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제16편 경매장 (1)
다니에르 자작.
제2 왕자의 심복이자, 지저분한 일을 담당하는 책사였다.
제2 왕자에 줄을 선 덕분에 자작답지 않은 권세를 누리고 있다고, 경매장 주인이 준 종이에 적혀 있었다.
"이건 경고일세. 공주를 호위한답시고 설치고 다니면 경고 대신 다른 걸 받게 될 걸세."
참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유적에서도 그렇고, 누가 과격하게 일을 벌이는가 했더니, 여기 그 과잉 충성자가 있었다.
아니, 충성 때문에 일을 벌이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간신이라고 부르는 게 나으려나.
말을 마치고 그는 잡고 있던 손을 빼내려 했다.
그냥 가면 섭섭하니, 나는 그의 손을 꽉 쥐어주었다.
자작의 손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얼굴을 가득 일그러뜨렸지만, 나는 짐짓 모르는 척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나를 흘겨보더니,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연기가 들킬까 봐 그리 세게 쥐지도 못했다. 내가 생각해도 무척이나 소심한 복수였다.
어쨌거나 2 왕자의 심복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잘한 일이 분명했다.
더구나 들키지 않게 작은 복수도 했고, 이 정도면 무사히 넘어간 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쌓인 화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다른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작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마나를 귀에 밀어 넣고, 집중해서 듣고 있으니, 그와 다른 귀족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요새 무척 바쁘신 모양입니다."
"하하, 전부 왕자님의 앞날에 꽃길을 깔아드리고자 하는 충정 때문이지요."
"이리저리 걸리적거리는 자들 때문에 힘드시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뭐, 언제는 안 그랬습니까. 고리타분한 예법만 따지는 늙은이들이 대부분이니 솔직히 별로 걱정되지 않습니다."
"험험,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할 필요는……."
"뭐, 이곳에서 제가 한 말을 옮길 분은 계시지 않을 텐데요."
"그건 그렇지만……."
뻔하다면 뻔한 대화들이었다.
자작과 다른 귀족들은 교묘한 어조로 자신의 위치를 뽐내는 이야기와 적, 아마도 제1 왕자 쪽의 험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벌써 공주와 나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것 같았다.
하기야, 차기 왕이 되기 위해 두 형제가 신나게 치고받고 싸우는 중인데, 공주에게 신경 쓸 겨를이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영양가 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듣는 재미도 없어, 그냥 관심을 끊으려는 순간, 다른 이야기가 들려왔다.
"경매장을 가신다고요?"
"네. 오랜만에 크게 열린다는 모양입니다."
경매장을 간다고?
"초청장을 받으셨나 봅니다."
"왕자님께 드릴 유물들을 찾느라 몇 번 다녔었습니다."
"그러시군요.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제대로 된 경매도 아니잖습니까. 관리하는 자들이 용병 같은 무뢰배라는 말도 있고."
"그동안 별문제 없었습니다. 호위도 데리고 가니까."
"그럼, 이번에도 왕자님께 드릴 유물을 찾으러 가시는 건가요?"
"이번에는 왕자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유물이 나오는 모양입니다. 이번에는 저도 열심히 경매에 참여할 생각입니다."
왕자가 필요한 물건이 나온다라.
자작의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그러시군요. 그런데 무슨 물건인가요? 다른 분들에게도 말해 놓겠습니다. 괜히 여러 사람이 참여해서 가격만 올리면 곤란할 테니까요."
왜 경매장 이야기를 꺼내나 했더니, 경매가 시작되기 전에 귀족들끼리 담합을 할 모양이었다.
나는 귀를 더욱 기울였다.
담합을 할 유물이 뭔지 들어야 했다.
나는 경제 정의를 위해 저 담합을 분쇄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어떤 유물인지 들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경매장에 갈 생각이었는데, 꼭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그렇게 경매장에 대한 기대를 부풀리는 동안, 공주는 흰머리가 가득한 귀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보지에 적혀 있던 귀족이었다.
공국왕과 가까웠던 귀족으로 공국왕이 독립했을 때, 수도에 남아 왕의 저택을 여태껏 관리하는 늙은 귀족이었다.
공주와도 아는 사이였던 모양이었다.
늙은 귀족과 이야기하는 공주의 입에는 작게나마 미소가 걸려있었다.
나는 공주의 표정을 보고 더는 두 사람의 대화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생각보다 중요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휘말리게 되었다.
* * *
무도회는 큰 사고 없이 끝나게 되었다.
기분이 나빠 보였던 2 왕자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즐겁게 무도회를 즐긴 뒤 왕궁으로 돌아갔고,
왕자의 심복인 자작도 돌아갈 때는 완전히 나에 대해 까먹은 것 같았다.
왕자와 떨어진 뒤에 공주도 즐겁게 파티를 즐겼고, 귀족들도, 학생들도 저마다 뜻깊은 시간을 보낸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생애 첫 무도회를 끝내고, 며칠 뒤 휴일에 나는 다시 아카데미를 벗어나 서쪽 주택가로 향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경매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평범한 옷을 입고 평범한 마차를 탔다.
그리고, 머리에는 평범해 보이는 가면을 썼다.
초청장에 경매에 참여하는 사람은 반드시 가면을 쓰라고 적혀 있었다.
당연히 이런 경매장에는 신분을 숨겨야 할 사람이 많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사람 중에는 나도 포함되었다.
마차는 서쪽 주택가 안쪽으로 계속 들어갔다.
꽤 고급스러운 주택가였지만, 이상하게도 거리는 무척이나 한가해 보였다.
"빈집들이 많아서 그렇게 느껴질 겁니다."
내가 궁금해하자, 앞에서 마차를 몰던 마부가 내게 설명해 주었다.
"한때 영지를 가진 귀족분들 모두가 수도에 집을 가지는 게 유행이었던 때가 있었지요."
그레시아 공작가도 수도에 집이 있긴 했다. 물론 빈집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뭐, 수도에 올 일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고, 자식도 항상 왕립 아카데미에 오게 되는 것도 아니라서 고급 주택가에 빈집이 많이 생겼습니다. 이리저리 다른 사람에게 처분하기도 하지만, 귀족이 쓰던 집을 처분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마부의 설명은 전생에 택시를 탈 때 들었던 택시 운전사의 이야기 같았다.
시대와 장소, 차원이 달라졌는데 이렇게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니. 무척이나 신기한 기분이었다.
이 마차가 가는 곳도 빈집이었다.
한가해 보이는 거리 한곳에 마차들과 말이 가득했다.
나처럼 대여점에서 하루 빌린 마차도 보였고, 문양이 그려진 귀족 마차에, 용병들이 타고 다니는 말들도 한쪽에 묶여 있었다.
나도 그 마차들 사이에다 마차를 대고, 빈집을 올려다보았다.
경매를 위해 하루 빌린 집인 것 같은데, 여기서 보니 무척이나 커 보였다.
"경매가 돈이 많이 되는 건지, 아니면 귀족에 줄을 잘 댄 건지 모르겠네."
이렇게 큰 집을 구한 능력이 무척 신기하긴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은 뒤, 집을 향해 걸어갔다.
어떤 집을 구했던, 경매만 잘하면 그만이었다.
입구에서는 덩치들이 서서 초청장을 확인하고 있었다.
덩치들 가운데 나와 한바탕했던 덩치도 있었지만, 가면을 쓴 덕에 나를 못 알아보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치료는 잘 된 것 같았기에, 나도 그를 모른 척했다.
경매장의 모습은 내 예상과 달랐다.
오페라 홀처럼 단상이 있고, 사람들이 둘러앉아서 경매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 경매장은 그런 모양이 아니었다.
하기야 국가에서 공인한 경매도 아닌데 제대로 된 홀에서 진행할 리가 없었다.
대신 저택 1층 로비를 경매장으로 활용했다.
1층 입구 쪽엔 단상을 마련해 경매를 진행하는 곳처럼 보이게 했고, 로비 안쪽은 의자들을 배치해 경매장 분위기가 물씬 나게 했다.
로비 중앙 계단으로 올라가는 2층 통로 난간 뒤에 의자를 각각 두어 VIP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생각보다 참신한 모습에 고개를 젓고는 덩치들의 안내를 받아 가며 2층의 VIP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2층의 왼쪽 VIP석에 앉으니, 반대쪽 통로 난간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저쪽도 VIP인 모양이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가면을 쓴 젊은 사람이었다.
'저렇게 할 거면 가면을 쓸 이유가 있나?'
가면을 썼지만, 누군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감각을 깨워서 마나를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그는 무도회 때 입었던 옷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고, 가면도 눈 주위만 가려서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동작도 다르지 않았고, 입꼬리를 삐죽 올리는 모습도 무도회 때와 똑같았다.
무도회 때부터 보고 싶었던 다니에르 자작이었다.
어떻게 찾아야 하나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사람도 찾았고, 나는 편한 마음으로 경매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잠시 뒤 빈자리가 채워지자 저택의 입구 바로 앞, 임시로 만들어진 단상에 아는 사람이 올라섰다.
유물 거래를 할 때, 나를 안내했던 여자였다.
유물을 감식하던 자도 평범한 직원이 아니더니, 안내하던 여자도 평범한 안내원이 아니었다.
꽤 화려한 나비 가면을 쓴 그녀는 단상 위에 서서 경매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봉인지에서 일어난 불행한 사고로 유물 거래가 극도로 위축이 되었었습니다."
"덕분에 저희 경매장도 한참 동안 경매장을 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희 경매장은 그런 위기에서도 여러분의 성원에 보답하고자, 더 좋은 유물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늘 그 결과를 보여드리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인사말이 끝나자, 그녀는 바로 경매를 시작했다.
"이 유물은 얼마 전 유적에서 발굴한 것입니다. 살짝 마나를 넣으면 환하게 빛이 나는 허리띠로 밤길을 다닐 때도, 유적을 탐사할 때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지만, 특히 가면 파티 때 사용하면 모두의 시선을 모을 수 있습니다."
저 유물은 분명 내가 판 유물이었다.
정말 쓸모없어 보였던 유물이었는데, 경매를 진행하는 여자는 그 쓸모없는 유물을 지금 멋지게 포장하고 있었다.
"가면무도회의 별이 되고 싶은 분들은 바로 참가하시면 됩니다. 50골드부터,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이 올라갔다.
"50 골드!"
"50골드 나왔습니다!"
"100 골드!"
"바로 100 골드!"
"150 골드!"
…….
빠르게 올라가는 가격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충분히 예상하기는 했지만, 경매액은 내가 판 가격 이상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결국 팔린 가격은 내가 판 가격의 2배가 넘었다.
그렇게 계속 경매가 진행되면서 내가 판 유물들이 하나둘 팔려나갔다.
멋지게 포장을 해도 팔려나가지 않은 유물도 있었고, 내가 판 가격보다 적은 가격에 팔려나간 물건도 있었지만, 대부분 유물은 훨씬 비싼 가격에 팔려나갔다.
그래도 내 가슴에는 두둑한 금화가 담겨 있는 주머니가 있어서 속이 쓰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내가 판 물건들이 팔려나가고, 이어서 내가 모르는 물건들도 경매에 올라왔다.
나는 편한 마음으로 경매를 구경했다.
다니에르 자작, 아니 제2 왕자가 구하는 유물은 오늘 나오는 유물 가운데 제일 중요한 유물일 게 분명했다.
가장 중요한 물건은 제일 마지막에 나올 테니, 벌써부터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유물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이상한 물건이 경매에 올라왔다.
"이 물건은 유물은 아니지만, 유물을 가지고 계신 여러분이 정말 유용하게 쓰실 수 있는 물건입니다."
경매 진행자가 말한 대로 그녀의 손에 든 물건은 유물이 아니었다.
목에 걸 정도로 무척이나 작은 물건이었는데, 마치 아주 작은 보석함 느낌이 나기도 했다.
"원래 대부분 유물은 특정 개인에게 귀속되지 않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유물을 혼자만 사용하고 싶으신 분들이 많이 있으실 겁니다."
진행자는 물건을 들고, 뜬금없는 이야기를 계속 늘어놓았다.
"이 물건은 그런 분들을 위해 만들어진 겁니다. 제국에서 건너온 물건으로 등록한 특정 개인만 유물과 연결되도록 합니다."
이어진 본론을 듣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국에서 왔다고? 거기다 그녀의 설명이 내 머릿속을 간질거렸다.
"이 물건은 유물을 감싸서 다른 이들의 마나 전달을 막고, 등록한 개인의 마나가 흐르게 해주는 물건입니다."
그녀의 열렬한 설명에도 사람들은 모두 시큰둥했다.
진행자도 그런 분위기를 느꼈는지 조금 힘이 빠진 목소리로 경매를 시작했다.
"10골드부터,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예상대로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잠시 뒤, 한사람이 손을 들었다.
"10 골드."
그리고, 이어서 내가 손을 들었다.
"100 골드."
모두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나는 꼭 저 물건을 가져야 했다.
크기도 꼭 맞았고, 그녀가 설명하는 기능도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과 꼭 들어맞았다.
그녀가 들고 있는 저 목걸이 보석함은 내 목걸이, 피아르가 가지고 있던 마나를 폭주시키는 목걸이에 쓰이는 물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