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화
제6편 국경 수비대 (1)
마차에 탄 사람들은 갑자기 내가 고통에 떨자, 걱정했다.
"잠깐 쉬어갈까요?"
"여기 물 좀 드세요."
공주도 걱정하고, 공주의 하녀도 나에게 물을 건넸다.
발레아는 다른 사람 모르게 마차의 흔들림을 줄여주었다.
"갑자기 멀미가 나서 그랬습니다. 조금 쉬면 됩니다."
"멀미가 나면 그렇게 이를 악무시나요? 입술에 피가 비칠 정도예요."
발레아의 말에 입을 닦았지만, 피는 묻어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또 나를 속인 것이다.
"피가 난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피가 났다고 생각할 정도 아픈 것 맞죠?"
"휴우. 이제 괜찮아요."
발레아의 장난 덕분에 고통의 시간을 넘긴 것 같았다.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나는 모두가 안심할 수 있도록 웃어 보이고는 눈 앞을 가리고 있는 메시지창을 치웠다.
그리고, 내 능력 중 하나를 강하게 떠올렸다.
다시 눈앞에 창이 나타났다.
메시지창이 아니라, 내 능력을 알려 주는 정보창이었다.
< 기사형 영웅 능력자 >
< 사용 능력 >
- 육체 최적화 : 레벨 16
- 마나 회로 구축법 : 레벨 1
- 마나 감응력 : 봉인 해제 중
- 봉인 중
- 봉인 중
< 비인가 능력 >
- 마나 유형화 : 레벨 1
- 사자 회귀 : 레벨 2
육체 최적화는 '실전 수업'과 그 뒤의 훈련 덕분에 레벨이 하나 더 올랐다.
육체의 성장과 더불어 몸에 힘이 붙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이런 자신감으로 공주의 호위를 자처했는데, 조금 전 죽음으로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다.
세상은 넓고, 강한 상속능력자는 많았다.
그리고, 여러 능력을 사용하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물론, 흔하지는 않아 보였다.
대공녀를 납치하기 위해 몰려온 사람 중에서 한 명만이 여러 능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비드라고 불리는 남자. 여러 능력뿐만 아니라 실력마저도 무척이나 뛰어난 사람이었다.
오랜 시간 실전과 훈련으로 실력을 쌓아온 제대로 된 실력자.
그러고 보니, 그가 사용한 능력들을 들어본 것 같았다.
제국을 세웠던 용사 중에 화염 능력과 심법을 같이 사용하는 용사가 있다고 들었는데…….
내가 들은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비드라는 자의 여러 능력은 한 조상의 능력을 받은 것이려나.
내 '육체 최적화'나 '마나 회로 구축법'이 카를로스 초대 왕의 것인 것처럼.
그렇다면, '마나 유형화'나 '사자 회귀'처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의 능력을 받지는 못하는 걸까?
나는 뻗어 나가는 생각을 멈추었다.
아직 한 사람밖에 보지 못했다. 그 한 사람만 가지고 예상을 하는 것은 위험했다.
다만, 좀 더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죽기 전까지 매번 삶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원래도 그렇게 살기로 했지만, 그런 삶에 보상을 준다고 하니,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저 사자 회귀가 2레벨이 되었다고 뭐가 변하게 된 건지 모르겠다는 건데.'
분명 어딘가에 설명이 있을 텐데. 구슬이 멀쩡하지 않아서 그런지 설명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
이번의 뜬금없는 레벨업도, 레벨업을 하기 전까지는 레벨업을 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아직 레벨이 오르지 않은 '마나 회로 구축법'과 '마나 유형화'도 그렇고, 봉인 해제 중이라는 '마나 감응력'은 어떻게 봉인이 풀리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구슬의 수리.
대공녀에게 구슬을 고쳐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자, 그럼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하려나.'
미래 중에서 바꿔야 할 것도 있고, 그대로 놔둬야 할 것도 있었다.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대로 하리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이번 한 번으로 끝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공국의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마차 안은 조용했다.
내가 계속 생각에 잠겨 있자, 공주와 발레아도 내 눈치를 보는지 조용했다.
"뭔가 이상하게 생긴 도시네요."
공국에 수도, '철벽 도시', 아이언월에 도착하자, 발레아가 전과 같은 말을 꺼냈다.
반쯤 허물어진 요새 도시.
각종 상점가가 점령한 요새 도시가 보였다.
전과 같이 공주가 도시가 이렇게 된 이유를 설명했고, 이어서 관문에 도착했다.
나는 죽기 전과 같이 귀를 기울였다.
"……오늘은 왜 이리 까다로워졌대요."
"저거 봐. 왕국에서 높으신 분이 왔잖아. 거기다 며칠 전부터 제국 쪽 분위기도 이상하고, 다들……."
상인들과 병사들이 하는 말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혹시 상황이 전과 달라졌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변한 것은 없었다.
역시, 마차에 가만히 앉아 온 정도로는 나비효과가 크게 일어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관문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왕궁에서 기사들이 달려왔고, 우리는 기사들을 따라 왕궁으로 향했다.
왕궁에 도착한 뒤, 마차에서 내리기 전에 공주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네? 왜요?"
공주는 내 부탁이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내가 열심히 설득하고, 특정한 상황에서는 원래대로 한다고 하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내 말에 발레아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도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차에서 내리고, 나는 다른 마차를 타고 온 다니에르 자작에게 다가가 공주님께 말한 부탁을 이야기했다.
자작은 내 말에 놀란 얼굴이 되었다.
거기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보니, 내 말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는 마차에서 내린 학생들이 모두 모이자, 큰소리로 일정을 말했다.
"원래, 하비에르 학생은 국경 수비대에 기사들과 함께 머물고, 벤자민 학생은 공국 행정부에서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네? 왕궁이 아니라요? 발레아 영애는요? 알렉스는요?"
하비에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지만, 자작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이야기했다.
"공주님과 발레아 양은 왕궁에서 지내고, 알렉스 학생도 공주의 호위로 왕궁에서 지낼 계획이었습니다."
자작의 말에 입을 딱 벌렸던 하비에르와 벤자민은 점점 이상하게 변하는 자작의 말에 고개를 옆으로 뉘었다.
"하지만! 공주님의 지시로 알렉스 학생과 하비에르 학생의 위치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알렉스 학생은 국경 수비대로 바로 가고, 하비에르 학생은 왕궁에 남아 공주의 호위를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공주의 지시가 아니라, 내가 부탁한 것이었다.
자작은 내가 왕궁에 있지 않게 된 게 정말 좋았던 것 같았다. 길지 않은 이야기를 쓸데없이 장황하게 설명했다.
어쨌거나 하비에르 선배는 자작의 말에 주먹을 불끈 쥐었고, 벤자민 선배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계속 자신을 가리켰다.
"나는? 나는?"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안타깝게도 벤자민 선배를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하비에르 선배는 공주에게 다가가 과장된 경례를 붙였고, 공주는 몰래 곁눈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발레아는 궁금한 눈으로 계속 나를 바라보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내 계획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왕궁 앞에서 흩어졌다.
왕궁에 가는 사람들은 짐을 가지고 왕궁 안으로 들어갔고,
나와 벤자민 선배는 자신의 짐을 들고, 기사들과 서기관들을 따라가야 했다.
"자작님이 아주 꼼꼼하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조심하세요."
"생각보다 더 고생할 거라는 소리잖아. 억울해 죽겠는데 너까지 그러지 마라."
벤자민 선배는 죽기 전 삶에서 행정부에 갈 때보다 더 우울해 보였다.
"아니, 나를 끌고 왔으면서 자기만 왕궁으로 쏙 들어가다니. 잘 가라는 인사도 안 했다니까."
하비에르 선배가 자신만 놔두고, 왕궁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벤자민 선배와는 왕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행정부 건물 앞에서 헤어졌고,
나는 남은 말에 올라타서 기사들과 함께 북쪽으로 향했다. 제국과의 국경이 있는 곳이었다.
공국과 제국의 국경을 지키는 국경 수비대는 도시의 북쪽 성벽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쪽 성벽도 정상은 아니었다.
수많은 행상이 반쯤 무너진 성벽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그나마, 남쪽 검문소와 달리, 검문은 확실하게 하는 것 같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무너진 성벽 앞에는 목책과 함정들로 보강이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성벽보다는 못하지만, 갑작스러운 공격은 '잠깐'은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국경 수비대는 성벽과 연결된 건물을 숙소로 삼고 있었다.
수비대를 담당하고 있는 기사는 우리를 환영했다.
"요새 제국 쪽 움직임이 이상해서 지원을 요청했었습니다. 별로 기대는 안 했습니다만, 여러분이라도 오셔서 다행입니다."
내 귀에는 그의 말이 꿩 대신 닭이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하기야 아무리 실력이 좋은 기사라고 해도 자기 나라의 기사보다 좋을 리가 없었다.
국군에 지원을 나온 주한 미군 느낌이려나?
이쪽 관문 주위를 담당하는 수비대에는 기사가 몇 없는 것 같았다. 경계도 검문도 대부분 병사가 담당하고 있었다.
우리도 경계를 서게 되었다.
검문을 다른 나라에서 온 기사에게 맡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비어 있는 숙소가 많아서 우리가 지내기는 문제가 없었다.
"원래 제국을 막기 위한 요새였으니까요."
숙소가 왜 비어 있는지 안내하는 병사에게 물으니, 현실적인 대답이 들려왔다.
요새 도시 대신에 교역 도시가 되었으니, 경계를 서는 병사의 숫자도 줄었을 테고. 당연히 숙소는 텅 빌 수밖에 없었다.
먼지가 가득한 숙소에 짐을 풀고, 선임 기사가 기사들에게 앞으로 할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공국에 도착했으니, 우리의 주요 업무는 돌아가는 동안 공주님의 호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럼 공주님이 돌아갈 때까지는 휴가 아닙니까."
기사 한 명의 말에 다른 기사들이 호응했지만, 선임 기사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잘 알잖아."
"그렇긴 하죠."
모두 장난일 뿐이었다.
내 생각보다 기사단은 갑갑하지 않았다.
몇 차례 죽기 전, 유적에서 보았던 왕실 기사단과는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이들도 같은 왕실 기사단일 텐데. 그때 보았던 군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싸울 때는 잘 싸우는 것 같기는 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왕실 기사단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지금부터 하는 일은 휴가 대신에 내려온 추가 업무다. 파견 수업을 핑계로 한 공국과 제국의 국경 상황 파악이다."
정색을 한 선임 기사의 말은 모두 열심히 들었다.
"그렇다고 대단히 중요한 일은 아니고, 공주의 호위 사이에 겸사겸사 파악하라고 주신 업무이니, 알아서 잘 행동하도록."
"알겠습니다."
선임 기사도 어느 정도 여유를 주는 것 같았고.
그렇게 기사단이 괜찮게 느껴지던 순간, 질문 하나가 들려왔다.
"파견 수업 보조도 잘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기사들이 모두 나를 바라보았다.
"기사 학부잖아요. 후배에게는 제대로 기사 수업을 시켜야죠."
모두 나를 보고 눈을 번뜩였다.
그 눈들을 보니, 왜 죽기 전에 하비에르 선배가 힘들어 죽으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미안하게도 기사분들의 훈련 겸 갈굼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선임 기사가 나를 보았다. 자신이 말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그럼 내가 말하면 그만이었다.
"공주님의 명령을 수행해야 해서 자리를 비울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선배님들께 먼저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모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전이네. 상전."
"서자 따위가 줄 하나 잘 잡아서……."
내가 들으라는 듯이 여기저기서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생 좀 해야겠다. 다들 불만이 있을 테니, 너도 어느 정도 각오를 해야 할 거다."
선임 기사도 같은 생각인지 나에게 주의를 주었다.
나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화가 난 기사들과 힘겨루기를 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밤사이 국경을 넘는 제국 기사들을 찾아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