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제7편 국경 수비대 (2)
며칠 뒤.
나는 다른 기사들과 함께 성 위에 올라와 있었다.
오늘은 내가 다른 기사들과 함께 경계를 서는 날이었다.
원래는 오늘이 아니었지만, 공주 핑계로 오늘로 바꾸었다.
기사들에게 처음 양해를 구할 때도 그렇고, 허락도 받지 않고 공주의 이름을 남발하는 느낌이 있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좋은 결과를 내서,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결론이 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성 위에 올라온 것도 그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오늘이 바로, 죽기 전 하이베르 선배에게 들었던 사람들이 가장 많이 국경을 넘은 날이었다.
오늘 밤. 민간인으로 보이지 않는 자들이 이 성벽을 넘어 공국으로 숨어들 터였다.
같이 경비를 서게 된 기사들이 멀리 성벽 밖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가 된 뒤에도 이렇게 성벽 위에서 경계를 서게 될 줄이야……."
"그전에는 서봤었어?"
"사고를 친 뒤에 아버지에게 걸려서 몇 번 서보기는 했지. 작은 영지라서 경계하는 병사들하고 몰래 사냥을 나가기도 했고."
"걸릴 만했네."
"그런데 왕실 기사가 되어서 이렇게 공국의 성벽 위에서 병사들처럼 경계를 보게 되다니……."
"제국을 지켜보는 건 별다른 바 없잖아."
"남의 나라를 지키는 거잖아."
공국 병사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기에 나와 같이 경계를 서는 기사들은 해가 지고 별이 뜰 때까지 잡담을 나누었다.
대부분 지금 상황에 대한 불만이었지만, 그 가운데 내 이야기도 끼어있었다.
"어이, 후배."
"네."
잡담을 나누던 덩치가 있는 기사의 물음에 나는 착실히 대답했다.
"일을 빼는 것도 아니고, 실력도 좋으면서 왜 자꾸 선배들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거냐?"
음, 애매한 칭찬이자, 꾸짖음이었다.
"그러게 말이야. 성격도 나쁘지 않고, 솔직히 서자이긴 하지만, 그레시아 공작 아들이잖아. 조금만 덜 나대면 대충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옆에서 거드는 기사도 비슷한 말을 했다.
며칠 동안 열심히 기사들과 움직인 덕분이었다.
공주라는 배경을 대놓고 드러낸 다음, 생각 외로 열심히 할 일을 하니, 반대로 기사들에게 호감을 산 것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건들지 말라고 선언을 한 덕분에 기본적으로 재수 없게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첫날보다는 사이가 괜찮아졌다.
덕분에 오늘 임무를 바꾸어달라는 것도 선임 기사와 담당자가 쉽게 허락했다.
같이 경비를 서는 두 기사도 지금 내게 나름대로 조언 아닌 조언을 하는 중이었다.
"솔직히 우리가 아니면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거야."
덩치 기사의 말에 다른 기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온 기사들 외에는 대부분 어느 한쪽 파벌에 든 기사들이지. 권력과 계급을 맹신하는 녀석들이라 서자라는 말을 들으면 바로 외면할걸."
"맞아. 파벌이 아니라 왕국에 충성하는 왕실 기사는 몇 안 남았지."
"파벌에서 안 받아주는 게 아니고?"
"뭐, 실력도 애매하고 가문도 애매한 나 같은 놈도 있지만, 선임 기사는 그런 게 아니잖아."
"뭐, 선임 기사님은 부 기사단장님을 따르셔서 그런거고."
내 이야기를 하다가, 어이없게도 기사단의 파벌 이야기로 넘어가 버렸다.
이곳에 있는 기사들을 유적에서 못 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유적에서 본 기사들은 제1 왕자 쪽 기사들이었고, 일부는 제2 왕자 쪽 기사들 일터였다.
왕자들이 그런 일에 파벌이 없는 기사들을 참여시킬 리가 없었다.
파벌이 없는 기사들이라.
뭔가 이들을 써먹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전 같았으면 내일이 아니라고 관심도 두지 않았을 대화였다.
하지만, 나는 죽기 전에 결심한 것이 있었다.
며칠 전에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했는데, 바로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나는 기사들의 이야기를 머리에 담아두었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말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기사들의 잡담도 끝이 났다.
밤이 깊어지자, 구름이 가득 몰려와 하늘을 가렸다.
성벽 위로는 횃불이 비치고 있지만, 성벽 아래는 병사들에게는 보이지도 않을 것 같았다.
'지금인가.'
슬슬 멀리 퍼트린 마나에 뭔가가 하나둘씩 걸려들었다.
최대한 멀리 퍼트려서 정확한 파악은 어려웠지만, 내 마나와 충돌한 것은 마나를 가진 무언가였다.
지금 이곳에 마물이 튀어나올 리도 없고, 예상했던 자들이 분명했다.
나는 성벽 끝에 붙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나를 눈에 밀어 넣자, 멀리, 제국 쪽에서 달려오는 사람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들은 나와 기사들이 경계를 서는 성벽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공국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곳이었다.
"설마, 이것도 미리 정보가 넘어간 걸까?"
"무슨 말이야?"
내 모습을 보고, 다른 기사가 다가와 물었다.
나는 손을 들어, 달려오는 자들을 가리켰다.
"잘 안 보이지만, 사람 같지 않나요?"
"뭐가 보인다고?"
기사의 눈이 흐릿하게 빛이 흘렀다.
잠시 뒤, 그는 주위를 보며 고함을 질렀다.
"비상! 용병, 아니 기사급 월경자다!"
그의 외침에 다른 기사들도 달려와 확인했다.
비상이라고 외치는 기사들이 늘어나고, 결국, 성벽 위로 타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달려 나가고, 병사들이 허둥지둥하는 것을 보며, 나도 슬슬 움직일 준비를 했다.
'자, 일차 방해는 성공한 것 같고.'
하지만, 경계를 올린 정도로는 시간만 조금 번 것에 불과했다.
시간 말고 숫자를 줄여야 했다.
"지금부터 단독 행동을 하겠습니다. 처음에 자리를 비울 수 있다는 말을 꺼낸 것도, 오늘 임무를 바꾼 것도 지금 같은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치 위에서 지시했다는 듯이 말을 하고는 바로 성벽 밖으로 뛰어내렸다.
"어……. 잠깐!"
뒤에서 기사가 놀란 듯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벽을 타고 내려가는 나에게는 스쳐 가는 바람 소리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나중에 누가 지시했느냐로 복잡해질 수도 있겠지만, 그걸 파악하기 전에 일을 끝내놓을 생각이었다.
정 문제가 되면, 다시 한번 공주에게 부탁하는 방법도 있고.
성벽을 타고 내려가며, 나는 들고 있던 아카데미 검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대신, 주머니에서 단검을 꺼냈다.
어두운 밤, 수풀이 우거진 성밖에서는 단검보다 유용한 무기가 별로 없었다.
다행히 입고 있는 아카데미 제복은 반짝거리는 금붙이가 달리지 않았다.
나는 소리 없이 성벽 아래에 내려섰고, 이어서 감각에 걸린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나는 달리면서 내 모습을 하나둘 숨기기 시작했다.
'마나를 가라앉히고.'
다른 사람이 내 마나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마나로 발을 감싸고."
이렇게 하면 발소리를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몸을 숙이고, 몸의 움직임도 줄이고, 단검에 마나도 흘리지 않고, 눈에 마나도 넣지 않았다.
어느덧 나는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마치 한 명의 암살자 같았다.
어렸을 때 암살자를 경험한 뒤에,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 차근차근 훈련했었다.
지금까지 쓸 일이 없었지만, 지금의 나는 빛이 없는 곳이라면, 어렸을 때 보았던 암살자보다 더 조용히 움직일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젖은 땅을 지날 때도, 수풀을 넘을 때도 바람 소리만 들려왔다.
그렇게 달려가자, 어느새 처음 목표한 사람에 다가갈 수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상대의 정확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상대는 검은색으로 칠을 한 갑옷을 입은 기사였다.
죽기 전에 보았던 바로 그 갑옷이었다.
빙고.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죽기 전 하비에르 선배의 말을 듣고 생각한 대로였다.
제국의 기사들이 정식 통로를 통해 공국으로 들어왔을 리가 없었다.
일이 있기 전에 국경이 소란스러웠다면 그곳으로 기사들이 넘어왔을 가능성이 컸다.
물론 100% 확실한 것은 아니어서 조금 걱정했지만, 지금 내 눈으로 확인했다.
확인했으니, 답례를 해줄 차례였다.
스슥.
거리가 가까웠지만, 아직도 상대는 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보다 시끄러워진 성벽이 더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바로 앞까지 다가온 상대를 보고 단검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억, 누구?"
그제야 상대는 주변에 누가 있는 줄 알아차렸다.
이미 늦었다.
내 검은 이미 그를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푹!
단검이 닿기 전에 검기가 갑옷의 틈으로 밀고 들어갔다.
투구와 흉갑 사이의 작은 틈으로.
"헉."
작은 신음과 함께 검은 기사가 허물어졌다.
'하나.'
나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다행히 내 기술은 기사에게도 잘 통했다.
마나를 움직이면 바로 들키지만, 그전까지는 최대한 숨을 수 있었다.
'아쉽네. 마물도 통했으면 훨씬 편했을 텐데.'
사람하고 마나를 감지하는 방법이 달라서 숨는 방법도 달라야 했다.
방법을 찾아보고 있지만, 마물 상대로는 남들보다 조금 더 잘 숨는 정도밖에 안 되었다.
솔직히, 욕심일 뿐이었다.
'둘.'
지금은 이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뒤에서 뛰어들어 목 뒤에 검을 꽂은 뒤, 나는 다른 목표를 찾아 달렸다.
'셋.'
숫자가 늘어나니, 조금씩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세 번째 목표는 조금 먼 곳에서 나를 알아차렸다.
덕분에 상대를 처리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고,
몇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네 번째는 상대의 검과 부딪쳐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 덕분에 다섯 번째 상대와는 아예 제대로 붙어야 했다.
결국, 다섯 명을 끝으로 암살을 끝내야 했다.
성벽을 향해 달리던 기사 중 하나가 큰소리로 외친 것이다.
하기야 이미 들킨 뒤였으니, 조용하게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적이 있다! 모두 산개! 목적지에서 만난다!"
목소리를 들으니, 마지막까지 나와 검을 맞댄 상대 같았다.
다섯 명이라. 많지는 않지만, 시작으로는 괜찮은 숫자였다.
내 암살 실력도 충분히 확인했고.
하지만, 기사들이 몰래 습격하는 나를 피해 움직이다니.
웬만하면 국경을 넘는 것을 포기하거나, 막아서는 나를 처치하려 할 텐데.
상대는 생각보다 더 서두르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 나를 피해 가는 기사 중에도 성벽을 넘지 못하는 자들도 있을 테지.'
왕국에서 온 기사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설치고 있으니, 병사들 사이에 심어 놓은 내통자들이 함부로 움직이기 어려울 터였다. 전처럼 모두 성벽을 넘기는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모두 막을 리는 없겠지.'
아니 전부 막으면 오히려 곤란했다.
숫자만 좀 더 줄여주면 충분했다.
그사이에 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럼 목소리를 따라 가볼까."
이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자라면 적어도 선임 기사 이상일 게 분명했다.
이 정도 되는 기사가 성벽을 넘지 못할 리도 없고, 목적지를 찾지 못할 리도 없었다.
죽기 전에 대충 실력을 봐두었으니, 어느 정도 멀리서 따라가면 들키지 않을지 충분히 가늠되었다.
'자, 네놈들이 모이는 곳을 알려다오.'
나는 작게 흘러나오는 마나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