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제14편 귀환
제국의 한 고풍스러운 건물.
언제나처럼 건물 안쪽 집무실로 하얀 새가 날아들었다.
새의 다리에서 쪽지를 꺼내 확인한 집무실의 주인은 결국, 눈살을 찌푸렸다.
"일이 이렇게까지 잘못될 줄이야……."
대공녀를 납치하려고 했던 인원은 전멸했고, 공국에 깔아놓았던 조직은 책임자들이 모두 체포되어 더는 조직이라고 부르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차르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압력을 가해 보았지만, 방금 날아온 연락에 따르면 공국왕이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에게서 건네받은 쪽지를 확인한 집사장도 한숨을 내쉬었다.
"공국에 있는 연락망 전체가 망가졌습니다. 그들을 감옥에서 꺼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한참 동안은 훌리안 공국왕을 이쪽에서 통제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 정도면 한참 동안 못 꺼낸다고 봐야겠지. 공국에 있는 라인이 중요하니, 탈옥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고."
결국, 제대로 풀려나기 위해 시간을 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왕국 쪽 라인도 반 이상 망가졌고, 이번에는 공국이라니……. 어떻게 그쪽은 계속 일이 꼬이는 건지."
예언가가 왕국의 미래를 보지 못하게 된 이후일까, 아니면 예지가 어긋나기 시작한 10여 년 전부터일까.
제국과 다른 나라에서 진행된 계획들은 자잘한 문제는 있지만, 모두 지금까지 예언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만, 이제 미래가 보이지 않게 된, 카를로스 왕국은 준비해놓은 계획들이 모두 어그러지고, 깔아놓은 조직들도 망가져 버렸다.
거기다, 이제는 공국까지.
"다른 지부의 인원을 공국으로 돌릴까요."
그는 집사장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다른 곳들도 안 중요한 게 아니야. 바보가 아닌 이상 망가진 곳에 더 자원을 쏟아부을 수는 없지."
왕국도, 공국도, 깔아놓은 조직과 정보망이 망가져 버렸다. 이 망가진 조직을 다시 구축하려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지도 몰랐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곳에 멀쩡히 잘 돌아가는 다른 곳의 조직원들을 보낼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번 일이 잘못되어서 제국도 골치가 아프게 되었고."
이번 일로 제국 내부에서도 불만이 나오고 있었다. 조직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도 그의 월권에 대해 뭐라 하기도 했고.
"뭐, 공국과 카를로스 왕국에 비하면 별문제는 아니니."
그의 말에 총집사도 동의했다.
조직이 아니더라도 제국 안에서 주인을 제대로 건드릴 자는 몇 없었다.
다만, 총집사는 다른 문제가 걱정이었다.
"그보다 예언가님은 어떠신지……."
"언제나처럼 다시 금식 기도에 들어갔지."
그의 말에 집사장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기도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예언가님도 아실 텐데요. 상속능력으로 얻은 능력이지, 신이 내려준 능력이 아니잖습니까."
집사장의 말에 그는 슬쩍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보이던 미래가 보이지 않는데, 고칠 방법이 없게 되면 결국 신에게라도 비는 수밖에 없지."
"전부 안 보이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왕국 하나, 아니 공국까지만 안 보이는 것뿐인데."
카를로스 왕국만 보이지 않고 있지만, 그렇다고 단지 왕국 하나라고 말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금이야 카를로스 왕국과 홀리안 공국뿐이지만, 얼마나 더 보이지 않은 지역이 늘어날지 모르는 거고, 지금도 왕국과 공국이 연관된 일들은 예지가 흔들리는 모양이라……."
몇 년 전 카를로스 왕국에서 벌어졌던, 예언이 계속 변하는 일이 다른 곳에서도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왕국과 공국이 연관된 일이었고, 다행히 지금은 충분히 수습할 수 있지만, 언제까지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솔직히 예언자님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만……."
본인이 결국 기도를 하게 될 정도로, 조직에서 여러 가지 방법을 다 써봤었다.
그 많은 방법을 써도 안된다면 결국 그녀의 문제가 아닐 가능성이 컸다.
"몇 년 동안 이리저리 알아보기는 했는데, 별 소용은 없었지. 제대로 보고도 받지 못하고 조직이 망가져 버렸으니……."
결국, 조직이 망가진 탓에 정보를 얻기도 힘들어졌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으니……."
"그럼, 사람을 보낼까요."
내부 조직이 망가졌으니, 사람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겠지. 일을 벌이려는 게 아니니, 제대로 정보를 모을 수 있는 사람을 보내도록."
집사장이 눈을 깜빡였다. 그는 머릿속에서 사람들을 걸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문제가 생겼을 때 파악하기 쉽게 공식적인 인원으로 포장해서 보내."
단지 정보를 모으는 일이었다. 드러내놓고 움직여도 무방한 일이었다.
이렇게 하면 문제가 생겼을 때 적어도 누가, 언제 망가뜨렸는지 알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파견이나 유학 같은 방법으로 인원을 보내겠습니다."
"원인을 찾으면 좋겠어. 원인을 찾지 못해서 오래된 왕국을 지워버리는 일이 생기는 것도 곤란하니까."
집사장이 나가고, 그는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미래는 다가오고, 준비할 시간은 부족했다.
피를 흘리기로 다짐했건만, 미래가 보이지 않게 될수록 부담감은 더욱 늘어났다.
"나도 기도라도 해야 하나."
예언가가 왜 자꾸 기도로 도망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인류를 지키고, 제국을 수호하기로 다짐한 이상, 그는 한 걸음도 도망칠 수 없었다.
* * *
한바탕 습격을 받은 뒤, 가까운 마을에서 한차례 정비를 가진 우리는 다시 왕국으로 출발했다.
지키는 기사들도 죽고, 대공녀도 위험에 빠졌었으니, 다시 돌아갈 만도 했지만, 일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죽은 기사들은 교체되었지만, 하녀들과 고용인들은 모두 대공녀를 따라 움직였다.
다행히 왕국 기사 중에는 죽은 사람은 없었다.
공주가 탄 마차를 호위하며 달린 덕분이었다.
죽은 기사들은 모두 뒤에 남아서 싸운 공국 기사 중에 나왔다.
그들 말고도 병사 여럿이 죽은 것 같았지만, 나로서는 누가 더 죽었는지 알기 어려웠다.
공국으로 왔던 왕국 사람 중에 죽은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공주와 대공녀의 마차에 몰래 숨어들었던 다니에르 자작이었다.
귀인들의 마차에 숨어들었던 것도 불명예스러운 일인데다가, 죽음마저도 정체 모를 공격에 당해 마차에 떨어져서 죽게 된 어이없는 죽음이라, 일행 내에서는 여러 가지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주의 수행원으로 공국으로 파견을 갔다 온 자작의 죽음을 우스갯소리로 만들 수 없었다.
결국, 자작의 죽음은 공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은 훌륭한 죽음으로 포장되었다.
어쨌거나 같이 여행하던 사람이 죽었기에 모두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나도 그가 고국에 돌아가서 훈장을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에 그의 안식을 빌어주었다.
이리저리 뒤처리가 마무리되고, 다시 편안한 여행이 계속되었다.
공국의 국경을 지나고, 왕국의 여러 영지를 지나는 동안에 또 다른 습격이나 특별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공주의 귀환이나 대공녀의 유학은 아직 다른 영지에 알려지지 않았고, 공국과 왕국 사이에 난 대로는 영지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지나가기에 충분히 넓고 안전했다.
우리는 어느 영지에도 초대를 받지 않고, 왕국의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러 영지를 지나는 동안 대공녀는 주위의 풍광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공국과 그리 다르지 않았지만, 오래 아팠던 대공녀에게는 뭔가 달랐던 것 같았다.
모두 즐거운 여행이었지만, 나로서는 조금 불만스러운 여행이었다.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대공녀가 주기로 한 보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왕성 앞에 도착한 뒤에 우리들의 '파견 수업'은 끝이 났다.
책임자가 죽어버렸고, 파견 수업에 어울리지 않은 많은 일이 벌어졌고, 지체 높은 유학생도 따라오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공식적인 수업은 끝이 났다.
"그런데, 점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벤자민 선배의 말에 모두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파견 수업 점수를 줘야 할 사람이 죽어버렸다.
죽은 사람에게는 미안했지만, 학생들에게는 점수가 제일 중요했다.
"제가 다들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도록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같이 다녀오신 기사분들과 서기관분들이 도와주시면 될 거예요."
공주의 말이 아니더라도, 다들 고생을 같이했으니, 좋게 말해줄 게 분명했다. 분명하겠지?
"여러분 모두가 공국을 도와주셨으니, 저도 도와드릴게요."
거기다, 대공녀도 도와주겠다고 하니, 선배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점수도 점수지만, 공주와 대공녀의 눈에 든 것이 더 좋았던 것 같았다.
그렇게 마지막 대화를 끝으로 우리는 헤어졌다.
공주는 왕비가 있는 왕궁으로, 대공녀는 전에 무도회를 했던 저택으로 향했다.
선배들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공자님의 집에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은데요."
2학기 개학까지 일주일 동안, 발레아는 그레시아 공작의 수도 저택에 머무르게 되었다.
어차피 그녀는 내 손님이 아니라, 마누엘의 손님, 아니 공작부인의 손님이었다.
남작이 죽기는 했지만, 아들이 남아 있는 이상, 아직 공작부인의 집안과의 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정말 하루살이 같은 생활이에요. 동생, 아니 남작 대리가 연을 끊기 전에 하루빨리 독립해야 하는데 말이죠."
공주가 빌려준 마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동안, 발레아는 나를 보며 푸념을 했다.
내가 어쩌라는 말인지. 결혼을 할 것도 아니고.
어차피 대상 없는 푸념이겠지만, 나에게는 앉아 있는 자리가 무척이나 불편해지는 이야기였다.
집에 돌아오고, 나는 오랜만에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책을 읽고, 훈련하고,
남들이 보면, 쉬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지만, 나에게는 이것이 쉬는 것이었다.
책을 보는 것도 즐거웠고, 훈련을 하는 것도 즐거웠다.
공국에서의 경험이 나를 성장시키고 있었다.
책을 보는 순간에도, 검을 휘두를 때도, 그동안의 경험이 몸에 녹아 들어가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자, '그레시아 공작령'으로 파견 수업을 떠났던 마누엘 형이 수도로 돌아왔다.
형이 도착해 집에 들어올 때, 나는 오랜만에 격식에 맞춰 입고 집을 나서고 있었다.
"먼저 왔었군. 공국에는 별일 없었고?"
그는 나를 보고 격식을 갖춘 인사를 했다.
아직도 안 어울리는 인사였다.
평상시 같았으면 비꼬는 말로 시작했을 텐데, 집에 가서 공작부인에게 단단히 교육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형은 공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긴 지금 수도에 도착했으니, 들었을 리가 없었다.
대충 이야기를 알고 있는 집사와 하인들은 계속 나를 훔쳐보고 있었지만, 마누엘은 그런 분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쯧쯧, 교육만 열심히 받고 왔나 보네. 눈치는 그대로야.'
나는 나지막이 혀를 차고, 그에게 머리를 숙이고 집을 나서려 했다.
"또 어디를 가는 건데? 며칠 뒤에는 수업이 시작될 텐데, 그렇게 빼입고 돌아다녀도 돼? 공주님이 부르시는 것도 아닐 테고, 괜히 바람들었다가 나중에 고생할 거야."
이건, 비꼬는 건지, 걱정하는 건지, 가늠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나름 동생을 생각하는 거라고 좋게 생각해 볼까?
나는 좋은 뜻으로 그의 걱정을 덜어주기로 했다.
"대공녀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선물을 주신다네요."
내 말에 마누엘 형이 입을 쩍 벌렸다.
음, 내가 보기에는 지금 표정이 마누엘에게 훨씬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뭐라고? 대공녀? 대공녀가 수도에 있어? 너를 왜 부르는데? 선물은 또 무슨 소리야?"
질문이 계속 들려왔지만, 대공녀와의 약속에 늦지 않기 위해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고장 난 유물을 고칠 시간이 되었다.
내가 생각한 유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좀 더 친해지면 단검은 물론, 구슬도 수리해 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