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제8편 두 번째 외출 (1)
예상대로였다.
내가 추적하던 검은 기사는 성벽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넘어갔다.
그는 성벽의 튀어나온 부분을 밟으며 성벽 위로 올라갔고, 지키고 있는 병사들 옆을 지나 반대쪽 성벽 너머로 뛰어내렸다.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기사가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것을 무시했다.
나도 앞선 검은 기사처럼 성벽을 넘어갔다.
이번에도 병사들은 모른 척했다.
대신 나는 나를 외면한 병사들의 얼굴을 모두 기억해 놓았다.
지금은 바빠서 그냥 지나가지만, 나중에 정 안 되면 투서라도 넣어볼 생각이었다.
"어, 뒤에 넘어간 사람은 옷이 다른 것 같던데……."
"신경 쓰지 마. 지금도 일이 꼬여서 난리인데, 괜히 이것저것 따지다가는 일만 커질 거야."
"아니, 왕국 기사 놈들은 왜 난리를 쳐대서."
"왕실 기사들이라잖아. 상속능력을 가진 귀족들이시니 눈도 좋겠지."
"……분명 기사들과 같이 온 아카데미 학생이라는 녀석의 옷과 비슷했는데."
병사 중 하나가 내 옷을 보고 의아해했지만, 결국, 나도 앞서간 검은 기사처럼 성벽을 넘을 수 있었다.
검은 기사는 성벽을 넘어 도시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밤,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성벽이 소란스러워졌지만, 밤거리를 순찰하는 병사들은 보이지 않았고, 기사는 사람 없는 거리를 빠르게 달려 나갔다.
거리가 텅 빈 덕분에 나도 쉽게 기사를 따라갈 수 있었다.
기사는 미리 길을 알아 왔는지, 거리의 뒷길을 따라 달려 나갔고, 나는 건물 지붕을 뛰어넘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기사는 그를 따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중간에 길을 빙빙 돌기도 하고, 같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지붕 위에 엎드려있는 나를 찾지는 못했다.
기사가 그렇게 조심을 하면서 결국 도착한 곳은 한 허름한 여관이었다.
기사는 크기는 널찍했지만, 낡은 이층 건물의 뒷문을 두드렸고, 누군가 안에서 눈구멍으로 그를 확인한 뒤에 문을 열어주었다.
기사는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반대편 건물 지붕에 누워 새벽까지 여관을 감시했다.
총 13명. 여관으로 온 갑옷을 검게 칠한 기사의 숫자였다.
몇 명은 전투를 겪었는지 갑옷에 상처가 나 있었고, 큰 상처를 입은 기사도 보였다.
집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다시 나오지 않았다.
비밀 통로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거기다 여관 지하에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이곳이 검은 기사, 아니 대공녀를 납치하려는 자들이 모이는 곳이 분명했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나는 경비대에 복귀했다.
오늘의 목적은 전부 달성했다.
넘어오는 기사들의 숫자를 줄였고, 적들이 모이는 곳도 확인했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였다.
지금도 아슬아슬했다. 더 일을 벌이면 계획이 틀어질 수 있었다.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 전에 복귀하자, 기사들이 나를 반겼다.
다들 많이 걱정한 것 같았다.
내가 성벽 아래로 내려간 뒤에, 잠을 자던 다른 기사들도 다 뛰쳐나왔고,
뛰쳐나온 기사 일부는 내 이야기를 듣고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성벽 앞을 수색하다가 나 대신 검은 기사들의 시체를 찾았고, 내 걱정에 왕궁으로 사람을 보내야 하나 고민 중이었다.
"죽은 줄 알고 걱정했잖아. 곳곳에 제국 기사 시체가 널려있는데 너는 안 보이고."
기사들은 내가 검은 기사들을 죽인 것을 알게 된 듯했다.
하기야 지나가던 용사가 처리한 게 아니라면 성 밖으로 뛰어내린 나밖에 죽일 사람이 없었다.
제국 쪽에서 몰래 검은색으로 칠한 갑옷을 입고 국경을 넘으려는 기사라면 제국 기사밖에 없었고,
내가 제국 기사들이 국경을 넘는다는 것을 알리고, 기사들 일부를 죽이기까지 한 것이다.
이곳에 있는 기사 중에 이런 공적을 세운 예비 기사를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아니, 다른 명령을 받은 게 있으면 미리 이야기해주면 오해 안 하잖아."
"그렇지, 덕분에 열심히 일하는 기사를 갈군 게 돼버렸잖아."
'아니, 미리 말했을 텐데요.'
물론, 제대로 말해 두었는데, 안 들은 것은 눈앞에 있는 기사들이었다.
물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나도 그리 떳떳한 것은 아니었기에, 할 말을 입 안에 담아두었다.
다른 명령을 받은 적도 없고, 조금 전까지는 근무지를 이탈했었다.
공국과 왕국을 위해서 한 일이었지만, 상명하복의 군대에서 할 일은 아니었다.
물론, 제국 기사가 지나가는데도 모른 척하는 병사들만큼은 아니었지만.
다른 일들은 계획을 세웠지만, 그런 내통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왕국인인 내가 끼어들어서 뭐라고 해도 되는 건지, 끼어들더라도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 건지.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골치만 아플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우선 병사들의 일은 뒤로 제쳐놓았다. 그보다 급한 일들이 많았다.
날이 밝자, 국경 수비대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전례 없었던 대규모 인원이 국경을 넘으려고 시도한 사건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밀매업자가 아니고, 갑옷을 입은 기사급 월경자였다.
국경을 넘으려던 자 중에 사망자도 여럿 나왔고, 그 와중에 성벽을 넘은 자들도 있었다.
그중에 제일 문제가 되는 건, 이 일을 발견하고 검은 갑옷 기사들을 죽인 게 카를로스 왕국에서 파견을 나온 기사들이라는 점이었다.
행정부에서 나온 서기관들과 왕궁에서 나온 기사들이 근무를 섰던 병사들에게 심문에 가까운 보고를 받았다.
나와 왕국 기사들도 여러 번 보고를 했다.
다행히 내가 한 일은 기사들이 모두 덮어주었다.
기사들은 마치 나를 비밀 지령을 받고 온 스파이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덕분에 그 뒤로 나를 터치하는 기사는 없어졌다.
하지만, 내가 한 거짓말이 들키기라도 한다면 상급자 기만으로 바로 감옥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잊지 말고 공주님께 꼭 말해 둬야지.'
믿을 건 공주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끄러운 하루가 지나갔다.
행정부에서 나온 서기관들은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돌아갔고, 왕궁에서 온 기사들은 시체들을 가져갔다.
우리와 병사들은 다시 원래 부대로 복귀했다. 무사히 돌아온 병사 중에는 기사들을 그냥 지나가게 한 병사들도 있었다.
겨우 원래대로 돌아온 다음 날.
나는 '공주님의 지시'로 왕궁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호위 대신 국경 수비대로 가겠다고 했을 때 했던, 아이샤 공주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특별한 상황에서는 호위하러 돌아오겠다는 약속. 바로 오늘이 그 특별한 상황, 공주의 외출이 있는 날이었다.
무슨 일인지, 왕국 기사들에게 경비대를 벗어나지 말라는 지시가 다시 내려왔지만,
나는 외출하는 공주를 호위하기 위해 아침부터 왕궁으로 달려갔다.
* * *
같은 시각.
여관 지하에서는 작전을 계획대로 진행할지 다시 한번 확인을 하고 있었다.
"괜찮겠습니까? 예상과 달리 합류하지 못한 기사들이 있습니다."
여성의 말에 용병대장 엔시오가 대답했다.
"문제없습니다. 이번 일은 기사들이 참여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우리가 기사님들 몫까지 제대로 해내겠습니다."
"경계가 심해졌을 수도 있어요."
여성은 성벽에서 있었던 소란 탓에 호위가 더 엄중해질 걸 걱정했지만, 엔시오는 오히려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 호위들을 다 때려눕히면 더 효과가 있겠죠. 사람을 더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러면 비드님이 더 화려하게 등장하실 수 있을 겁니다."
비드가 있다는 엔시오의 말에 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작전은 원래대로 진행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대신, 너무들 흥분하지 않게 하세요. 죽은 기사들이 있어서 모두 흥분한 것 같던데."
"네, 주의하겠습니다."
여성의 마지막 당부는 엔시오의 귀에는 닿지 않은 것 같았다.
엔시오는 여성에게 인사를 한 뒤에 힘차게 방을 빠져나갔다.
* * *
며칠밖에 안 지났지만, 오랜만에 공국의 왕궁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왕궁 앞에서 마차들과 함께 멍하니 아름다운 왕궁을 바라보았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은 하비에르 선배였다. 선배는 왕궁에서 지낸 덕분인지 얼굴이 반짝거렸다.
선배는 마차 옆에 서 있는 나를 보자, 빠르게 달려왔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그도 성벽에서 벌어진 일을 들었나 보다.
나는 내 활약을 빼고, 이틀 전 밤에 벌어진 일을 알려주었다.
"우와! 내가 같이 있어야 했는데."
그는 내 말에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공주님 호위 대신이요?"
"……아니, 그건 아니고."
하지만, 이어진 내 물음에는 고개를 저었다.
왕국에서 지내는 것이 무척이나 좋았던 것 같았다.
"알렉스 공자님이다! 소식 들었어요!"
하비에르 선배 다음으로 나온 것은 발레아였다.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나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성벽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하비에르 선배가 나 대신 발레아에게 열심히 이야기해주었다.
하지만 발레아는 선배의 말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선배의 설명을 모두 들은 그녀는 내 옆에 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모두 말해줘야 해요."
나중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도 발레아에게는 어느 정도 말해줘야 했다.
어디까지 말해줘야 할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녀 말고도 고민해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공주가 대공녀와 함께 마차 앞으로 다가왔다.
화사한 외출복을 입은 두 사람은 오늘 외출을 무척이나 기대하는 것 같았다.
대공녀는 공주와 외출하는 것이 즐거운 것 같았고,
공주는……. 나 때문이려나.
"이틀 전 소란 때문에 외출이 안 될뻔했어요. 공주님이 가고 싶다고 계속 말씀하신 덕분에 이렇게 가게 된 거예요."
옆에서 발레아가 소곤거리지 않아도, 공주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공주가 외출하는 이유 중에는 내 몫도 상당히 들어있을 듯했다.
내 앞에 선 공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었는지 제대로 알려줘야 해요. 어제부터 이상한 이야기가 들려왔어요."
이크. 벌써 보고가 올라간 건가.
하기야, 이 파견 수업은 공주를 수행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공주 핑계를 댔는데 보고가 안 갈 리가 없었다.
"네, 확실히 설명하겠습니다."
내 대답에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고, 대공녀는 신기한 얼굴로 나와 공주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며칠 전의 일은 잘 마무리되었고, 핑곗거리도 많이 있어서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얼버무려야 할 일들이 꽤 남아있었다.
제발 오늘 일이 잘 마무리되어서, 거짓말이 조금 줄어들기를 바랄 뿐이었다.
사람들을 태운 뒤, 마차가 출발했다.
외출을 떠나는 인원은 죽기 전과 비슷했다.
하비에르 선배가 추가되었고, 전처럼 왕국의 기사들은 참여하지 못했다.
나는 왕국 기사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된 일에 일부러 딴지를 걸지 않았다.
대공녀의 마음이 움직이려면, 대공녀의 외출은 죽기 전과 같은 모습이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