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제2편 그들은 결정했습니다
공국 수도의 한 여관방 지하.
전부터 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하던 곳으로, 오늘도 싸움에 가까운 난상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멱살만 안 잡을 뿐인 싸움 같은 토론은, 방음벽을 미리 펼쳐두지 않았다면 벌써 경비병이 찾아왔을 정도였다.
이 난상 토론의 시작은 재협상을 하러 갔던 특사가 공국왕이 새로 말한 내용을 꺼내 놓았을 때부터였다.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대공녀가 카를로스 왕국으로 간다니요!"
그의 말에 이곳에 모인 모두가 화들짝 놀라버렸다.
"아직 확실히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대공녀를 제국 대신에 카를로스 왕국으로 유학을 보내려 한다는 이야기를 공국왕이 협상 전에 꺼냈습니다. 덕분에 재협상이고 뭐고 파투가 나 버렸습니다."
특사가 양손을 내밀며 말했다.
"설마 우리 목표를 아는 걸까요?"
"글쎄요. 공국왕이 워낙 표정을 알기 힘들어서요."
특사가 상석에 앉아 있는 여성, 조직의 공국 담당자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여성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면 지원을 더 긁어내려는 수작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다른 사람의 말에 특사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무성의한 특사의 모습에 다들 표정이 안 좋았지만, 특사는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공국에 보낸 귀족이었다.
그는 조직원이 아니라 반쯤 걸친 협력자에 불과했다.
모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원이 더 필요하다면 더 줘버리죠. 어차피 일을 완수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지시가 왔잖습니까?"
다른 사람이 새로운 의견을 냈지만, 특사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여러분과 같은 소속은 아니지만, 이번 일을 성공시키라고 위에서 제대로 지시를 받았습니다. 더 지원해 주겠다고 말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설마 안 받겠답니까?"
"더 황당한 말을 들었습니다. 제대로 지원해 준다면 대공녀 대신에 왕세자를 보내주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특사의 말에 모두 입을 딱 벌렸다.
"미친……."
"공국왕이 카를로스 왕국을 먹고 싶어서 미친 건가."
"왕세자를 제국에 보낸다는 게 말이 됩니까. 공국에 다른 왕자도 없잖습니까."
"유학으로 생각하면 나쁜 건 아니지만……."
고개를 젓는 사람들 사이에 뭔가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를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바로 반박을 당했다.
"유학일 리가 없잖습니까. 인질인 걸 우리도 알고 공국왕도 잘 아는데."
모두가 황망해 있는 가운데, 특사는 공국왕에게서 느꼈던 점을 말해 주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급하다는 것을 잘 아는 것 같습니다. 이리저리 간을 보며 받을 지원을 키우고, 확답도 받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나마 희망적인 특사의 말에도 모두의 한숨은 멈추지 않았다.
"꼬였네. 우리 목적은 그게 아닌데……."
"공식적으로는 공국왕이 말한 대로 왕세자를 보내 준다면 훨씬 좋은 협상이 되겠지만 말이죠."
"우리는 그럴 수 없다는 거지."
한참 소란스러운 가운데, 다른 질문이 들려왔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이유로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겁니까?"
다른 사람도 궁금했는지, 시끄러운 소리가 잠잠해졌다.
"제2 왕자의 책사가 왔다는데 그놈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인가요?"
책사라는 말에 모두 긴장했지만, 특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었습니다. 전혀 예상 밖의 이유였습니다. 대공녀가 카를로스 왕국으로 가고 싶다는 모양입니다."
뜻밖의 말에 모두 어리둥절했다. 공주가 왜?
"설마, 이번에 왕국에서 온 공주 때문입니까? 꽤 친하다고 들었는데."
그럴듯한 의견이 나왔지만, 이번에도 정답은 아니었다.
"그것도 있지만, 얼마 전에 있었던 상점가 작전 때문이랍니다."
특사의 말에 뒤쪽에 조용히 앉아 있던 임시 용병대장 엔시오가 벌떡 일어났다.
"그,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그때, 뒤에서 대공녀를 도와주기로 한 조가 같이 휘말리는 바람에……. 대공녀는 둘 다 한패인 제국인으로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제국의 무뢰배들이 무섭다고……."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특사의 말에 엔시오는 질린 얼굴로 반박을 하려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먼저 욕을 먹고 말았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요. 일을 제대로 했어야지. 아니, 계획대로 하는 것은 고사하고 모두 잡혀들어가면 어떻게 합니까!"
엔시오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시비를 건 게, 이번 계획을 세운 놈이었으니.
"그건 그쪽이 급하게 밀어붙여서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런 엉성한 계획으로 잘 될 리가 없잖습니까!"
하지만, 불똥은 다른 곳으로 튀어버렸다.
상석에 앉아 있던 여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요. 어차피 내가 진행하라고 결정한 거였으니."
"아, 죄송합니다."
엔시오는 떨떠름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소란이 가라앉자 특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대공녀가 제국으로 가고 싶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있으니, 무조건 대공녀를 보내 달라고 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시간을 들여서 협상하면 길이 보일 것 같기는 한데……."
특사의 말에 상석에 앉은 여성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우리가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겠죠."
"네, 어차피 카를로스 국왕이 죽어야 일이 진행될 테니, 공국왕은 급한 게 없어 보였습니다. 우리 약점을 알아차리고 하나라도 더 뽑아먹겠다는 심사 같았습니다. 대공녀도 핑계로 보일 정도였습니다."
"핑계가 맞을 거야. 공국왕은 그런 인간이니까."
핑계든 아니든 이러면 협상에 기대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이러면 협상으로는 답이 없는 것 아닙니까. 공식적인 협상이야 그대로 진행하면 그만이지만, 우리 쪽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조직이 요구하는 것과 제국이 협상으로 얻으려는 것이 다르니 곤란하군요. 협상 중간에 원하는 것을 빼낸다는 계획이었는데, 이래서야 더는 협상을 이용하기는 어렵겠습니다."
그렇게 모두 답답해하고 있을 때였다.
공국 내통자들에게 정보를 수집하는 담당자가 뜬금없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며칠 뒤에 왕국의 그 '파견 수업' 어쩌고가 끝나는 모양입니다."
"귀찮은 놈들이 가는 게 왜요? 빨리 떠나주면 고마울 따름인데. 그놈들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그냥 가는 길에 쓱싹 해 버리고 싶다니까."
그의 말에 엔시오가 작게 투덜거렸다가, 이어지는 말에 딱 벌렸다.
"그게, 대공녀가 배웅하기 위해 꽤 멀리까지 따라간다고 합니다."
모두 놀라, 말을 꺼낸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석에 앉은 여성이 급하게 물었다.
"어디까지죠? 수도 밖까지?"
"수도를 벗어나고도 꽤 멀리까지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말에 모두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배웅이라……."
"정말 배웅일까요?"
의심이 점점 커졌다.
"설마, 같이 왕국으로 가는 걸까요?"
"그럴 리가……."
"아니, 몰라요. 혹시, 우리 목적을 알아차렸다면."
"우리 목표가 대공녀인 걸 알고 몰래 피신을 시킨다는 건가?"
혹시나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냥 의심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대공녀가 왕국으로 유학하고 싶다는 것도 미리 핑계를 만들어 놓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설마, 공주를 부른 것도 그런 이유일까요?"
거기다, 다른 의심이 더해지니, 이제 의심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버렸다.
다들 서로를 쳐다보았고, 결국, 상석에 앉은 여성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있던 여성이 눈을 떴다.
"사실이든 아니든, 대공녀가 왕국 쪽으로 향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윗분들의 말이 있었으니, 이번 일은 힘으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분들은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용병들도 준비시키고."
뒤쪽 벽에 서 있던 중년의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고, 용병대를 통솔하는 엔시오는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비드 공자님은 이번에는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심하지."
알렉스 때문에 일을 망쳤던 남자는 여성의 말에 머리를 긁적였다.
담당자들에게 지시한 뒤에 그녀는 모두에게 말했다.
"모두 대공녀가 수도에서 나오는 시점에 맞춰 움직여 주시기 바랍니다. 뒷수습은 우리 지부가 책임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모두 굳은 얼굴로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준비할 시간도 부족하고, 정보도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유롭게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이 일로 큰 피해가 생겨도, 혹은 지부가 날아가게 되어도, 제국의 미래, 아니, 인류의 미래를 위해 꼭 성공시켜야 했다.
* * *
모르는 곳에서,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나와 '파견 수업'을 온 학생들은 수업을 끝마치고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공국에 대해 여러 가지를 듣고 배웠다.
왕궁에서, 행정부에서, 국경 수비대에서, 있던 곳은 달랐지만, 모두 많은 것을 듣고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보람 있는 수업이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드디어 끝이다. 힘들었어."
언제나 밝아 보이던 하비에르 선배가 지친 얼굴로 말했다.
"그러네요. 끝이군요."
벤자민 선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래도 발레아와 공주는 밝은 얼굴이었다.
공주는 대공녀와 곧 헤어진다는 것에 무척 아쉬워했지만, 공국에서 보낸 시간은 무척 만족스러웠던 것 같았다.
발레아는 말할 것도 없이 왕궁의 생활을 신나게 즐겼고.
그럼, 5명 중의 3명은 좋았으니, 보람된 수업이라는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옆에서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전부 무시했다.
"그래도 배웅을 나와 주셔서 정말 좋아요."
"응, 쉽지 않을 것 같았는데, 다행히 허락해 주셨어. 공주와 같이 다니는 것도 좀 더 노력하면 허락해 주실 거야."
걱정한 대로 대공녀의 왕국 유학은 우리가 떠날 때까지 결정이 나지 않았다.
대공녀가 몇 번이나 공국왕에게 말했다는데, 공국왕께서는 긍정적인 뜻만 비추면서 결정은 내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역시, 평범한 아버지로서 결정을 내리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공국왕이라면 그래야 했고, 그럴 것 같았지만, 내 처지로는 무척이나 아쉬웠다.
그렇다고, 앞뒤 생각하지 않고, 그녀에게 구슬을 보여줄 수도 없었다.
대공녀와 따로 둘만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왕궁 경비를 뚫고, 몰래 밤에 그녀의 방에 숨어들 수도 없었다.
죽고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그리 달라질 것도 없어 보이고, 결국, 공국왕의 결정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대공녀님이 공주님과 같이 마차에 타게 될 테니, 돌아갈 때는 하비에르가 마차 옆에서 공주님을 호위하도록."
다니에르 자작이 파견 수업 통솔자라는 이름을 내세워 나를 다른 마차에 보내 버렸다.
대공녀 때문에 공주와 마차를 같이 타기는 힘들긴 했지만, 마부 옆에 앉을 수도 있고, 아니면 하비에르처럼 말을 타고 마차 옆에서 호위를 할 수도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저건 분명 나에 대한 심술이었다.
중간에 협상이 틀어진 것 같다더니, 대신 나에게 성질을 내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비에르 선배는 신이 나서 공주가 탄 마차 옆으로 말을 몰았고,
나는 공주의 마차에서 조금 떨어진 다른 마차에 벤자민 선배와 같이 올라탔다.
잘못된 결정이었다.
하지만, 미래를 알지 못하는 나는 늘어져 있는 벤자민 선배를 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