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제11편 알현
외출 뒤에 대공녀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내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최대한 좋은 결정이 되도록 노력했으니, 이제 대공녀의 결정은 내 손을 떠났다.
거기다, 가장 껄끄러운 사람도 지워버렸으니, 이제 남은 일을 처리할 때였다.
나는 국경 경비대에 복귀하기 전에 한 사람을 더 만났다.
무척이나 만나기 싫은 사람이었다.
상대방도 나를 싫어했지만, 나는 그를 더 싫어했다. 나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다니에르 자작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자네가 나를 찾아올 줄 몰랐는데. 무슨 일인가."
나도 그를 찾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렇지만, 그밖에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며칠 전, 국경에서 소란이 일어났을 때, 성벽을 넘는 제국 기사들을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그에게 국경에서 소란이 벌어진 날, 성벽 위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검은 칠을 한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성벽을 넘고, 병사들이 못 본 척한 상황까지.
"……한심한 일이지만, 나하고는 관계가 없을 텐데. 선배 기사들이나, 공국 담당자에게 말하면 될 것 아닌가."
자작은 재미있게 내 말을 들었지만, 별로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당연히 그 일만이었으면 그에게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내가 그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그다음 이야기였다.
"제가 성벽을 넘은 기사들을 추적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내 말에 자작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게 사실이냐."
"네. 덕분에 늦게 복귀했지만, 다행히 다른 기사님들이 그냥 넘어가 주셨습니다."
"네가 국경을 넘으려 한 자들을 처치했다는 말은 들었다. 네가 쫓은 자가 그들 중 하나였나?"
내 생각보다 자작은 그날 있었던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국경 수비대에 간 기사들에게 자신들은 제1, 2 왕자와는 관련이 없다고 들었었다.
그렇지만, 자작에게 정보가 아예 안 넘어가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네. 다행히 몰래 쫓을 수 있었습니다."
"몰래 국경을 넘은 제국 기사들이 모여있는 장소를 알고 있다라……."
내 말에 그는 고민에 잠겼다.
조금 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내 말에 이득을 볼 게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욕심에 살짝 불을 지폈다.
"그들의 검술이 대공녀를 습격했던 자들과 비슷했습니다. 제국 검술은 모르지만, 그날 밤 국경을 넘었던 기사들이 대공녀를 습격했던 자들과 한패일 가능성이 큽니다."
용병 검술과 기사 검술이 같을 리도 없고, 비드의 검술도 기사들의 검술과 달랐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한패인 게 확실했다. 나는 거리낄 게 없었다.
거기다, 내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자작에게는 아무 상관 없었다.
제2 왕자의 심복이자 책사라는 그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두 일을 하나로 묶어 사실로 만들 수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찾아온 것도, 먼저 기사들을 못 본 척한 병사들 이야기를 꺼낸 것도 이해가 되는군."
자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네가 아는 정보를 알릴 만한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지? 병사들이 그렇게 썩었으니,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도 위까지 올라가지 않을 테고."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내 말에 자작은 처음으로 만족한 얼굴이 되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공국 쪽은 누가 내통자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병사들을 풀어준 기사들도, 용병과 비드를 풀어준 서기관들도 모두 믿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공주나 하비에르 선배를 통해 대공녀에게 말을 할 수도 없고,
벤자민 선배에게 부탁할 수도 없었다.
벤자민 선배에게 말할 바에는 눈앞의 자작에게 말하는 게 더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것보다 자작은 공국과 협상 중이었다.
제2 왕자의 밀명으로 그는 공국왕과 직접 만나고 있었다.
제대로 일을 진행하려면 공국왕에게 직접 말할 수 있는 그밖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내가 말한 것 같은 좋은 협상 거리가 필요했다.
"좋다. 내게 위치를 알려 주면 공국에 전달해주지."
고민 끝에, 그는 내 이야기를 협상 재료로 쓰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고마운 일이었다. 솔직히 그가 아니면 대안이 없었다.
"생각보다 머리가 좋은 놈이군. 나도 그런 놈은 싫지 않아. 본국에 돌아가서도 기억해 놓겠다."
그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나를 싫어했던 그로서는 대단한 칭찬이었겠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조금 미안했다.
내가 벌인 일에다, 지금 이야기까지 전하면 이번 협상은 잘 마무리될 게 분명했다.
그래서 자작이 저렇게 좋아하는 거였고.
하지만, 나는 아직 자작이 나를 죽이려고 했던 것을 잊지 않았다.
당연히, 자작이 성공하는 꼴을 보고 있지도 않을 거였고.
협상이 좋게 끝나, 결과를 가지고 왕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당사자가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공국에서 왕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무척 멀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자작에게 기사들이 모여있는 여관의 위치와 여관에 모인 검은 기사들의 숫자를 알려 주었다.
자작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왕궁으로 향했다.
나는 이번에는 다른 곳에 들리지 않고, 국경 수비대로 돌아갔다.
기사들은 공주와 대공녀의 외출 때 벌어진 사건에 놀라워했지만, 그 사건은 오늘 벌어진 많은 일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무척이나 긴 하루였다.
나는 복귀한 뒤에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그 뒤로 평범한 시간이 흘렀다.
성벽 위에서 경계를 서고, 기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가끔 심부름하며 시간을 보냈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사고도 없었고, 몰래, 국경을 넘는 사람도 없었다.
문제는 여관에 모여있는 검은 기사들이 체포되었다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나에게 사람이 찾아왔다.
왕궁에서 보낸 기사였다.
"국왕 폐하가 찾으십니다."
"네?"
반문하는 내 얼굴은 무척이나 멍청해 보였을 거다.
다행히 다른 기사들은 공국왕이 나를 불렀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다들 왕궁에서 불렀다는 말에 공주가 불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아카데미 제복을 다시 확인하고, 기사를 따라 왕궁으로 향했다.
왕궁에 도착한 뒤에 집사장으로 보이는 귀족이 왕궁 예절에 대해 꼼꼼하게 설명했다.
다행히 공국의 왕실 예절은 카를로스 왕국과 거의 비슷했다. 이미 왕국에서 한번 경험해 봤기에 쉽게 익힐 수 있었다.
물론, 왕비를 보는 것과 공국왕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지만.
알현실까지 가는 동안, 아는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공주도 대공녀도, 발레아와도 만날 수 없었다.
집사장의 안내를 받아, 잠시 뒤에 알현실에 도착했다.
커다란 문이 열리고, 큰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화려한 알현실에는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멀리 앞쪽 단 위에 한 사람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왕관을 쓴 건장한 중년 남자.
무섭게 생긴, 아니 카리스마 있게 보이는 저 남자가 바로 이 공국의 왕이었다.
"왕께 인사드립니다. 알렉스입니다."
나는 손을 가슴에 올려 기사의 예절로 그에게 인사했다.
왕이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살기는 없지만, 저 덩치와 얼굴이 쳐다보니, 절로 마나가 일어날 것 같았다.
내가 마나를 꾹꾹 누르는 사이, 공국왕이 입을 열었다.
"그레시아 공작의 아들이라고."
"네."
"그리고, 서자고."
공국왕이 이어서 꺼낸 말에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공주의 호위라고 해도 내가 왕립 아카데미 학생을 부를 이유는 없지."
내가 지금 제일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내가 왜 공국왕에게 불렸는지.
안내하는 기사도, 집사장도 내 물음에 답해주지 않았다.
솔직히 그들도 모르는 눈치였고.
"그런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들려오더군."
그러니까, 그 재미있는 이야기가 뭐냐고요.
"제2 왕자와의 협상에서 다니에르 자작이 네 이름을 꺼내더군."
네? 자작이 말했다고요?
"공국에 숨어 들어온 제국 기사들이 숨어 있는 장소를 알려 준 예비기사라고 하던가."
자작은 왜 이야기 한 거지?
"자신이 지시해서 알아냈다고 말을 하긴 했지만, 내가 왕국 상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제2 왕자의 심복이 공주의 호위에게 일을 맡길 리가 있나."
아, 왜 자작이 내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 것 같았다.
자작은 일이 잘못될 것을 대비해서 나를 걸고넘어진 것이다.
자작은 문제가 생기면 내 탓으로, 잘되면 지시를 내린 자신 탓으로 돌릴 생각이었다.
그에게는 아쉽게도, 공국왕이 우리 왕국의 사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것도 평범한 호위도 아니고. 왕비가 직접 아카데미에 입학시킨 호위인데."
아니, 그냥 잘 아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동안 재미있는 일을 많이 벌였더군. 실력도 대단하고. 얼마 전 국경 밖에서 죽은 제국 기사 놈들도 자네가 처리한 것 같던데."
기사들만 아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설마 시체를 보고 알았던 걸까?
나는 슬슬 겁이 났다.
설마, 비드를 죽여서 숨겨놓은 것도 아는 것은 아니겠지?
"네가 알려 준 정보도 좋은 정보이긴 하지만, 함부로 쓸어버리긴 힘들어. 왕국인인 네가 들을 말은 아니지만, 이리저리 연결된 놈들이 한둘이 아니야. 거기다 제국과 할 일도 있었고."
연결된 놈이 많아서 내가 자작에게 말을 한 거였다.
그나저나 제국과 할 일은 무엇일까.
설마, 왕국의 차기 왕이 되는 것을 지원해 달라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그런데, 제국 놈들이 원하는 게 내 생각과 다른 모양이야. 감히 내 나라, 내 백성에게 그런 행패를 부리다니. 제국 놈들은 왕국보다 내 딸이 더 중요한 걸까?"
공국왕이 얼굴을 찡그렸다. 전보다 더 무시무시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공국왕이 진짜 화가 난 것 같았다.
상점가에서 벌어진 일이 죽기 전보다 훨씬 상황을 악화시킨 모양이었고,
"거기다, 기사들까지 불러들이다니."
내가 바꾼 것들이 일을 더 키운 것 같았다.
"기사 놈들은 내가 필요한 때에 정리할 테니, 알렉스 너는 다른 일에 더 신경을 쓰도록."
다른 일? 아니 그보다 갑자기 말투가 달라지신 것 같은데.
"알렉스 너도 아이샤가 왕위를 가져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
갑자기 공국왕이 다른 말을 꺼냈다.
"그 쓰레기 같은 조카 놈들은 왕이 될 놈들이 절대 아니고."
거기다, 왕자들을 욕하다니.
여태까지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지금은 더 무슨 대답을 하기가 힘들었다.
"서자인 너는 알지도 모르지. 동생이라 왕이 되지 못한 내 마음을."
아뇨. 모르는데요. 알고 싶지도 않고요.
"그래도 아직 형님이 죽지 않았으니, 조금 두고 볼 생각이야."
계속 두고 보시면 안 될까요.
공국왕이 늘어놓는 말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일개 서자한테 할 말이 아니었다.
"이번 일로 제국에 실망이 커. 딸도 보호해야 할 것 같고. 그래서 이번에 너희들이 돌아갈 때, 내 딸도 같이 왕국으로 유학을 보낼 생각이다."
아니, 갑자기 뜬금없는 말이 들려왔다.
하지만, 공국왕의 말은 내가 원하던 최고의 말이었다.
'나이스!'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울렸다.
공국왕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공국왕이 무슨 말을 하든지 최선을 다해 들어줄 생각이었다.
"알렉스, 네가 아카데미 안에서 아이샤를 호위하고 있으니, 그동안 내 딸도 겸사겸사 봐주면 될 것 같고."
아니, 취소다.
이건 들어주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공주도 힘들어 죽겠는데, 거기다 대공녀라니.
공국왕은 분명 카를로스 왕국의 다음 대 왕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왕립 아카데미에서 그의 딸을 호위하라고?
항상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지만, 이건 정말 아니었다.
나는 공국왕 앞에 서서 자살을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