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제25편 아니, 유물이 왜 거기서…… (2)
임시 용병대장 엔시오는 열심히 싸우는 용병대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었다.
고르고 고른 용병들과 함께 일을 벌였는데도 일이 꼬이고 있었다.
분명 노점들을 뒤엎으며 깽판을 칠 때까지는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숨어 있던 기사들이 튀어나올 것도 예상대로였고, 준비해둔 용병들로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전부 미리 공국에 심어둔 자들이 정보를 보내준 덕분이었다.
하지만, 싸움을 키우며 대공녀에게 다가간 뒤에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카를로스 왕의 딸이 와서 같이 움직인다는 정보도 미리 얻어놓았었다.
공주의 호위가 있을까 봐, 용병들의 숫자도 늘렸다.
내통자들에게 지시를 내려서 공주 쪽 기사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기까지 했고.
그런데, 왜 저기서 발이 묶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공녀 가까이 가서 위협을 줄 정도면 충분했다.
지금도 겨우 몇 걸음 더 가면 되는데.
웬 이상한 것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꼬맹이 공주는 왜 나서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화려하게 생긴 소녀 주변의 물건들은 왜 혼자서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기다, 왕국 쪽 아카데미 복장을 한 앳된 얼굴의 소년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콰직!
"크아아악!"
사방에서 날아드는 물건들을 피해 겨우 대공녀 앞에 도착한 용병이 검 면에 맞아서 멀리 날아가 버렸다.
검을 잘 쓴다고 소문난 기사급 용병이었다.
죽이지 말라는 명령 때문에 제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지만, 분명 저렇게 날아갈 녀석이 아니었다.
잠깐, 상대도 죽일 생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아니, 저 소년에게 박살이 난 것은 조금 전 용병 하나만이 아니었다.
그전에 다리가 부러진 놈도, 그 이전에 반대쪽 노점상에 처박힌 놈도. 모두 저 소년이 박살 낸 부하들이었다.
분명 '파견 수업'을 온 아카데미 학생이라고 들었는데, 저 실력이 무슨 학생 실력인지.
제국 아카데미에서 제일가는 학생을 데려오면 겨우 비슷하려나.
왕국에 저런 인재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이래서야 대공녀를 겁에 질리게 만드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지금도, 대공녀는 겁에 질리기는커녕, 눈을 반짝이며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일은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그는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동료에게 신호를 보냈다.
* * *
"어떤 놈이 이 나라에 와서 행패냐! 여기는 카를로스 왕국이 아니라 훌리안 공국이다! 난 공국인이 아니지만, 이런 행패는 두고 볼 수 없다!"
열심히 깡패 비슷한 용병들을 두들겨 패고 있는데, 갑자기 등장한 사람 중 하나가 큰소리로 외쳤다.
의기에 찬 멋진 외침이었지만, 아쉽게도 대사가 너무 길었다.
예전에 눈치를 챘던 발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고, 대공녀도 이상하게 느꼈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느닷없이 등장한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느닷없이 나타난 사람들은 대사도 길었지만, 너무 늦게 등장했다.
아니, 그들 잘못은 아니었다.
용병 중 한 명이 뭔가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아, 내가 최대한 빨리 남은 용병들을 정리해 버린 탓이었다.
저들이 나타났을 때는 이미 깽판을 치던 용병들은 다 쓰러져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죽이지 않아서 나도 죽이지는 않았지만, 바닥을 구르는 용병들은 이리저리 깨지고 부러져 있었다.
솔직히 내가 부숴 놓은 용병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사들이 열심히 싸워서 쓰러뜨린 용병들도 있었고, 눈에 띄지 않게 발레아가 능력을 사용해 넘어뜨린 용병들도 많았다.
공주도 물론 도움이 되었고.
대공녀의 손에 들린 유물이 쓰일 필요도 없이 일이 마무리된 것이었다.
"제가 도와……."
열심히 떠들던 남자는 겨우 상황을 알게 되었는지 입을 닫았고, 언제 꺼낸 건지 검을 들고 있던 동료들은 이미 정리된 상황에 어쩔 줄을 몰랐다.
결국, 새로운 인간들이 참여하기 전에 일이 잘 끝난 것 같았지만, 나는 여기서 일을 끝낼 생각이 없었다.
"너희도 한패냐! 감히 공국에 시비를 걸다니, 제국의 이름이 그렇게 가치가 없는 것이었냐!"
발레아가 황당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말을 끝내기 전에 앞으로 튀어 나갔다.
팟.
말을 꺼냈던 남자의 얼굴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잘생긴 남자였는데, 표정을 보니,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처음 등장할 때부터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느껴졌는데, 실력만큼 머리는 좋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싸우는 것은 좋아했다.
카앙!
한걸음에 다가가 휘두른 검을 남자는 쉽게 막아 냈다.
휘익.
그는 내 얼굴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와, 설마 동안은 아니겠지? 어디서 이런 놈이 나타난 거야?"
그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고는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훨씬 일이 잘 진행되었다.
상대는 내 생각보다 더 싸움을 좋아했고, 더 다혈질이었다.
그는 다른 일을 제쳐두고, 나와 싸우는데 정신이 팔려버렸다.
캉! 카앙!
분명, 내 예상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기는 한데…….
"큭!"
"와, 생긴 대로 어린 거 맞아? 믿기지 않는데?"
까앙!
"정말 대단해! 좀 더 실력을 발휘해봐!"
젠장, 상대는 신이 나서 검을 휘두르는데, 나는 그 검을 막기에 급급했다.
실력이 좋을 것 같기는 했는데, 이렇게까지 좋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상대는 유적에서 보았던 왕실 기사단의 선임 기사보다도 강해 보였고, 공작가의 기사단장과 붙어도 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상대도, 나도 제대로 장비를 갖추질 못해서 제대로 된 실력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밀리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기껏 실력에 자신감이 붙었는데, 어디서 이런 실력자가 나타나 버렸는지.
우물 안 개구리도 아니고.
설마 제국에는 이런 실력자들이 득실거리는 것은 아니겠지?
깡!
퍽.
이를 악물고 상대하는 와중에 내가 들고 있는 검이 조금씩 깨져나갔다.
잘 정련된 검이었지만, 이런 평범한 검으로는 제대로 된 실력자를 상대하기는 힘들었다.
그렇다고,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단검이나 대검을 꺼낼 수도 없고, 마찬가지로 숨겨진 다른 능력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검을 막다 보니, 결국 아카데미에서 가져온 검이 박살 나 버렸다.
쨍그랑!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끊어져 버린 검에 눈살을 찌푸리니, 내 검을 박살 낸 남자는 나보다 더 아쉬워했다.
"젠장, 한참 재미있었는데. 빨리 다른 검 가져와. 너도 아직 몸이 덜 풀렸잖아."
아니, 내 생각보다 훨씬 싸움에 미친 놈이었다.
하지만, 나는 더 싸울 생각이 없었다.
"모두 검을 버려라! 소란죄로 모두 체포한다!"
늦지 않게 병사들이 몰려온 것이다.
뒤늦게 나타났던 제국인들도, 나와 싸우던 남자도 병사들이 몰려오자 모두 검을 내려놓았다.
"으악. 살살 좀 부탁해요. 다리가, 다리가."
바닥을 뒹굴던 용병들이 하나둘 끌려가고,
"아니, 저희는 도와주러……."
"방금, 싸우는 모습을 봤는데 무슨 소리냐!"
뒤늦게 등장한 제국인들도 나와 싸운 남자 때문에 덩달아서 끌려가게 되었다.
"어? 이렇게 되는 게 아니었잖아?"
"전부, 비드 님 때문이잖아요! 왜 거기서 흥분해서!"
"아니, 그 정도 실력자와 만났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 봐, 나보다 어리잖아. 어디서 이런 싸움을 해 볼 수 있겠어!"
그 남자는 동료들과 끌려가면서도 나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죠?"
공주는 난장판이 된 거리를 둘러보며 황당해했고, 대공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흠, 혹시 뭔가 더 알고 있는 게 있나요? 괜히 나선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발레아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나에게 속삭였다.
솔직히 이번에는 뭔가 미리 알고서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즉흥적으로 움직인 것들뿐이었다.
다만, 이번 일은 좀 어설프기는 했지만,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저 용병들은 왕국 용병들처럼 꾸몄지만, 분명 왕국에 덤터기를 씌우려는 사람들이었고, 뒤늦게 등장한 제국인들은 용병들을 제압하는 정의의 기사 역할이었다.
그리고, 정의의 용사가 구하려던 사람은 용병들이 기필코 접근하려 했던 대공녀가 분명했다.
대공녀의 손에 들린 유물은 다시 조용해져 있었다.
유물이 전격을 흘리는 것을 다른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여러 가지 일로 복잡해졌지만, 지금 당장은 행패를 부린 용병들이 고맙게 여겨졌다.
여기까지 와서 찾으려 했던 '유물을 수리할 수 있는 상속능력자'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용병과 제국인들이 끌려간 뒤, 엉망이 된 상점가는 빠르게 정리되었다.
상품들이 부서지고, 가게가 망가진 노점상들은 무척이나 억울해했지만,
아쉽게도, 공국도 이 세상도 그런 사람들에게 보상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다음날을 기약하며 집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우리도 돌아가기로 했다.
이 정도 소란이 있었는데, 나들이를 계속하기는 어려웠다.
다행히 이런 소란에서도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왕립 아카데미 교복을 입고 있기는 했지만, 이곳 공국에서 왕국의 공주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고, 계속 아팠던 대공녀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는 다음 나들이를 약속한 뒤에 각자 숙소로 돌아갔다.
* * *
그날 오후.
거리에서 벌어진 소란은 집무실에 있는 공국왕에게도 전달되었다.
물론, 소란이 컸다는 이유로 이번 일이 공국왕에게까지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왕국에서 온 용병들이 거리에서 행패를 부리고, 내 딸이 그 행패에 휘말리려 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제국인들이 내 딸을 구해 주었다라."
공국왕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보고서를 소리 내 읽었다.
"네. 여러 정황을 모으니, 원래 계획은 그런 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고 여겨집니다."
공국왕 앞에는 장년의 귀족이 서서 보고서의 내용을 왕에게 설명했다.
"그런데, 전부 어그러져서 둘 다 감옥에 처박혔다 이거지. 아직 감옥에 있나?"
"벌금을 내고 바로 풀려났습니다."
"내 딸이 위험해졌는데, 벌금으로 풀려났다고?"
왕의 눈이 슬쩍 위로 올라갔다.
왕의 표정이 달라졌지만, 귀족은 담담하게 계속 이야기했다.
"아마, 감옥에 갇힐 것까지 계획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위에서 알아차리기도 전에 담당자가 빠르게 처리했습니다."
"제국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군."
"저희는 수백 년 동안 제국과 붙어서 교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국인들도 많이 살고 있고, 제국의 속국이 되자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래서 제국 놈들이 내 딸 앞에서 장난을 쳐도 가만히 있는 거잖아."
"그래서 왜 일이 어그러진 거지?"
"공주님의 친구분들 실력이 상당했던 모양입니다."
"그래? 내 딸은 가만히 있었고?"
"네. 따로 들려온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어차피 아카데미에 다니는 애들일 뿐이야. 역시, 제국에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야. 이렇게 어설프게 일을 벌일 놈들이 아닌데 말이지."
"협상 내용도 전과 달리 강압적이라고 들었습니다."
"강압적이라기보다는 이쪽도 서두르는 눈치야."
"그럼, 좀 더 뒤로 물러서서 상황을 보실 생각이신지……."
"아니, 그래서야 줄이 끊어질 뿐이지. 앞에 있는 놈이 급하다면 뭔가 선물을 더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계속 진행해 봐."
"알겠습니다. 따님에게는 언제 말씀하실지……."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나가봐."
"알겠습니다."
중년의 귀족이 집무실을 나서자, 잠시, 벽에 걸린 그림을 보던 공국왕은 시선을 돌려 책상에 쌓인 서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벽에 걸려있는, 화목해 보이는 가족의 초상화가 일을 하는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