 아니면 들어가기가 불가능한 곳이었다.
그나마 확인이 가능한 공작 저택이나 살펴봐야 할 것 같았다.
내가 검을 휘둘러보는 사이, 카트린은 돌려받은 방패로 마나 장벽을 펼쳐 보였다.
아직도 그녀의 장벽이 훨씬 크고 단단했다.
"아니, 당연히 내가 더 좋아야지, 뺏어 간 네가 벌써 더 좋으면 어떻게 해."
아쉽긴 했지만, 카트린의 말이 맞았다.
그녀의 말을 반박하기에는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가 너무 시끄럽기도 했고.
[앞에 계신 분도 첫 번째 주인님이 쓰시던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역시, 에고 단검도 카트린이 쓰는 능력을 알아보았다.
[설마, 앞에 계신 분이 라텐하마르라는 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겠죠?]
거기다 눈치도 좋았다.
아무래도 집에 돌아가서 따로 설명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대충 단검의 질문을 뭉개놓으니, 이번에는 카트린이 물었다.
"설마, 검도 빌려달라고 한 게, 그 검으로도 우리 집 능력을 얻을 수 있는지 확인해 보려는 거야?"
눈치가 좋은 사람이 또 있었다.
"그런 거창한 이유는 아니고요. 우연히 방패로 쓰는 능력을 얻게 되어서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서요."
"그게 그 이야기잖아."
역시, 쉽게 안 넘어가네.
"그래도, 솔직히 말해 주었으니 봐줄게."
그래도 카트린은 좋은 사람이었다. 대신 그녀는 내게 조심하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 특히 우리 백작님은 모르게 해야 돼. 네가 그 능력까지 얻었다는 걸 알게 되면 가만히 있을 분이 아니야. 이유를 만들어서 널 잡아들이려고 하거나, 아니면 우리 집안사람하고 결혼시키려고 할걸."
"결혼요?"
"음, 비슷한 나이대가 없나. 잘못하면 결혼 상대로 노처녀인 내가 될지도……."
그건 좀.
전생으로 따지면 노처녀도 아니고, 정신 연령으로 보면 내가 더 나이가 많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10살 차이가 넘는데.
음……. 음…….
생각해보니 별문제 없으려나.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그녀도 농담이었고, 나도 들킬 생각은 없으니,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아쉽게도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검에서 새로운 능력은 얻지 못했다.
계속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방법이 필요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방패를 써보았지만 기존 능력이 더 강해지지 않았고, 그날은 새로운 능력을 카트린에게 시연하는 시간이 되었다.
* * *
첫 번째 호위 때 난리를 친 탓에 나는 여유로운 2학기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벼르고 있던 학생들은 그때 이야기를 듣고 나를 모른 척했고, 대신 다른 기사학부 학생들이 많이 고생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에게 위로를.
내 일도 아니고, 그들을 도울 방법도 없으니, 반쯤 빈 수업 시간에 그들을 위해 기도나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놀고 있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새로 구한 조언자를 열심히 갈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연무장 한쪽에 서서 단검을 들고 묵묵히 서 있을 뿐이겠지만, 알고 보면 머릿속으로 열심히 싸우는 중이었다.
'용사가 싸우는 것을 계속 지켜보았을 것 아냐. 직접 너를 잡고 휘두르기도 했을 테고. 그러면 뭔가 알고 있는 기술이나 검술이 있을 거잖아!'
[글쎄요. 별로 기억나는 게 없습니다만.]
아무래도 내 에고 단검은 삐지기도 잘 삐지는 것 같았다.
카트린을 만나고 온 다음에는 계속 이 모양이었다.
'아니, 이유를 설명했잖아.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고, 직접 나한테 줬다고 말한 걸 너도 들었잖아.'
[제가 뭐라 한 적이 있습니까. 저는 새로운 주인님의 단검일 뿐입니다.]
삐진 단검을 한참을 어르고 달래니, 겨우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온 이야기도 그리 마음에 드는 내용이 아니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는 단검입니다. 단검은 부무장입니다. 부무장은 검과 방패를 쓸 때 주인님처럼 허리에 차고 다니는 그런 무기입니다.]
아니, 얼마 전까지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던 단검이 아닌 것 같았다.
[야습 때 쓰던가, 상대가 다른 무기에 신경을 쓸 때, 몰래 찌르기도 하고, 잠든 숙녀 옆에서 암살자들과 싸울 때 쓰기도 했죠.]
전 주인이 단검을 어디에 썼는지 들으니 조금 미안해지기도 했다.
자신도 단검을 그렇게 써왔었다.
[고문을 할 때도 주로 사용하셨는데……. 용사님이 쓰시던 고문법을 알려드릴까요?]
고문이라니.
지금 고문하는 법을 배우자고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는 공작가 서재에서 찾아낸 고문 방법이 가득 들어있었다.
대부분 대전쟁 이후에 만든 고문 법들이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고문은 세대를 거쳐서 꾸준히 발전해 왔다. 대전쟁 때 고문법은 구시대의 기술일 뿐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에고 단검이 알고 있는 기술들이 있었다.
수준 높은 검술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마나를 활용한 여러 쓸모 있는 기술들이었다.
'이 기술들은 은신이나 암살에 가까운 능력이라 기사가 쓰긴 애매하기는 한데.'
이대로 가다가는 암살을 더 잘하게 되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 * *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나에게도 다시 한번 지원 요청이 들어왔다.
거절할 수 없는 요청이니, 명령이나 지시에 가깝겠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잘 아는 사람이었다.
발레아는 아니었다.
그녀는 저번에 나에게 귀신의 집에 대해 듣더니, 비슷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이 세계 최초의 공포 테마파크를 만들고 있었다.
뭔가 대단한 축제가 되어버릴 것 같아 겁이 날 정도였다.
그리고, 마누엘은 다른 귀족들과 훈련을 위해 여행을 떠났다.
영지를 순회하면서 훈련을 한다는 거창한 이야기였지만, 그런 훈련에 낚싯대를 가져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설마, 마누엘의 능력은 전기 능력인데.
물에 전기를 뿌린다는 사도 짓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결국, 내게 지원 요청을 한 사람은 두 사람이 아니라, 프리다 대공녀였다.
"어디 유적이라도 찾으셨습니까?"
저택에 찾아가 물으니,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대공녀는 언제나처럼 품위 있는 모습이었다.
다만 고민이 있는지 이맛살을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유적이 아니라면 내가 왜 필요한지 알 수 없었다. 유적 말고 다른 일은 내 머리에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면 여행 중 호위? 어디 멀리 가는 걸까?
"수도 밖으로 나가는 일인가요?"
대공녀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수도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그럼 유물 경매장이라도 열리는 건가?
차마 대공녀에게 불법인 경매장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내가 봐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계속 틀리자, 대공녀가 무슨 일인지 말해주었다.
"이곳 왕실에서 지원을 해주겠답니다."
다만 그녀의 말은 시작부터 뜬금없는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왕실이라고 하지만, 정확히는 제2 왕자님이 지원을 해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아니, 잠깐. 공국 왕과의 협상은 자작이 죽으면서 끝났을 텐데.
협상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녀가 더 말하기를 기다렸다.
말을 하기 전에, 대공녀가 묘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저 표정은 불쾌하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한 표정이려나.
대공녀가 입을 열었다.
"왕자님의 말을 전하던 귀족은 호감의 표시라고 하더군요."
아니, 제2 왕자가 대공녀에게 추파를 던졌다는 거잖아.
제2 왕자와 대공녀는 사촌인데?
아, 맞다. 이 나라는 사촌끼리 결혼해도 상관없었지.
"제2 왕자님이 아직 결혼을 안 하셨나요?"
"모르셨어요? 아직 미혼이었어요."
엄청난 바람둥이라는 말을 듣고 그동안 결혼했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럼, 바람둥이 왕자가 바람둥이 짓을 다시 하는 건가?
"저와 결혼하게 되면 어찌 되었건 다음 대 왕이 되기에 무척 유리해질 테니까요."
결국 정략적인 이야기였다. 표정을 보니, 대공녀는 제2 왕자의 의도가 무척이나 싫었던 것 같았다.
내가 알고 있을 정도이니, 대공녀도 제2 왕자 소문을 들었을 터였다.
"그렇게 싫으면 거절하시면 될 것 같은데요. 대공녀님이면 충분히 거절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공국이기는 하지만, 그녀도 공주였다. 타국의 제2 왕자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거절하기가 어려웠어요. 저에게 꼭 필요한 지원이었어요."
"어디 대단한 유물이라도 보여 주신다는 걸까요?"
"네, 무척이나 대단한 유물을 보여준다고 하네요."
대단한 유물? 제2 왕자 소유의 유물이 뭐가 있으려나.
내가 제2 왕자가 어떤 유물을 가지고 있는지 알 리가 없었다.
저번에 가져갈 뻔한 유물도 내가 다 쓸어갔었고.
이리저리 상상하던 나에게 대공녀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왕실 창고를 보여 주신답니다."
아니 잠깐.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게 되는 건가?
"그게 제2 왕자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인가요?"
"왕실 창고에서 가져나가는 것도 아니니까요. 능력 훈련을 위해보고 나오는 것 정도는 가능한 모양이에요. 그걸 위해 2 왕자님이 몇 가지 포기하신 게 있나 봐요. 저에게 자랑스럽게 포기한 내용을 말해주더라고요."
멋지구나. 제2 왕자. 여자, 아니 권력을 위해 왕실 창고를 개방하다니.
나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대공녀에게 강하게 말했다.
"당장 하셔야죠. 왕실 창고입니다. 대공녀님의 능력을 빠르게 키울 수 있을 겁니다. 어차피 이 정도 선물은 호감을 조금 얻는 정도로 생각할 겁니다. 나중에 감사 인사 정도 하면 그만입니다."
얻는 것에 비하면 절도 할 수 있을 듯했다. 대공녀에게 시키지는 못하겠지만.
대공녀가 왕실 창고에 들어가 빠르게 능력을 키우면 내 구슬도 금방 복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나도 같이 들어가게 된다면 혹시 카를로스 기사의 무기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아니,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로지 대공녀를 위해.
"꼭 가셔야 합니다. 이번이 기회입니다!"
강한 주장에 대공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일체의 사심도 없었다.
내 눈에는 오직 그녀를 위한 충정만이 가득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