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제23편 소녀들의 담화
다음날.
숙소에서 일어난 나는 세면을 한 뒤에 옷을 점검했다.
어차피 아카데미 정복이긴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흠을 잡힐 수는 없었다.
더구나 오늘부터는 왕궁에서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내가 왕궁에 남은 이유는 공.식.적.으로 공주의 호위 기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파견 수업과 어울리지는 않지만, 오늘부터 열심히 공주를 따라다녀야 했다.
아니, 다른 사람들은 내가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에는 공주의 호위 기사가 되리라 생각할 테니, 오히려 어울린다고 생각하려나.
"더군다나 오늘은 공주의 사촌을 처음 보게 되는 날이니."
호위일 뿐이지만, 괜한 트집이 잡힐 필요는 없었다.
거울을 보며 전부 확인한 뒤에, 마지막으로 나는 아카데미 제식 검을 허리에 차고 방을 나섰다.
공주의 호위라는 명목이 있기에 왕궁 안에서도 검을 찰 수 있었다.
이 세상의 귀족들은 무기가 없어도 다들 한가락들을 하는지라, 이런 검 정도는 크게 개의치 않기도 했다.
물론, 나도 이 검 하나만 가지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목에는 목걸이를 차고 있었고, 손가락에는 반지를 꼈다.
거기다, 가슴팍에는 유물 주머니가 숨겨져 있었다.
유물 주머니에는 대검과 단검이 다 들어 있었다.
따지고 보면, 지금 나는 갑옷이 없을 뿐이지 완전 무장에 가까웠다.
공주의 방은 내 방과 가까웠다.
호위해야 했으니, 방이 멀 리가 없었다.
덕분에 주제에 안 맞는 고급스러운 방에서 잘 수 있었다.
"안녕하시네요. 알렉스 공자아아아님!"
공주의 방 앞에서 만난 드레스를 입은 발레아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설마, 술 취한 건 아니겠지?
"왕궁에서 처음 자 봤는데요. 이렇게 좋은 방이 있다니.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자기 전에 한참을 뒤척였다니까요. 물론 잠도 잘 잤지만요. 거기다 이렇게 멋진 드레스라니."
그녀는 내 앞에서 드레스를 잡고 그 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솔직히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녀의 본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이상한 감정은 눈곱만치도 생기지 않았다.
잠시, 앞뒤가 안 맞은 호들갑을 떨던 그녀는 금방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음, 음, 역시 공자님을 따르기를 잘한 것 같아요.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으려나."
물론, 평소에 내게 보여 주는 모습도 그리 정상은 아니었다.
잠시 뒤에 공주가 밖으로 나왔다.
공주도 드레스 차림이었다. 발레아와 달리, 공주는 인형처럼 보였다.
발레아가 다시 가식이 가득 찬 모습으로 변했다.
"세상에나, 공주님 너무 아름다우세요."
그녀는 치마를 잡고, 품위 있게 머리를 숙인 뒤, 인사로 공주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오늘은 무슨 3단 변신이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공주에게 인사를 했다. 가슴에 손을 올리고, 예의에 맞는 말을 올렸다.
"문안드립니다. 지금부터 호위를 시작하겠습니다."
내 말에 공주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발레아도 눈을 흘겼지만, 오늘의 목표는 제대로 된 호위 기사였다.
할 일이 태산인데 눈곱만큼도 흠이 잡힐 수는 없었다.
공주가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던 하녀가 우리를 안내했다.
공주와 발레아와 나는 안내하는 하녀를 따라 왕궁의 복도를 걸어갔다.
왕궁 복도는 이번에 겨우 두 번째 걷는 것이었지만, 왕국의 왕궁과 공국의 왕궁 분위기는 상당히 달랐다.
좀 더 활기차고, 조금은 자유롭다고 할까. 건국한 지 얼마 안 되는 나라의 자유스러움이 느껴진다고 할까.
아마, 왕국의 귀족들이 보면 예의를 모르고 어수선하다고 하겠지.
그리고, 다른 점이 또 있었다. 왕국과 조각도 문양도 사람들의 의상도 왕국과 조금 달랐다.
제국 쪽 디자인이었다.
오랫동안 제국과 붙어 교역을 해왔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섞여 있으리라는 것은 예상 못 했다.
분명, 이 왕궁은 공국이 된 뒤에 새로 만든 왕궁이었다.
왕국에서 건너온 공국왕이 만든 왕궁인데, 이렇게 제국의 형식이 섞여 있다니.
이 공국 사람들이 고집을 부린 걸까? 아니면 공국왕이 이렇게 만들라고 지시를 내린 걸까.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대신 나는 귀를 활짝 열었다. 직접 물어보기 어려우니 최대한 소문을 모아야 했다.
어제 방을 안내하던 하녀에게도, 오늘 아침 식사를 내어준 하녀에게도 은근슬쩍 물어보았지만, 유물을 수리할 수 있는 공작의 가신에 대해서는 전혀 들을 수 없었다.
들을 수 없는 게 당연하기는 했다. 그녀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왕궁의 소문을 더 알 수 있다고 해도, 왕국에서 온 손님에게 말을 할 리가 없었다.
'다른 곳에 간 선배들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할 것 같네.'
설명할 방법이 궁색하기는 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파견 수업 2주 동안에 조그마한 단서라도 찾아야 했다.
후작가에서 일을 벌였던 용병들이나, 목걸이를 만든 단체같이 제국과 연관된 일들에 대해 조사도 해봐야 했지만, 그쪽은 너무 스케일이 커서 대충 풍문 정도만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귀를 열고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이샤 데 카를로스 공주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문 앞에 서 있던 기사가 마나를 실어 말을 하자, 응접실 문이 열렸다.
문 양쪽으로 하녀들이 인사를 하고, 공주와 발레아가 문 안으로 들어갔다.
"호위는 들어가면 안 됩니다."
이어서 내가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문을 지키던 기사가 나를 막아섰다.
어라,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건가.
생각해 보니, 호위라면 문밖에서 지키는 게 당연했다.
"괜찮아요. 들어오라고 해요. 호위가 아니라, 아이샤의 친구로 온 거예요."
문 안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공주와 친한 사촌치고는 조금 성숙한 목소리였다.
제대로 호위 역할을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이번만 호위 겸 친구가 되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공주와 발레아가 나를 보며 눈으로 웃었다.
"편지에 썼던 것보다 더 친해 보이네요. 내가 모르는 일이 또 있었어요?"
응접실 안쪽 소파에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10대 중반에서 후반 정도. 나이를 종잡기 어려운 소녀였다.
이방의 주인 자리에 앉아 있는 소녀이고, 공주와 친한 소녀면 한 사람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알렉스입니다. 대공녀님을 처음 뵙습니다."
"프리다예요."
내 인사에 그녀는 가볍게 답례했다.
그렇게 내 인사를 끝으로 세 소녀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공주의 친구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소녀들 사이에 끼어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리저리 끼어들어 대화를 나누는 발레아가 더욱 대단해 보일 정도였다.
나는 뒤로 물러나 그녀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았다.
"오는데 힘들지 않았어요?"
"아뇨. 정말 편했어요. 그보다 몸은 좀 어때요? 전에 안 좋아졌다고 해서 많이 걱정했어요."
"지금은 괜찮아요. 걱정을 끼쳐서 미안해요."
"……."
이야기를 들으니, 대공녀는 나보다 한 살 나이가 많은 것 같았다.
펜팔 친구치고는 나이 차이가 컸지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니, 나이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공주가 얼마나 어른스러운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항상 긴장하던 공주도 긴장이 조금 풀린 것 같았다.
실제로 본적은 한 번밖에 없었다는데, 신기하게도 금방 친해졌다.
"그건 오랫동안 편지를 나눈 덕분이에요."
발레아가 비슷한 질문을 하자, 프리다 대공녀가 대답해 주었다.
"아이샤 공주도, 나도 편지에 속마음을 많이 이야기했거든요."
대공녀의 말에 공주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대공녀 앞에서는 공주의 표정이 다채로웠다.
나나 카트린과 있을 때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른 곳에 있을 때보다는 무척이나 편해 보였다.
편지에 쓰지 못한 그동안의 이야기들, 그리고, 아카데미 이야기들로 소녀들은 무척 즐거워했다.
그런데, 대공녀가 전부터 많이 아팠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어머니, 공국의 왕비가 죽은 뒤부터 아팠다는데, 다행히 지금은 괜찮아진 것 같았다.
공국왕은 카를로스 왕과 달리, 아내를 한 명만 두었다. 그 왕비는 아들과 딸을 낳고, 몇 년 전에 죽었다.
그 뒤로 후처를 들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공국왕은 지금까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야기 사이에 내가 대공자, 아니 공국의 왕세자에 관해 묻자, 대공녀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오라버니는 무척 바쁘세요. 다음 대 공국을 다스릴 분이니 벌써부터 쉴 틈이 없어요. 제가 도와드려야 하는데, 그동안 몸이 안 좋아서 계속 죄송스러웠어요."
왕세자를 보여 주지 못하는 게 미안한 건지, 아니면 그녀가 왕세자를 돕지 못한 것이 미안한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대공녀의 입에서 죄송하다는 말이 나오게 했으니, 그녀에게 사과했다.
괜한 질문을 했다고 사과를 하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정말 많이 좋아졌어요. 아바마마가 제국으로 유학을 할 생각이 있냐고 물어보실 정도예요."
"제국에요?"
대공녀의 말에 우리는 의아해했다.
제국으로 유학을 보낸다고? 왜?
"제국 아카데미 말인가요?"
"네. 건강해진 뒤에 여러 번 권유하셨어요."
"물론, 제국이야 대륙 제일의 강대국이긴 하지만, 그래도 왕립 아카데미가 있잖아요."
공주의 말대로였다. 어쨌거나 공국은 왕국 산하의 국가였다.
물론, 대공녀가 제국 아카데미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리 좋아 보이는 모습은 아닐 게 분명했다.
"솔직히 어머니가 제국 출신이시기는 하지만, 돌아가신 뒤에는 그곳에 아는 사람이 없거든요. 그래서 계속 미뤘는데, 정말 공주님 말대로 왕립 아카데미에 간다고 할까요."
"오세요. 다들 좋아할 거예요."
공주와 발레아가 대공녀에게 왕립 아카데미로 오라고 권유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냥 평범하게 생각한다면, 병이 나은 딸을 아내가 자라온 곳으로 보내 공부시키겠다는 생각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대륙 제일의 아카데미에서 공부시키고 싶은 생각이거나,
혹은, 대공녀가 왕국에 오면 인질이 될 거라는 생각이 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대공녀의 말은 내 뇌리에 머물면서 계속 나를 찜찜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봐도, 대공녀는 아직도 몸이 약해 보이는 평범한 소녀였다.
왜 제국에 보내려 할까. 이제 겨우 몸이 나은 딸을.
나는 그 점이 제일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강제로 가라고 하시지는 않으니, 좀 더 고민해 볼 생각이에요."
다만, 너무 과한 생각일 수도 있었다. 의심병이 또 도진 걸지도 몰랐다.
적중률이 꽤 높은 의심병이란 게 문제긴 하지만.
"맞다! 몸이 건강해진 뒤에는 궁 밖에 나가 구경도 많이 했거든요. 공국에 처음 오셨잖아요. 제가 여러분들을 구경시켜드릴게요."
대공녀는 우리에게 공국을 소개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함께 여러 가지 일을 해보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당연히 공주와 발레아는 즐겁게 그 권유를 받아들였다.
당연히, 나도 호위로 같이 가야하고.
이렇게 되면, 공주에게는 공국의 생활상을 파악하는 파견근무가 되려나. 발레아는 뭐라 이유를 붙일 방법이 없을 것 같고.
다만, 나는 제대로 호위를 할 시간이었다.
특별한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을 보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테니, 좀 더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평범하다면 평범한 파견 수업 첫날이 지나고, 평범하지 않은 다음 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