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제24편 아니, 유물이 왜 거기서…… (1)
대공녀와 공주, 발레아와 나는 여러 하녀들과 호위와 함께 성을 나섰다.
확실히 카를로스 왕국보다 공국이 훨씬 자유스러웠다.
대공녀의 곁에서 호위를 서는 기사 둘을 제외한 다른 기사들은 변복을 한 채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우리를 호위했다.
전생에 TV에서 보았던 위장 경호원이라고 할까.
왕국이었으면 기사들과 병사들이 공주를 에워쌌을 텐데, 공국은 생각보다 융통성이 있었다.
공국의 기사들을 믿었는지, 호위인 나를 믿었는지, 공국에 같이 왔던 왕실 기사들은 이번 외출에 같이 참여하지 않았다.
왕실 기사들은 전방 초소에서 하비에르 선배를 굴리느라 바쁘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공주도 실력이 있는 상속능력자였으니, 그다지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되어, 공주와 대공녀의 행차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럭저럭 대단한 귀족 가문 소녀들의 나들이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 덕분에 공국 수도 구경은 제대로 구경할 수 있었다.
귀족 가문의 행차는 함부로 대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렇다고 대단한 귀족이나 왕족이 나타났을 때처럼 다들 땅바닥에 엎드리지도 않았다.
어느 정도 예의를 지키면서도 평소와 그리 다를 바 없는 모습에 아이샤 공주도 무척이나 즐겁게 거리를 구경했다.
공국의 수도는 들어올 때도 보았지만, 무척이나 활기찼다.
주택가도, 관청가도, 상점가도, 사람들로 북적였고, 어디를 가도 노점상이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어수선하지만, 다들 먹고 살려고 하는 건데요. 세금도 잘 내시는 분들을 한쪽에 몰아넣을 수는 없죠."
공주의 말에 노점상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노점상 한쪽에 관청에서 허락했다는 허가증이 걸려 있었다.
세금만 내면 어디서 장사를 해도 되는 건가?
정부야 세금만 받으면 문제없겠지만, 그래서야 노점들 관리가 가능할까?
그런 의문이 들었고, 때마침 공주가 말했다.
"그렇다고 아무 데나 노점을 세우시지는 않아요. 중요한 건물 앞이나 중요한 일을 하는 분들 집 앞은 다들 알아서 피하시더라고요."
과연 알아서 피하는 걸까.
어떻게 노점을 관리하는지 궁금했는데, 대공녀의 말에서 방법을 알게 되었다.
겉으로는 자유롭지만, 계급과 힘으로 물밑에서 노점을 관리하고 있었다.
뭔가 달라 보였지만, 공국도 왕국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곳곳에 보이는 노점은 상점가로 들어서자,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상점가에는 전생에 보았던 시장처럼 노점이 늘어서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노점들 앞에 서서 가격을 흥정하고 있었다.
공국인들에, 왕국에서, 제국에서 온 사람들. 그리고, 먼 나라에서 온 것 같은 특이한 옷을 입은 사람들도 보였다.
공주와 발레아는 처음 보는 광경에 대공녀의 팔을 붙잡고 노점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나도 이쪽 세상에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생각해 보면 카를로스 왕국이 상업적으로는 얼마나 답답한 곳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고, 반대로 공국왕의 대단함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밝았다. 물건을 사는 사람들도, 노점상들도 전체적으로 신이 나서 거래를 하고 있었다.
물밑으로 폭력이, 계급이 흐르든 간에, 이쪽 세상은 사람들을 굶기지 않고, 표정을 밝게 만들면 그 왕은 성군으로 인정받는 곳이었다.
그런 의미라면 공국의 왕은 성군이라 불릴 만했다.
귀족 영애들은 노점들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물건들을 구경했다.
처음에는 대공녀가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며 소개를 하려 했지만, 어느새 그녀도 노점 물건들을 보는데 빠져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특히 그녀는 유물에 관심을 보였다.
"이 물건은 남쪽의 오래된 유적에서 출토한 유물입니다. 아직 활용 방법은 알아내지 못했지만, 알아내는 사람이 있다면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노점상 한 명이 낡은 은촛대를 들고 떠들자, 대공녀가 고개를 저었다.
"유물이 아니에요. 대전쟁 이후에 만들어진 남쪽 지방의 촛대일 뿐이에요."
"무슨 망발을! 헛소리로 장사를 망하게 할……."
그녀의 말에 노점상이 화를 내려다가 옆에 서 있는 기사들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이 장신구도 평범한 장신구인데요? 보석을 다시 낀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을 거예요."
"……."
그 옆의 노점상도, 다른 노점상도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입을 굳게 닫았다.
공주와 발레아는 대공녀의 말에 연신 감탄했지만, 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곳에 오는 손님들도 이 물건들이 진짜 유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터였다.
어차피 속이는 것을 알고서 팔고, 사는 물건들이었다.
슬쩍 눈치를 보니, 발레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공주와 함께 감탄사를 터트릴 뿐, 감탄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나보다 낫네.'
발레아에 대한 감탄은 제쳐두고, 대공녀가 의외로 유물을 자세히 아는 것 같았다.
경매장 주인처럼 능력으로 유물을 파악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하나 눈으로 살펴보고 알아맞히는 것을 보니,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차라리 대공녀에게 물어볼까?'
나중에 시간이 나면 슬쩍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물건들을 구경하다가, 대공녀가 한 곳에서 발을 멈추었다.
다른 물건들보다도 더 낡고 망가져 보이는 물건이 그녀 앞에 놓여 있었다.
다들 다른 구경을 하느라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나는 대공녀가 왜 멈추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도 같은 물건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건을 보던 대공녀가 입을 열었다.
"어, 이건 망가지기는 했지만……."
아차.
"이건 완전히 망가진 것 같은데요."
나는 그녀가 다 털어놓기 전에 앞으로 나섰다.
대공녀가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여태까지 예의를 다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 갑자기 나선 내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노점상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여기 계신 영애께서 관심이 있어 보이니, 이 물.건.은 제가 사겠습니다. 얼마입니까?"
"어, 그게 이 유물은……."
"확실히 유물이 맞습니까?"
유물이 맞았다. 내가 봐도 망가진 게 분명했지만, 유물은 확실했다.
그렇지만, 노점상은 그걸 알지 못했다.
내 말에 노점상은 같이 있는 기사를 훔쳐보았다.
"어쨌거나 멀리서 사 온 겁니다. 싸게는 못 드립니다."
노점상은 물건의 가격을 불렀다.
싼 가격은 아니었다. 유물 혹은 망가진 유물 가격만큼은 아니었지만, 평범한 골동품 가격치고는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다.
하지만, 나는 가격을 깎지 않았다.
"왕국 금화도 받죠?"
"물론이죠."
제 가격에 팔게 되자, 노점상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나를 훌륭한 호구로 인정하고 물건을 곱게 싸서 나에게 주었다.
"두 분의 징검다리가 되는 선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거기다 한껏 도를 지나쳐버렸다.
민망한 상황이었지만, 나는 그 김에 선물을 건네주었다.
"공국 방문 선물로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제대로 된 유물이 아니라, 망가진 유물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싼값에 인상을 남길 수 있다면 제대로 된 유물이 부럽지 않았다.
대공녀는 내가 건네준 선물을 쥐고, 나를 쳐다보았다.
다만, 표정이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공주도 발레아도 우리 두 사람을 쳐다보았고, 대공녀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사람이 적은 곳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이 물건은 유물이 맞아요. 망가지기는 했지만."
"알고 있습니다."
"네? 알고 있었다고요? 그런데 왜 저를 말렸죠?"
대공녀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더 화가 나 보였다.
하지만,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유물이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내 말에 대공녀는 눈을 깜빡였다. 그건 생각해 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건……."
망가졌다고는 하지만, 유물이라는 소리에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를 거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우리에게 향할 것이다.
사람들이 몰려들면, 기사들이 나설 테고, 당연히 오늘 외출도 여기서 끝이 날 게 분명했다.
다행히 내가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대공녀는 금방 깨달았다.
"아, 그래서…….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대공녀가 사과했다.
공주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히 똑똑한 여자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른 이유보다, 돈이 아까워서가 제일 큰 이유였다.
망가진 유물에 큰돈을 쓰다니!
이미 한 번 유물로 패가망신에 가까운 돈을 쓴 나로서는 그 꼴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대공녀에게 이야기를 들은 공주는 감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발레아는 몰래 손가락으로 원을 만들어 보여 주었다.
돈 때문에 그랬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발레아가 뭐라 하든 간에, 나는 꿋꿋하게 표정을 유지했고, 대공녀는 선물의 포장을 벗겨내고, 망가진 유물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건 무슨 유물인가요?"
공주의 물음에 유물을 한참 동안 살펴보던 대공녀가 대답했다.
"원래, 철퇴 종류의 유물인데, 자루도 부러지고, 송곳들도 다 뭉그러졌네요. 그리고, 전격을 쏘는 기능도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망가져서 쓸 수는 없네요."
결국 망가진 유물이었지만, 대공녀는 유물을 보며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역시, 좋은 선물이었다.
그렇게 유물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시끄러웠던 주변이 조용해진 것을 느꼈다.
내가 제일 먼저 고개를 들었고, 이어서 기사들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왜 갑자기 조용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유물을 살피던 짧은 시간 동안, 사람들이 확 줄어 있었다.
거기다, 남아 있는 사람들의 표정도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대신, 험상궂은 사람들이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거친 갑옷에, 피 묻은 무기들을 멘 용병들이 상점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저런 용병들이 다가오니, 사람들이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노점상들은 장사를 망쳤다고 구시렁거리고 있었고.
조용히 다가오던 용병들은 우리와 가까워지자 하나둘 떠들기 시작했다.
"염병, 우리 왕국에서 번 돈들이 다 이 공국 놈들에게 넘어간다는 거지?"
"왕국 물건들을 파는데 왕국에는 돈 한 푼 안 낸다더라고요."
"아니, 공국이라고 하지만, 어차피 우리 왕국 땅이잖아."
"그렇다니까요. 더구나 제국에 붙어먹는 놈들도 태반이래요."
한두 명씩 떠들던 용병들은 어느새 신이 나서 노점상들에게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와그작!
찡그랑!
"무슨 짓이야!"
"경비대를 불러!"
"악! 내 다리!"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과 물건들이 부서지는 소리, 그 와중에 사람들에 휩쓸려 다치는 사람들.
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못하게 막아요!"
당연히 대공녀가 나섰다.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던 기사들이 나서서 용병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넌 뭐야!"
"보통 놈이 아냐!"
"젠장, 나도 보통은 아니란 말이지!"
하지만, 예상과 달리 싸움은 일방적으로 흐르지 않았다.
용병들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수라장에 아수라장이 더해졌고, 우리도 싸움에 휩쓸리게 되었다.
나는 검을 꺼냈고, 공주도 하녀가 건네주는 검을 들었다.
"이게 뭐람. 아무리 봐도 평범한 깡패들은 아닌 것 같은데요."
발레아가 슬쩍 마나를 움직이며 나에게 투덜거렸다.
그녀 말대로였다.
기사들을 맞상대하는 용병들이 흔할 리 없었고, 그런 용병들이 이런 곳에서 깽판을 부릴 리도 없었다.
용병들은 싸우면서 다가오고 있었고, 거기다, 그들은 멀리 제국인 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슬쩍슬쩍 눈도 맞추고 있었다.
용병들의 연기는 훌륭했고, 발레아 빼고는 다들 그들의 연기에 속았지만, 웹소설에 단련된 나는 속일 수 없었다.
이쪽 세상에서는 드문 일이겠지만, 나에게는 평범한 클리세에 불과했다.
그래서 나는 용병들의 뛰어난 연기 대신, 다른 장면에 정신을 빼앗겨 버렸다.
나는 대공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다가오는 용병들을 노려보는 대공녀의 손에는 망가진 유물이 들려있었다.
과거 철퇴였다고 들은 유물이었지만, 그 모습을 알아보기 힘든 골동품이었다.
그 망가진 유물이 푸른 빛을 튕기고 있었다.
파팟.
푸른 스파크.
망가진 유물에서 전격이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