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제18편 꽃밭에서 대련을
"요하힘 공자가 대련을 해보고 싶다고 하시네요. 호위만 하느라 힘드실 테니 잠시 어울려 주시지 않겠어요?"
이 정원에 다과회를 하게 만든 여학생이자, 상속능력 학부의 한 파벌을 이끌고 있는 백작의 첫째 딸이 부드러운 어조로 내게 물었다.
말과 함께 슬금슬금 마나가 흘러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상속능력인가.'
대결 시 충돌을 일으키는 투기 형태의 마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느끼지 못하게 변형된 무척이나 은밀한 마나였다.
나도 겨우 느꼈으니, 다른 사람들은 저 마나가 스며드는 것을 느끼지 못할 것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능력도 아닌 것 같고.'
마나가 흘러들게 놔두었더니, 그녀가 꺼낸 말이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막 생각이 달라지는 정도는 아니었고. 강력한 마나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예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대단하다면 대단하고, 별로라고 생각하면 별로인 능력이었다.
저택에서 쫓겨난 두 번째 공작부인의 마이너 버전 정도 일려나.
이 세상 귀족들도 상속능력 때문에 피가 섞이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둘째 공작부인과 같은 조상의 피가 흐를지도 몰랐다.
"요하힘 공자가 그동안 저희 왕국 기사들을 많이 무시했잖아요. 공자님이 나서주셔서 카를로스 왕국 기사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셨으면 좋겠어요."
확실히 그럴듯한 말과 같이 들으니, 그녀의 말대로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발레아가 더 위험한 느낌이 드는데.'
능력이 없어도 발레아가 말할 때 더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가식인지, 매력인지 모르겠지만, 발레아가 이쪽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둘째 공작부인보다 훨씬 위험한 능력자가 되었을 게 분명했다.
'아니, 지금도 충분히 위험해.'
잠시 딴생각으로 흘렀지만, 결국 나는 그녀의 말을 수락했다.
어차피 싸울 생각이었다.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주는데 뺄 이유가 없었다.
잠시 뒤, 꽃향기가 가득한 정원에 제국에서 온 소년과 내가 마주 보고 섰다.
수도에서 아름답기로 손가락에 꼽는다는 정원이었지만, 지금 정원을 구경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검을 들고 서 있는 나와 제국에서 온 소년을 보고 있었다.
검을 들고 서 있자니, 아름다운 꽃들이 대련을 구경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붉은 꽃은 피를 흘리는 사람들이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준비를 하고 있으니, 앞에 선 소년이 입을 열었다.
"예의가 아닌 것은 알지만 소문의 실력이 궁금해서 이렇게 나왔습니다."
음, 얼굴은 아직도 비드와 비슷해 보이는 데 성격은 그와 완전히 달랐다.
전에 봤을 때는 잘난 척이 심한 것처럼 보였는데, 생각보다 예의가 있는 성격이었나.
대뜸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겠지?
그의 말에 살짝 시비를 걸어보았다.
"예의가 아닌 것을 아신다면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생각과 달리, 그는 넙죽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카를로스 기사에게서 내려온 왕국 검술이 제국 검술을 얼마나 버텨낼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습니다."
묘하게 거슬리는 사과였다.
잘난 척이 아니라, 제국에 대한 자긍심이 과한 거였나 보다.
뭔가 화를 내야 할 것 같긴 한데, 미리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고 시작하니, 화를 내기도 애매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같이 온 제국 소녀가 뒤쪽에 앉아서 이마를 짚고 있었다.
그나마 소녀 쪽은 정상인 건가.
저게 정상이면 지금도 신이 나서 내 앞의 소년을 응원하고 있는 동급생, 아니 매국노들은 제정신이 아닌 거겠지.
내가 싫다고 해도, 제국에서 온 남학생을 칭찬하다니.
얼굴이 꽤 잘생기고, 매너가 있고, 제국 백작의 아들이라는 위치도 좋긴 했지만, 그래도 제국인데!
그래도, 동급생들의 응원 덕분에 힘이 부쩍 났다.
저 응원에 찬물을 끼얹기 위해서도 기필코 눈앞의 소년을 박살 내기로 했다.
소년과의 대화를 끝내자, 심판을 보겠다고 한 여학생이 나섰다.
우리 가운데 선 여학생은 자신의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제 손수건이 바닥에 닿으면 시작하는 거예요. 모두 힘내주세요."
어디서 이상한 것을 많이 본 것 같았다.
그녀에게는 안타깝게도 기세를 올리고 있는 두 기사 사이에서 버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바로 손수건을 던졌고, 몸을 돌려 열심히 달아났다.
쨍그랑.
잠시 뒤, 검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대련이 끝났다.
제국 소년은 멍한 얼굴로 부러진 자신의 검을 보고 있었고,
구경하던 학생들과 다과회를 지켜보던 하녀들, 불쌍한 정원사는 넋을 놓고 쑥밭이 된 정원을 바라보았다.
대련으로 제국에서 온 손님을 상처 입힐 수는 없어서 그의 검을 부러뜨리는 것으로 대련을 끝낸 것이다.
요하힘 공자는 제국에 대한 자긍심이 너무 과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학생이었다.
그를 흠씬 두들겨 패는 대신에, 일을 벌인 사람들에게 벌을 내렸다.
그들에게 검을 휘두를 수는 없으니, 수도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정원을 박살 내는 것으로.
기사들을 꽃이 가득한 정원에서 싸우게 하다니, 대련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면 차마 하지 못할 생각이었다.
물론, 이 정원에도 작지 않은 공터. 잔디밭이 있었고, 그곳에서 싸움을 시작했지만, 기사들의 대련이 그 공터에서 끝날 리가 없었다.
검을 피하다가, 꽃밭을 헤집을 수도 있고, 검을 휘두르다가 나무를 자를 수도 있는 법이었다.
가까이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무사한 것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내가 그들을 피해서 요하힘을 잘 유인했거나.
정원이 박살 났지만, 나를 욕할 수는 없었다.
요하힘이 뒤집어놓은 꽃밭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요하힘이야 나를 상대하기에 정신이 없었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요하힘이 더 날뛴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제가 운이 조금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요하힘은 인상을 썼다.
직접 싸운 이상, 운으로 느끼기는 무리일려나.
비드랑 닮은 얼굴 때문에 시작할 때는 무척 긴장했지만, 긴장은 금방 풀렸다.
얼굴이 비슷하다고 실력이 비슷하지는 않았다.
물론, 요하힘이 실력이 없는 편은 아니었다.
그의 실력은 우리 학년 기사학부 중에는 상대할 사람이 없어 보였다. 하비에르 선배정도 되어야 어느 정도 비슷할 듯했다.
그 정도면 그 나이대에서는 정말 대단한 실력이었다.
단지, 내가 더 대단했을 뿐이었다.
지금도 이렇게 쉽게 끝날 정도로 실력이 차이 나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그의 검술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게 이렇게 차이를 만들었다.
상대의 검술을 알고 있다고 그렇게 차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 정교한 검술과 목숨을 걸고 여러 번 싸워봤는데, 그보다 어설픈 검술을 상대하는 게 어려울 리가 없었다.
다과회는 수없이 목이 잘려 나간 꽃들을 남겨두고 끝이 났다.
상속능력 학부의 첫 지명을 받았던 나는 그날 이후 지원 요청이 뚝 끊어졌다.
* * *
대련이 끝난 뒤, 아카데미로 돌아온 요하힘은 한 소녀에게 혼이 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죠?"
그 앞에서 낮 동안 조용했던 소녀가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거기다 싸워놓고 지다니요. 겨우 그 정도 실력밖에 안 되나요? 비드 아니, 버나드 경의 동생이?"
낮에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교환 학생 파울라였지만, 원래 그녀는 대귀족의 아들에게도 불같이 화를 낼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형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조심해야 할 말은 있었다. 요하힘에게 형인 버나드는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그런 사람이었다.
요하힘의 말에 파울라는 바로 화를 가라앉혔다.
화를 내는 것도 요하힘이 허락하기에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요하힘과 달리 조직에 어느 정도 몸을 담그고 있는 파울라였지만, 어린 아카데미 학생이 대귀족의 직위를 넘볼 수 없었다.
파울라는 말투를 바꿔서 그를 설득했다.
"그냥 평범한 교환 학생처럼 지내면 안 되나요? 뭔가 다른 걸 하라는 지시를 받지도 않았잖아요."
두 사람은 다른 이유 없이 교환학생으로 보내졌을 뿐이었다.
"그냥 교환 학생으로 다니면서 제 호위도 해주시는 거였잖아요. 저 같은 하급 귀족의 딸을 호위하는 게 그렇게 싫으셨던 건가요?"
다만, 문제가 생겼을 때 파울라를 보호하기 위해 실력이 좋은 기사 후보생인 요하힘이 뽑힌 거였고.
"그런 건 아닙니다. 명령받은 것들은 충실히 행할 거고요."
요하힘은 그런 지시를 거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 제발 좀 조용히 지내주세요. 그 자부심도 좀 내려놓고요. 아니, 이미 져버렸으니 내려놓을 자부심도 없으려나."
그래도 화가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은 건지, 파울라는 가시가 담긴 말을 끼워 넣었다.
"제발 부탁드려요. 저희 두 사람은 그냥 다른 계획을 진행하기 위해 겸사겸사 딸려서 보내진 인원이에요. 아카데미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뭔가 기대할 리도 없으니까요. 우리는 평범하게 교환 학생으로 지내다가 돌아가면 그만이에요."
무슨 일 때문에 딸려 보내게 된 것인지는 요하힘은 물론, 파울라도 알지 못했다.
다만, 가문을 떠난 둘째 형이 속한 파벌에서 이번 교환 학생 건을 진행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얼마나 힘센 파벌이었는지, 마치 번갯불에 콩을 구워 먹듯이 일이 진행되었다.
일주일 만에 왕국과의 협상이 끝나고, 담당자들과 학생들을 정해서 왕국으로 보낸 것이었다.
파벌에 속해 있는 형 덕분에 어느 정도 사정을 듣게 되었지만,
요하힘은 연락이 없는 형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어 계속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렇지만, 분풀이 겸해서 벌인 싸움 덕분에 할 일이 생겼다.
'알렉스 공자였었지.'
분명 싸움에서 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형과 대련에서 졌던 날, 거대한 벽에 가로막혔던 그 느낌을 그 정원에서 같은 나이대의 소년에게 느꼈다.
오랫동안 형에게서 연락이 없는 지금,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이 다시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 * *
제국에서 온 소년이 이상한 다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던 나는 약속한 대로 주말에 카트린의 본가에 방문했다.
그리고, 지하 연무장에서 그녀에게서 새로운 별명을 듣게 되었다.
"어서 와, 정원의 파괴자, 꽃들의 사신."
"놀리지 마시죠."
"놀리긴 무슨, 호위하러 갔다가 수도에서 제일 아름다운 정원을 뒤엎어 놓았는데……. 그 정도 별명은 귀여운 거야."
"제국에서 온 손님이 박살 낸 겁니다. 저야 괜히 휘말린 거고요."
"소문은 전혀 다르게 났던데? 네가 다 부셨다고."
제국 귀족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으니 내 탓으로 돌린 건가.
그래도 뒷말을 하는 정도였다.
직접 본 사람이 많아서 나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제국 귀족께서 다 부수는 걸 본 사람이 한가득이에요. 저는 도망치기 급급하다니까요."
"아니, 이겼다며. 네 실력을 내가 아는데, 분명 네가 끌고 다녔을 게 분명해."
확실히 내 실력은 카트린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괜한 걱정이었어. 너보다 너를 고른 학생들을 걱정해야 하는 건데."
그래도 다른 기사학부 학생들은 나와 다르게 제대로 고통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한번은 거쳐 가야 하니까."
걱정 섞인 목소리로 그들을 떠올렸던 카트린은 금방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보다 뭘 보여주려는 건데?"
가르치던 학생들도 걱정이었지만, 내가 보여준다고 했던 기술이 더 궁금했었던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빌려준 방패를 치켜들었다.
마나를 밀어 넣자, 방패 주변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점점 퍼져가는 아지랑이를 보고 카트린이 입을 딱 벌렸다.
"아니! 그것도 훔쳐 가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