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제3편 습격 (1)
수도를 나서는 여러 대의 마차와 기사들.
'파견 수업'으로 공국에 도착할 때 인원보다 더 많은 인원이 수도를 떠났다.
같이 왔던 수행원들과 기사들에다가, 대공녀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기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주와 대공녀가 함께 있는 마차는 여성들끼리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마차 안에는 벤자민 선배와 내가 늘어져 있었다.
"진로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하나."
"왜요?"
"졸업하면 수도에 남아서 왕궁이나 행정부의 관리가 될 생각이었는데, 이번에 경험해 보니, 내 생각 같지 않더라고."
학생 때 생각했던 일과 현장의 실무는 언제나 다른 법이었다.
하지만, 벤자민 선배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일이 많은 것은 각오하고 있었는데, 일보다 이리저리 치이는 게 더 많더라고. 이래서야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치일 뿐인 자리 같아서……."
확실히, 귀족이라는 계급이 실권을 쥐고 있는 이 세계에서는 관료가 얼마나 높이 올라가던지, 귀족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은 이유 중의 하나, 아니, 이 세계에서는 제일 큰 이유일 게 분명한 것이 바로 권력욕일 터였다.
하지만, 행정부의 관료로서는 그런 자리까지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기사들은 전쟁 영웅이 되거나, 왕실 기사단장이라도 된다면 대귀족에 부럽지 않겠지만, 행정부의 서기관들은 그런 위치까지 가는 게 불가능했다.
"그냥, 성격 좋은 귀족의 서기관으로 일하는 게 훨씬 편하고 좋은 인생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내가 뭐라 조언을 하거나 위로할 일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행정학부 수석의 배부른 투정일 수도 있었다.
행정학부 수석이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게 더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겨우 공작가 '서자'인 내가 뭐라 할 건 아니었다.
나중에 내가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모를까, 지금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마디 더 푸념을 늘어놓은 뒤, 벤자민 선배는 조용해졌다.
원래 말이 없었던 사람인 만큼, 이제 한참 동안은 마차 안이 조용할 것이다.
나는 다시 늘어지는 선배에게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산과 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름길로 가는 것인지, 올 때와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
방향은 맞지만, 전보다 한적한 길이었다.
큰길을 따라 공국으로 온 우리와 달리, 이곳에 사는 공국인들이 안내를 하는 것이니, 예상보다 빨리 국경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대공녀는 국경까지 따라오려고 하는 건가?'
생각보다 멀리까지 배웅을 하는 것 같았다.
공주는 좀 더 오래 같이 가게 되어 기뻐할 테고, 대공녀를 호위하는 기사들은 힘들 테지만, 호위가 많다는 것은 나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그만큼 긴장을 늦출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긴장을 한 채로 주변을 감시하는 것은 무척이나 피곤한 일이었다.
호위를 맡았으니 최대한 열심히는 하고 있지만, 다른 호위들이 방비하고 있으면 다른 때보다 조금은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아예 긴장을 푸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덜 신경…….
뭐지?
감각 끝에 뭔가가 걸려들었다.
몸을 세우고, 늘어졌던 신경을 바짝 조였다. 그리고, 감각을 끌어올렸다.
그제야 뭐가 걸려든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사람, 아니, 사람들이었다.
길에서 조금 떨어진 숲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마나를 뿌리니, 모여 있는 사람들의 마나가 느껴졌다.
마나를 가진 사람들이 숲에 숨어있다?
젠장!
벽에 기댄 검에 손을 올렸다가, 다시 가슴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카데미에서 준 검을 쓸 때가 아니었다.
스르르릉.
커다란 대검을 가슴에서 뽑아냈다.
"그, 그게 왜 거기서 나와?"
검을 보고 놀란 선배가 소리쳤지만, 나는 검을 들고, 마차 문을 박찼다.
그리고, 모두가 들리게 소리쳤다.
"습격! 숲에 적이 있습니다!"
착! 차착!
내 말에 기사들이 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습격이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그 뒤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대공녀를 호위하는 기사단의 선임 기사와 왕국의 선임 기사가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적이다! 양쪽 숲!"
"모두 전투대형으로! 방어진을 만들어!"
늦었지만, 두 선임 기사가 적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기사들이 빠르게 진형을 갖추는 사이, 숲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완전 무장을 한 각양각색의 갑옷을 입은 사람들.
용병들이었다.
"하하, 감히 우리를 감옥에 가두었겠다! 원수를 갚으러 왔다!"
"왕국 용병을 우습게 보다니!"
달려오는 용병들 가운데 이상한 말을 외치는 자들이 있었다.
의아한 생각에 말을 하는 용병들을 살펴보니, 어디서 본 얼굴들이었다.
'맙소사, 상점가에서 날뛰던 놈들이잖아?'
설마, 정말 감옥에 가두었다고 이렇게 습격하는 거라고?
그럴 리가.
그걸 자기 입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고, 저렇게 국어책을 읽듯이 말할 리도 없었다.
어이없고 황당하지만, 웃을 수도 없었다.
달려오는 용병의 수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었다.
거기다, 밀려오는 마나는 더 끔찍했다.
마치, 봉인지에서 싸울 때 보았던, 마물 집단이 밀려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나들 사이에 중간중간 삐쭉 솟구치는 마나들은 감히 용병들이 가질 마나가 아니었다.
그리고 보니, 달려오는 용병들 사이에 검은색으로 칠한 판금 갑옷을 입은 자들이 보였다.
저건 분명 기사들이었다.
내가 느낀 것을 선임 기사들도 느낀 모양이었다.
선두에 있던 대공녀의 선임 기사가 선두 마차의 마부에게 소리쳤다.
"마차를 몰아! 여기서 포위되면 안 된다! 국경 검문소로 가!"
선두 마차는 공주와 대공녀가 타고 있는 마차였다. 마차의 마부는 그의 말에 채찍을 내려쳤다.
히이이잉!
마차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이어, 선임 기사는 마차를 따라가며 기사들에게 외쳤다.
"모두 움직여! 기사들은 대공녀님을 지킨다!"
대공녀의 기사들이 달리는 마차와 함께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어서 왕국에서 온 선임 기사도 왕국 기사들에게 외쳤다.
"우리도 마차를 따라간다! 어서 움직여!"
왕국 기사들도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하비에르도 흥분한 얼굴로 기사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숲에서 튀어나온 적들도 앞서나가는 마차와 기사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미리 준비했는지, 중간중간 말을 타고 달려 나가는 용병들도 있었고, 마나를 이용해서 빠르게 질주하는 용병들도 있었다.
마차들과 기사들이 달려가고, 이곳에는 고용인들이 타고 온 마차들만이 남겨졌다.
그 가운데에 나와 벤자민도 포함되어 있었다.
"맙소사, 우리는 버려진 거야?"
"다른 때 같았으면 버려진 게 아니라, 안전하게 남겨진 거겠죠."
공주와 대공녀를 따라 기사들이 달려가고, 그 뒤를 습격자들이 따라가면,
남겨진 우리는 안전!
이라는 결과도 나올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번 상대는 사람들을 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습격자들 모두가 선두 마차를 쫓은 게 아니라 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쫓아간 습격자들만큼 강한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이곳에 남은 사람들도 싸울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왜 안 따라갔어? 공주님 호위로 온 거잖아. 우리 때문이야?"
물어보는 벤자민에게는 미안했지만, 뒤에 남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내가 여기 남는 것은 아니었다.
나도 마차를 따라가고 싶었고, 내 다리라면 충분히 따라갈 수도 있었지만, 이곳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곳에 남은 습격자 중에 아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앞쪽에서 검을 든 채로 길을 막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지금도 그가 뿜어낸 마나와 내 마나가 허공에서 부딪치고 있었다.
나는 대검을 다시 고쳐잡고, 입을 열었다.
"달아나요. 제가 지켜드릴 수 없어요."
벤자민은 내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설마, 네가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어?"
나는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네. 상속능력이 있으시니, 선배님만이라도 달아나세요."
"글쎄,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는데……."
벤자민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흐렸다.
마차에 나와서 덜덜 떨고 있는 하녀들과 고용인들이 보였다.
'이 선배도 착한 사람인 건가.'
다른 사람을 버려두고 도망가지 못하는 사람.
하기야 불의를 참지 못하고, 하비에르 선배와 같이 다니는 것을 보면 그럴 것 같기는 했다.
나는 더는 권하지 않았다.
적과 거리가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또 만났네."
길을 막고 있던 습격자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옷도 달라지고, 들고 있는 검도 달랐지만, 얼마 전 상점가에서 본 얼굴이었다.
이름이 비드라고 했었던가?
어차피 가명이겠지만, 확실히 그와는 만난 적도 있고, 싸운 적도 있었다.
"전에 사고를 쳐서 설거지하게 된 것도 있지만, 여기 있게 된 것은 내가 직접 지원한 거야."
"네 실력을 내가 알거든, 웬만한 사람을 남겼다가는 다 썰려 나갈 게 뻔한데 내가 남아야지."
젠장, 실력을 괜히 보여준 건가.
"뭐, 그런 건 다 핑계고, 다시 한번 붙어보고 싶었지."
나는 그에게 물었다.
"제국이 대공녀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 겁니까?"
"오, 우리가 제국 소속인 걸 알았어? 하긴 연극이 그렇게 어설펐는데 모를 리가."
자기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던 남자가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흠, 왕국에서 온 학생이 우리가 대공녀에게 볼일 있다는 것도 알고. 공국왕이 우리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게 사실이었나."
말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니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예상대로 다 죽일 생각인 건가.
조금이라도 정보를 얻을 생각에 다시 물어보려고 했다.
"그런……."
"먼저 정리하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용병이 먼저 그에게 말했다.
"그래. 수고하고."
남자는 그에게 손을 흔들었고, 사람들을 포위하고 있던 용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꺄악!"
"살려줘요! 제발!"
콰앙!
비명이 들리고, 폭음도 들려왔다.
"젠장! 이거라도 먹어!"
폭음과 함께 벤자민 목소리도 들려왔지만,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보이지는 않지만, 내 뒤에서 학살이 벌어지고 있었다.
용병들은 고용인들을 학살하면서도 내 옆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저 남자 몫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비어있는 손을 품에 넣어 단검을 꺼냈다.
"대검과 단검? 이도류 같은 거야?"
이도류 같은 건 배우지도 않았다.
나는 단검을 허리에 차고, 대검을 바로 세웠다.
뭔가 숨길 상황이 아니었다.
어차피 죽으면 다시 시작, 지금은 최선을 다할 때였다.
나는 마나를 일깨웠다.
시간이 느려지고, 대검 끝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감각이 날카로워지고, 마나가 심법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에 선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느려진 그의 입에서 질문이 이어졌다.
"신체 능력자? 아니, 마나 심법인데? 그럼, 검에서 일렁거리는 건 뭔데?"
나는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 다리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마지막 순간.
화아아악!
나는 앞에서 남자의 검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았다.
검만이 아니었다. 팔과 어깨까지,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하하하! 다중 능력자라니, 제국 밖에도 다중 능력자가 있다니, 그 녀석들이 알면 미쳐 날뛸 거야!"
그가 말하는 다중 능력자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분명 두 가지 능력을 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