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제15편 유물 수리
같은 옷을 입고 무도회를 열었던 곳에 다시 방문하는 것은 뭔가 묘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천천히 걸어서 도착한 집은 무도회 때처럼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아무 치장 없는 거대한 저택은 보고 있는 사람에게 위압하는 느낌을 안겨주었다.
많은 사람이 집 앞에 나와 기다리지도 않았다.
무도회 때 공주와 이야기를 나누던 늙은 귀족이 홀로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훌리안 데 카를로스 공국왕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는 내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공국왕의 집이라니. 그가 하는 인사 하나하나가 무척이나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집사로서 나를 맞이했지만, 작위를 가진 사람에게 편히 인사를 받을 수는 없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렉스입니다."
나도 집주인에게 하는 양으로 그에게 인사를 했지만, 그는 예의 있게 옆으로 물러서서 내 인사를 피했다.
"저한테 과한 인사를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대공녀께서 기다리십니다."
역시 예절로 무장한 귀족을 이길 방법은 없었다.
나는 그의 안내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저택은 무도회가 아니더라도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전에는 이 거대한 집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에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하지만, 공국을 다녀오고, 공국왕을 직접 보고 온 이상 다른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공국왕은 이 집에 돌아올 생각일 터였다.
아니, 이 집이 아니라 옆에 있는 왕궁으로 돌아올 생각이겠지.
이 저택을 지키고 있는 것은 그런 다짐을 지키기 위함일 테고.
그렇게 생각하니, 홀로 저택을 지키고 있는 눈앞의 늙은 귀족을 다시 보게 되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눈앞의 늙은 귀족도 평범한 집사가 아니었다.
잠시 뒤, 그 평범하지 않은 집사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왕을 직접 배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공국왕을 만난 것까지 알다니, 역시 평범한 집사가 아니었다.
"네, 돌아오기 전에 잠깐 뵈었습니다."
"그러시군요."
내 대답에 그가 멈춰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할 말이 있는 줄 알았는데, 벌써, 공주가 지내는 방 앞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방문을 두드렸다.
"알렉스 님이십니다."
안쪽에서 하녀가 문을 열었고, 그는 나에게 다시 고개를 숙였다.
"공주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뭔가 여러 의미가 담긴 인사였다.
지금까지 행동과 말 모두가, 정말 귀족답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본 귀족의 인사에 나도 손을 올려 대답했다.
공국왕을 부탁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의 인사에 충분히 대답할 수 있었다.
안쪽 응접실에는 대공녀가 소파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파 앞 테이블에는 여러 종류의 다과와 차가 이쁘게 늘어서 있었다.
딱 봐도 다과와 차에 정성이 느껴졌다.
벽 앞에 나란히 서 있는 하녀들은 조금 전까지 바쁘게 움직였는지, 얼굴이 벌겋게 되어 땀을 흘리고 있었다.
'확실히, 이게 제대로 된 준비겠지.'
귀족이 아닌 어머니에게서도 보지 못했고, 나를 내켜 하지 않는 공작부인들도 나를 만났을 때 이렇게 준비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공주나 발레아, 카트린도 나를 만날 때 이렇게 준비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조금 우울해졌다.
그동안 나는 평범한 여성들을 만나지 못했던 건가.
'아니, 내가 편했겠지. 분명 그래서 그런 걸 거야.'
"어서 오세요. 급하지 않으시다면 앞에 앉아서 잠시 저와 다과를 즐겨주세요."
나는 딴생각을 지워버리고, 그녀의 말을 따랐다.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확실히 편한 사람들과 같이 다녔던 모양이었다. 열심히 배웠던 예절이 입에 잘 붙지 않았다.
좀 더 긴장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대공녀는 그렇게 답답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대답하는 나를 보더니, 손을 흔들어 하녀들을 내보내려 했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나중에 부를 테니, 잠시 자리를 비워줘요."
대공녀의 지시에 나이가 지긋한 하녀 한 명이 나섰다.
"그래도 외간 남자분과 두 분만 있는 것은……."
대공녀의 말에 반대하는 나이가 지긋한 하녀라. 아마도 그녀를 오래 보아온 하녀장일 듯했다.
공국이긴 하지만, 공국왕의 딸을 보살피는 하녀장이라면 작위를 가지고 있을 테니.
따지고 보면 나보다 높은 사람이려나.
"괜찮아요. 아버지도 직접 보신 분이에요. 그리고, 나를 못 믿는 건 아니겠죠?"
대공녀는 한쪽 팔을 살짝 들어 올려 하녀장에게 보여주었다.
그녀의 팔에는 반지와 팔찌가 반짝이고 있었다.
'전부 유물이겠지.'
대공녀의 말에도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고, 다행히 이번에는 하녀장이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하녀장의 손짓에 하녀들이 방을 빠져나갔다.
"아플 때, 나를 돌봐주셨던 분이세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어머니처럼 모시는 분이시기도 하고요."
대공녀가 하녀장 대신에 그녀가 누구인지 이야기해 주었다.
조금 전, 하녀장이 그녀의 말에 반대한 것은 위치 때문이 아니라 정말 대공녀를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많이 힘드셨죠? 기사를 준비하는 분에게 왕궁 예절을 강요하는 것도 몹쓸 짓이에요. 저도 아픈 핑계로 많이 무시했었으니까요."
끙, 그래도 어느 정도는 괜찮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배운 사람에게는 표가 나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조금 뒤에는 다들 내보내야 하니까요."
대공녀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다과를 권했다.
"그래도, 열심히 차린 거니, 맛있게 드셔야 해요."
대공녀는 다과를 권하면서 아카데미에 대해 여러 가지 물어보았다.
며칠 뒤에는 그녀도 다녀야 했기에 물어볼 것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남자에다가 기사 학부라 많이 다를 텐데요."
내 말에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여러 사람 이야기를 들어두는 편이 좋으니까요. 공주님에게도 많이 물어보고, 발레아 양에게도 여러 가지를 들었어요. 정말, 상속능력 학부에 발레아 양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역시 발레아. 벌써 대공녀를 구워삶은 모양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아카데미에 대해 떠들어야 했다.
남자에 기사 학부에 외톨이인 내 말을 대공녀는 열심히 귀담아들었다.
이야기하다 보니, 1학기 동안 경험한 일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남들이 아는 정도밖에는 말할 수 없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대공녀의 눈이 달라졌다.
"공주님이 왜 그렇게 공자님을 믿는지 이제야 알겠어요. 아버지가 떠나시면서 하신 말씀도 이해가 되고……."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던 대공녀가 나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강해지신 거예요? 혹시 그 유물 때문인가요?"
그날 본 단검 이야기였다.
확실히 그 단검 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니, 대공녀가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대화가 길어졌어요. 너무 늦으면 곤란하실 테니, 이야기를 꺼낸 김에 유물을 봐 드릴게요."
드디어 본론이었다.
대공녀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대공녀의 상속능력 때문이었다.
"우선, 제가 유물을 봐주기 전에 한가지 약속해 주세요."
대공녀가 나를 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상속능력, 고장 난 유물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은 저희 아버지와 오라버니 정도만 아는 비밀이에요."
공국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그보다 더 있을 것 같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의 단도를 보고, 나도 모르게 말씀드린 뒤에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요. 그렇다고 한번 꺼낸 말을 무를 수도 없고……."
일국의 공주가 자신이 꺼낸 말을 무른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대신 비밀을 꼭 지켜주신다고 약속해 주세요."
그녀는 나에게 맹세를 부탁했다.
"가족에게도 공주에게도 비밀을 지켜주셔야 해요. 본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해 주실 수 있나요?"
신전에서 하는 맹세도 아니고, 입으로만 하는 맹세였다.
'서자'인 내게 명예는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고, 이 맹세는 내게 그리 가치 있는 맹세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명예 대신에 다른 것을 걸었다.
"죽음으로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값싸고 흔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내겐 다른 의미로 가치 있는 것이었다.
내 생각은 알지 못했지만, 대공녀도 맹세에 만족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아카데미에도 능력을 말하지 않으신 건가요?"
"유물을 파악하는 능력이라고 말해 두었어요. 제 능력에 포함된 능력이니 거짓말도 아니고, 그 능력만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으니까요."
머릿속에 그 능력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떠올랐다.
'그 능력만'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잘 사용하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대공녀의 말을 들으니, 그가 조금 안쓰럽게 여겨졌다.
딴 이야기는 금방 마무리되었고, 바로 준비를 시작했다.
"잠시만요."
대공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다과를 치웠다. 생각보다 한참을 이야기한 모양이었다. 차와 다과가 거의 다 비어 있었다.
테이블을 치우고, 대공녀는 손을 벌렸다.
"여기 위에 올려놓으시면 돼요."
"준비가 많이 필요한 것 같네요."
"평범한 유물이라면 그 자리에서 되는데요. 공자님이 가지고 계셨던 단검은 평범한 유물이 아니었어요. 제 능력으로도 쉽지 않아 보였으니까요. 아마 고치고 나서 며칠 고생할걸요."
그녀의 말에 나는 다시 고민했다.
생각보다 유물을 수리하는 게 어려워 보였다.
지금 내게는 단도보다 더 수리가 필요한 유물이 있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승부를 봐야 할 것 같았다.
"대공녀님도 제가 가진 유물을 비밀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유물을 수리하는 사람이 유물 주인의 비밀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처음부터 비밀로 해드릴 생각이었어요. 아버지에게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내 말에 대공녀는 바로 대답해주었다.
"아, 그리고, 대공녀 대신에 이름을 말해주세요. 제 이름은 프리다예요."
"네, 프리다 대공녀님."
대공녀의 말에 바로 이름을 말했다. 공주에게 해 본 경험이 있어서 쉽게 말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비밀로 해 준다고 했으니, 주머니 속에 넣어둔 유물을 꺼냈다.
"그렇게 커다란 걸 가슴에 어떻게 넣어 두었어요? 유물 가방인가요?"
구슬을 꺼내니, 대공녀는 유물 주머니를 바로 눈치챘다.
"그런데, 단도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단도를 꺼낸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구슬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세상에……. 맙소사……."
대공녀는 내가 꺼낸 구슬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대공녀는 한눈에 알아본 모양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유물인지.
"이런 상태에서 아직 살아있는 유물이라니."
아니, 그런 이유가 아니었나…….
한참 유물을 살피던 대공녀가 나를 노려보았다.
"너무 망가져서 무엇에 쓰는 유물인지 파악하기도 쉽지 않네요. 이걸 고쳐달라는 건가요?"
아니, 그렇기는 한데.
그렇게 말하면 혼날 것 같은 느낌이 대공녀에게서 마구 풍겨 나왔다.
떨떠름한 얼굴로 앉아 있으니, 대공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하지만, 무리예요. 제 실력이 모자라요. 돌아가신 어머니라면 가능하실 것 같은데……. 저는 아직 그 정도 실력이 아니라서."
대단한 유물이라서가 아니라, 너무 망가져서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려나.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니.
아예 망가지기 전에 대공녀가 구슬을 수리할 정도로 실력이 늘면 그만이었다.
"대공녀, 아니 프리다 대공녀님의 능력은 어떤 식으로 성장시키는 겁니까?"
내가 급하게 물어보자, 대공녀는 반사적으로 내 말에 대답했다.
"유물을 많이 접하고, 많이 수리하고 마나를 키우면 되는……. 아니,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하지만, 말을 채 마치기 전에 그녀는 다시금 나를 노려봤다.
아무래도 여기까지였다.
대공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이런 유물 말고, 어서 단도를 보여주세요."
나는 구슬 대신 단도를 건네주었다.
그날, 환한 빛과 함께 대공녀는 유물 하나를 고치는 데 성공했다.
대공녀는 마나가 고갈되어 며칠 동안 누워 있었고,
나는 다시 말이 트인 단검의 환상을 보게 되었다.
불새가 날개를 퍼덕이는 환상이 눈앞에 가득 펼쳐졌다.
[나는 용사님의 무기.]
[당신이 나의 새로운 주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