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제20편 공국으로 (1)
아카데미는 전생의 학교와 비슷한 점이 많지만, 다른 점도 무척 많았다.
그중에 하나. 정말 다른 것이 있었다.
왕실 아카데미는 전생의 학교와 달리, 방학이 겨울 한 번밖에 없었다.
수도에서 사는 학생들이 몇 없고, 영지에 다녀오려면 한 달 이상이 걸리는 학생이 태반이라 짧은 여름 방학으로는 집에 다녀오는 것도 어려웠지만, 이 아카데미는 여름 방학 자체가 없었다.
대신, '파견 수업'이라는 행사를 가을 2학기가 되기 전까지 진행했다.
역시, 이번 행사도 이름이 정말 별로였다.
거기다, 아카데미를 만든 초대 왕이 수업 이름을 직접 지어 주었다고 하니, 이 변변찮은 이름들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았다.
어쨌거나, '파견 수업'은 아카데미 학생들을 각 영지와 군부대, 마물들을 막고 있는 곳으로 보내서 경험을 쌓게 한다는 취지로 행하는 행사였다.
학생들에게 현장 경험을 시키고, 학생들을 섞어서 영지 간에 소통을 시키고, 학생들을 통솔하는 관리들을 통해 각 영지와 군부대들을 감찰하겠다는 여러 취지로 이루어진 행사였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이 '파견 수업'도 많이 변해 버렸다.
힘이 있는 대귀족들은 '파견 수업' 대상지를 자신의 영지로 만들었고, 아카데미에 다니는 자식들을 친구들과 함께 자신의 영지로 불러들였다.
그동안의 취지는 사라지고, 대귀족의 인맥 강화와 자신들의 휴식을 위한 행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그건 힘 있는 대귀족에게만 통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힘 있는 귀족 중에는 그레시아 공작도 있었다.
교수가 조장들을 앞에다 모아 놓고 칠판에 적고 있는 파견지에는 그레시아 공작의 영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히 마누엘 때문일 테고, 이건 공작이 아니라 마누엘의 어머니인 공작 부인이 힘을 쓴 게 분명했다.
"공작님 영지도 있네요. 공작님은 집으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그럼 시청에서 일을 보는 건가요, 아니면 공작님 저택에 있게 되는 건가요?"
칠판에 적힌 공작 영지를 보고, 옆에서 발레아가 계속 물어보았다.
딱히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아 나도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신, 깊게 고민을 했다.
마누엘과 같이 영지로 돌아가면 어떻게 되려나.
오랜만에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테고, 친한 기사들과 병사들과도 만나서 회포를 나눌 수 있을 거다.
전담 하녀인 플로라도 보게 될 테고, 예비 형수도 아직 집에 있다면 볼 수 있을 터였다.
'그 대신, 공작 나리도 보게 될 테고, 공작 부인과도 얼굴을 맞대야겠지?'
거기다, 마누엘이라면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을 공작 부인에게 다 털어놓을 게 분명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활약이었지만, 공작 부인에게는 무척이나 듣기 싫은 말일 테니, 저택에서 보내는 시간은 생각보다 괴로울 것 같았다.
거기다, 발레아까지 따라온다면…….
"음, 집에 가는 것은 보류."
절대 발레아와 어머니가 만나게 할 수는 없었다.
교수는 칠판에 계속 영지를 적어 나갔다.
경치로 이름 높은 영지도 있었고, 국경에 만들어진 군부대도 적혀 있었다.
왕국 서쪽에 있는 산맥 깊숙이 자리 잡은 부대도 보였고, 왕국의 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도면 공주님의 '파견 수업' 장소일 거다.
다른 대귀족들도 자기 영지를 파견 수업 장소로 삼는데, 왕족인 공주의 파견지로 '수도'를 빼놓을 리 없었다.
'그럼, 이번에는 안 따라가도 되려나.'
공주는 왕궁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지만, 왕비님도 계시니 이번 파견 수업은 왕궁에서 지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다.
어차피 파견 수업다운 일도 해야 할 테니, 다른 왕족들과 마주칠 일도 적을 테고.
거기다 왕궁 안에서는 위험한 일도 많지 않아 보였다.
왕께서 당장 죽지 않는 한.
'왕궁에서 눈칫밥을 먹기도 싫고.'
공작 서자가 왕궁에 가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랐다.
괜히 욕먹을 장소를 찾아갈 이유는 없어 보였다.
"차라리 공국으로 가는 조가 있으면 좋겠는데……."
"공국은 왜요?"
"이럴 때 아니면 가 보기 어려운 곳이잖아요."
발레아의 질문에 그럴듯한 이유를 끄집어냈다.
전생과 달리, 이 세상은 여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초인들이 있고, 전생의 중세시대보다는 살기도 괜찮았지만, 다른 영지,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은 전생보다 몇 배는 힘이 들었다.
"하지만, 공국 말고도 가 볼 만한 곳은 많잖아요. 경치가 좋은 영지들도 많고."
물론, 발레아 말대로 다른 영지들도 나쁘지 않았지만, 공국에는 꼭 가 보고 싶었다.
유물을 수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곳이고, 이리저리 비밀이 많아 보이는 곳이었다.
더구나 우리 왕국과 제국 사이에 있는 곳이라, 제국에 들어가지 않고, 제국에 대해 듣기에는 그곳만 한 곳이 없었다.
"어, 지금 적고 있는 곳, 훌리안 공국인데요?"
나도 지금 교수가 칠판에 적고 있는 지명을 보는 중이었다.
"그런데, 공국으로 파견 수업을 갈 수 있나요? 지금도 왕국 소속이긴 하지만, 이미 공국으로 독립한 거잖아요. 외국과 교류 수업도 아니고, 이게 가능한 건가?"
나도 그녀와 비슷한 의문이 들었다.
여태 공국으로 파견 수업을 간 적이 없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다.
공국이 만들어진 지 수십 년밖에 안 되었지만, 그 수십 년 동안 공국으로 파견 수업을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금?
지금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 칠판에 파견지를 다 적은 교수가 우리가 모두 듣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조장들에게는 어느 영지로 가게 될지 말해 두었다. 이제 조장들이 자신이 가게 될 영지를 발표하고, 조원들을 모집하도록."
인원이 부족한 조에는 조가 없는 학생을 강제로 붙이겠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교수는 말을 마쳤다.
이어서 조장들이 자신의 파견지를 이야기했다.
한 명씩 파견지를 말했고, 자신의 파견지를 수도라고 말하는 조장도 나왔다.
그 조장은 공주가 아니었다.
대신 옆에서 3학년 행정학부 수석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내 생각과 달리, 수도 파견은 왕궁이 아니라 행정부에서 제대로 구를 모양이었다.
그리고, 공주가 파견지를 말했다.
"제 파견지는 훌리안 공국입니다."
역시, 특별한 파견지가 등장한 이유는 특별한 학생 때문이었다.
"공국에 가 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혹시 알고 말씀하신 거예요?"
발레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이렇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공주가 자리로 돌아오고, 나는 공주에게서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들을 수 있었다.
"무도회에서 전부터 알고 지내던 분과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어요. 친한 사촌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어요."
사촌이라.
잠깐, 공주님의 사촌이면, 공주님 아버지는 왕이시니, 왕 동생의 자녀들.
그럼, 공국왕의 자제들을 말하는 거잖아!
설마, 알고 지내던 사람이란 게 무도회 끝날 때쯤에 공주와 이야기를 나누던 저택 관리인을 말하는 건가?
별일 아닐 줄 알고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이런 결과가 되어 버릴 줄이야.
"공국에 친한 사촌이 있거든요. 멀리 있어서 직접 만나기는 힘들지만, 편지로 계속 만나 왔어요."
예상대로 공국왕의 자녀가 맞았다.
"그분과 대화를 하다가 파견 수업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분이 이리저리 힘을 쓰셔서 공국에 갈 수 있게 된 거예요."
공주와 이야기를 나눈 귀족도 평범한 주택 관리인이 아닌 모양이었다.
왜 이리 알고 보면 대단한 사람들이 많은지.
나는 공주에게 왜 미리 말을 안 해주었는지 물어보았다.
"이번에는 개인적인 일이라 말씀 안 드렸어요. 집에 가실 것 아닌가요?"
안 가요. 안 가.
"먼 곳을 가는데 빠질 수는 없죠. 같이 가겠습니다."
나는 공주를 지키기 위해 같이 가기로 했다.
뭔가 다른 이유가 계속 머리를 스쳐 갔지만, 나는 공주를 위해 이 일을 결정한 것이다!
"같이 지내다 보니, 공자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 알 것 같네요."
"네? 공자님의 마음이라뇨?"
발레아의 말에 공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공주님을 더 열심히 지. 키. 시. 겠다고 결심하셨다고요."
다른 사람은 다 내 진심을 이해했지만, 발레아는 다른 뜻으로 오해한 것 같았다.
그냥 다른 데로 갔으면.
하지만, 그녀는 냉큼 같은 조가 되어 버렸다.
"저도 참가할게요. 공주님, 잘 부탁드려요."
"발레아가 같이 가 주면 저도 좋아요."
이렇게 1학년은 후다닥 정해졌고, 상급생은 유명한 3학년 학생이 후배를 데리고 와서 같이 가게 되었다.
"하비에르 기사 학부 3학년입니다. 2학년 행정학부 수석인 벤자민과 함께 공주님의 조에 참가를 신청합니다."
2학년 후배를 질질 끌고 온 3학년생은 기사 학부 수석으로 유명한 하비에르였다.
"저, 선배님은 조장을 안 하시나요?"
"공주님이 조장이 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조장을 포기했습니다."
"네?"
"실전 수업에서 공주님을 보고 기사도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때까지는 공주님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당신은 내 마스터입니다!'
라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바로 고개를 흔들어 환청을 지워 버렸다.
전생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무척이나 멋있는 선언이었지만, 공주는 조금 난감해 보였다.
아직 어린 공주에게는 하기 어려운 말이기도 했고.
하비에르의 낯 뜨거운 말 때문이었을까. 그가 끌고 온 2학년생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아니, 저는 조금 더 생각을……."
"쯔읏, 나하고 약속했잖아. 저번 일 보답으로 한 가지 해주겠다고."
하지만, 그는 다시 하비에르에게 뒷머리가 잡혀 공주 앞에 서게 되었다.
"아니, 이런 일일 줄 몰랐죠. 앞으로 진로 문제가……."
"괜찮아요. 원하시지 않으면 참가 안 하셔도 돼요."
공주가 그에게 미안한 표정을 짓자, 그는 난처하다 못해 울상이 되었다.
자신이 봐도, 자신이 공주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공주님, 제가 그렇게 말씀드리는 건 아닌데……."
이리저리 눈을 돌리던 벤자민은 결국 한숨을 쉬며 공주의 조에 함께하기로 했다.
"휴우, 저도 참가하겠습니다."
급하게 결정된 공국 방문이라 많은 인원이 같이 갈 수 없었다.
더구나, 어찌 되었든 간에 왕국의 공주가 공국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공주의 수행원들도 따라가야 했기에 이 다섯 명이 '공국 파견 수업'의 총 참가 인원이었다.
며칠 뒤, 아카데미 앞은 수많은 마차로 무척이나 번잡했다.
다들 '파견 수업'을 떠나는 학생들을 태우기 위한 마차들이었다.
잘나가는 귀족들에게는 솔직히 방학에 집에 돌아가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시무룩해 보이는 학생들도 많았다.
최전선 군부대로 가게 된 학생들도 있었고, 수도에서 여름 내내 펜대를 굴려야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마누엘은 예상대로 그레시아 공작령으로 향하는 조와 함께 영지로 돌아가게 되었다.
나는 마누엘에게 영지에 있는 식구들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솔직히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다.
따로 인편을 통해 소식을 전하고 있었기에 그가 안부를 전하지 않아도 별 상관은 없었다.
공국으로 향하는 우리 조는 왕실에서 내준 마차를 타고 왕궁으로 향했다.
왕궁에서 공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왕궁에는 공국까지 우리를 인솔할 관리가 와 있었다.
공국과의 실무를 담당하고 우리를 관리할 실무자였다.
예상과 달리 실무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니에르 자작입니다. 공국까지 여러분과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제2 왕자의 심복이자, 책사인 남자가 우리와 같이 공국으로 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