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제1편 대공녀의 결정
시끄러웠던 두 번째 날이 지난 뒤에는 평범한 날들이 지나갔다.
가끔 공주와 대공녀가 만나 다과를 나누었지만, 밖으로 외출은 할 수가 없었다.
주위의 시선 때문에 나는 대공녀에게 개인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웠다.
대공녀도 뭔가 고민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발레아는 적성에 맞는지, 왕궁 안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사귀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는 다른 곳으로 끌려갔던 선배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다행히 중간에 휴일이 있어서, 중간보고 겸해서 두 사람 다 왕궁으로 오게 되었다.
두 선배는 먼저 자작에게 그동안의 일을 보고한 뒤에, 내 방에 모였다.
우리만 공국으로 왔기 때문일까.
며칠 만에 보게 된 선배들은 전보다 훨씬 나를 편하게 대했다.
하비에르 선배는 전에도 워낙 격이 없긴 했지만, 벤자민 선배도 편한 동생처럼 나를 대했다.
"아니, 방이 너무 차이 나는데?"
"정말 좋네요. 내가 있는 관사 일인실은 상당히 좁던데."
"좁은 정도면 괜찮아. 전방 숙소는 일인실 자체가 없다니까. 지저분한 숙소에서 기사님들과 같이 지낸단 말이야. 나는 벌써 막내 역할을 하고 있어."
하비에르 선배에게 애도를.
전생에 군대를 경험해본 나에게는 그의 말이 남의 말 같지 않았다.
이래서 내가 왕국군이나 왕실 기사단에 갈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한참 방을 가지고 떠들던 두 선배는 이어서 다니에르 자작을 도마에 올렸다.
먼저 하비에르가 의자에 늘어지며 말을 꺼냈다.
"조금 전에 자작님께 보고했잖아. 근데 자작님 엄청 깐깐하더라고."
조금 전일을 회상하고 있는지, 하비에르가 질색한 표정이 되었다.
"제대로 보고 안 한다고 몇 번이나 다시 했는지 몰라. 하지만, 내가 공국군 배치나 기사분들 성향 같은 걸 어떻게 알겠어. 아는 대로 열심히 이야기하긴 했는데, 영 마음에 안 드시는가 봐."
"선배야 오늘 하루만 보고하면 그만이죠. 나는 자작님을 매일 본단 말이에요."
하비에르 선배의 말을 들은 벤자민 선배가 그답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와, 힘들겠다."
하비에르가 위로를 보냈지만, 벤자민에게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실력도 좋고, 꼼꼼하니 고통이 두 배예요. 왜 상급자는 게을러야 하는지 이제 알 것 같아요."
벤자민은 앞에 놓인 차를 들이켜더니, 잔을 잡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음, 생각보다 하시는 일이 많아 보이더라고요. 단순히 파견 수업 통솔로 온 게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이게 그 정도가 아니더라고요."
풍기는 뉘앙스가 뭔가 다른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나는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우리가 들어서 알겠어?"
옆에서 하비에르가 딴지를 걸었지만, 다행히 벤자민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아닌데, 공국과 무슨 협상을 하는 모양이더라고. 다른 사람들 모르게 움직이시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게 공식적으로 하는 것 같지도 않아서……."
"개 코가 또 발동한 거야? 조심해야 해, 아카데미에서도 그러다가 학장님께 경고받았잖아."
"알고 있어요. 근데 대충 눈치만 봐도 알겠더라고요. 상당한 윗선끼리 협상이 진행 중인 것 같은데, 이게 비밀 협상에다가, 공식적인 라인은 하나도 타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을 빙빙 돌리고 있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선배님 말씀은 공국과 제2 왕자님 쪽이 비밀리에 협상 중인 것 같다는 거죠?"
내 말에 벤자민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어? 어……. 그렇게 느껴지기는 하는데……."
벤자민과 나를 보고 하비에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그 이야기가 어떻게 그렇게 연결이 되는데."
나만 바보 같다며 투덜거리던 하비에르가 벤자민을 보며 강하게 말했다.
"모르는 척해야 해. 학생인 우리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야. 잘못했다가는 경고 정도로 끝나지 않을지도 몰라."
"저도 낌새가 이상해서 관심을 끊었어요. 더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협상도 애매해지는 모양이고."
"관심을 끊었다면서 듣기는 계속 들었나 보네."
벤자민이 머리를 긁적였다.
벤자민의 말을 들으니, 하비에르도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 쪽도 영 이상했지."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국 쪽에서 무단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이 확 늘어난 모양이야."
하지만, 생각보다 별일은 아닌 것 같았다. 전생에도 무단 월경은 흔한 일이었다.
"세금 때문에 밀매업자가 늘어난 것 아닌가요?"
벤자민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서라면 국경이 아니라, 더한 것도 하겠다는 사람들을 전생에 많이 보았었다.
이곳도 별다른 바가 없을 터였다.
"그러면 내가 말을 하겠어? 3m가 넘는 담장을 한 번에 넘는 밀매꾼이 있다면 나도 보고 싶어."
어라. 그러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기사들의 눈을 피해 국경을 넘는 자도 밀매꾼일 테고."
하비에르 선배의 말이 사실이면 평범한 문제가 아니었다.
"실력이 좋은, 기사급 실력자들이 몰래 국경을 넘었다는 말이잖아요."
내 말에 하비에르가 손바닥으로 무릎을 두드렸다.
"바로 그거야! 나하고 왕국 기사님들이 파견 수업 때문에 국경 근무를 선 덕분에 알 수 있었던 거지. 평범한 병사들은 절대 몰랐을 거야."
"아니, 그럼 매번 그래왔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가?"
벤자민의 딴지에 하비에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국, 하비에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넘어가 버렸지만, 나는 하비에르의 말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내 눈으로 제국에서 온 대단한 실력자를 보았었다.
그 사람도 같은 방식으로 온 것일까?
하지만, 왜 이 시기에, 그런 일을 벌인 건지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지금 감옥에 갇혀 있을 텐데, 찾아가면 만나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만나서 할 이야기도 없지만,
그때, 벤자민이 그들의 소식을 전해줬다.
"아, 맞다. 공주님하고 외출했을 때 난리를 피운 용병들 있잖아. 모두 풀려난 모양이야. 왕궁에서 사람이 와서 화를 내는데 당사자들은 '어디서 개가 짖냐'는 표정으로 보고 있더라고."
뭐? 전부 풀려났다고? 기껏 잡아넣었는데?
"와, 공국도 열라 막장이네."
"뭐, 생각해보면 왕궁 쪽 사람들은 수십 년 전에 갑자기 쳐들어와서 주인이 된 사람들이잖아요. 원래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마음에 안 들 수도 있겠죠."
벤자민의 말에 하비에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야, 말조심 좀 해. 여기서는 내가 도와줄 수도 없어."
이야기를 듣다 보니, 벤자민이 하비에르에게 끌려다니는 게 아니라, 하비에르가 사고를 치는 벤자민을 매번 도와주는 것 같았다.
이래서 사람 사이는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는 걸까.
나는 이제 할 이야기도 없는지 침대와 소파에 늘어져 있는 선배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에게 듣기 원했던 정보, '망가진 유물을 고칠 수 있는 상속능력자'는 이미 알아낸 뒤였지만,
만나기로 한 약속을 취소하지 않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역시, 대공녀에 관한 이야기 말고도 들을 이야기는 많이 있었다.
자작의 움직임, 제국의 난입. 그리고 대공녀의 상속 능력.
아직 모르는 것도 많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많지만, 우선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있었다.
감옥에 집어넣었던 제국인들이 풀려난 것을 보니, 길게 보고 조심스럽게 할 상황이 아니었다.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겠지만, 나는 대공녀에게 직접 말해볼 생각이었다.
파견 수업을 핑계로 공국을 방문한 것이긴 했지만, 파견 수업 자체를 안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공주의 호위 역할을 하면 그만이었지만, 공주도 파견 수업이라는 명목의 일은 해야 했다.
공주는 공국 특유의 여러 행정과 통관과 상행에 대해 서기관들에게 수업을 받아야 했다.
역시 나이에 걸맞지 않은 천재인 공주는 금방 수업을 끝내버렸고, 파견 수업이 끝나기 며칠 전, 다시 대공녀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나도 당연히 공주와 함께했고, 처음 대공녀와 만난 응접실에서 그녀와 만날 수 있었다.
"어서 와요. 공주님이 서기관들을 때려눕혔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어요."
대공녀의 말에 공주의 볼이 빨개졌다.
"대공녀님을 빨리 보고 싶어서……."
그런 이유로 봉인을 푼 것이었나.
평상시와 달리 열심이었는지 궁금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소녀 같은 이유였었다.
그런 이유로 발레아는 지금까지 서기관들에게 잡혀 있었다.
공주와 대공녀는 내가 있는지 신경도 안 쓰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만난 지 며칠밖에 안 지났지만, 그들은 마치 몇 개월이나 떨어져 있던 것 같았다.
덕분에 도무지 끼어들 틈을 찾기 힘들었다.
나는 마나를 끌어올려 세상이 느리게 보이게 만들기까지 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던 중, 결국 대화가 멈추는 순간이 도래했다.
대공녀가 의식적으로 대화를 멈춘 순간이었다.
대공녀는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이었다.
무엇을 결심하던, 어쨌건 간에 지금이 기회였다.
"제가 잠시 할 말……."
"저는 카를로스 왕립 아카데미로 유학을 할 생각이에요."
나는 채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대공녀의 말을 들어야 했다.
겨우 얻은 기회를 놓쳤지만, 나는 멍하니 대공녀를 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요? 공자님! 프리다 대공녀님이 우리 아카데미로 오신대요!"
놀란 공주가 기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그런데 뭔가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대공녀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할 말이 있었는데, 없어졌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공녀께서 하셨는데,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꺼냈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무슨 말을 꺼냈다가 부정이라도 타면 곤란했다.
다만, 걸림돌은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공국왕께서 허락을 하실는지……."
내 말에 대공녀는 자신 있는 얼굴로 대답했다.
"허락하실 거예요. 제 부탁을 거절하신 적은 없으세요. 부탁을 거의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꼭 들어주실 거예요."
하지만, 나는 공주의 확답을 듣고, 조금 걱정스러워졌다.
* * *
다음 날 공국왕의 집무실.
대공녀는 공국왕에게 자신의 결정을 들려주었다.
"카를로스 왕립 아카데미에 가고 싶어요."
"제국이 아니라?"
대공녀의 말에 공국왕의 표정이 묘해졌다.
"네. 제국으로 가고 싶지는 않아요."
"왜 그렇게 결정을 내린 거지?"
"아이샤도 왕립 아카데미에 있고, 같이 온 학생들을 봐도 배울 점이 많아 보였어요. 거기다, 제국에는 아는 사람도 없고……."
"그것뿐이냐?"
생각보다 쉽게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프기 전의 아버지와는 많이 달라지신 것 같았지만, 대공녀는 실망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며칠 전 상점가에서 벌어진 일 뒤에, 여러 가지 고민을 했어요. 어디로 가는 게, 이 나라와 아버지와 오빠와 저를 위한 것인지."
"왕립 아카데미가 그 고민의 결과물이라는 거냐?"
"네."
대공녀의 말에 공국왕이 잠시 눈을 감았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공국왕이 다시 눈을 떴다.
"그런 식으로 하는 것도 재미있겠군. 회의를 해 볼 테니 기다려 봐라."
긍정적인 답을 들은 뒤, 대공녀는 왕의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대공녀가 떠난 뒤 공국왕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은 패가 들어온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