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천재는 무한리셋 중-115화 (115/563)

제115화

제15편 무도회 (2)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온 제2 왕자는 자신의 옆을 돌아보았다.

전보다 조금은 큰 것 같은 공주가 담담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별 다를 바 없는 모습이지만, 왕자는 공주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샤는 재미없어? 오랜만에 나와 다니는데도 표정이 안 좋네. 어렸을 때는 그렇게 나를 따르더니. 귀여운 여동생이 나를 멀리해서 무척이나 슬퍼."

공주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공주의 손이 하얗게 변했다.

통증이 느껴졌는지 아이샤 공주는 몸을 움찔 떨었지만, 그뿐이었다.

마나를 돌리면 아픈 것은 없어지겠지만, 공주는 왕자 앞에서 실력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아, 아팠어? 말을 하지, 미안해."

왕자는 손에서 힘을 풀었다.

몇 년 전까지는 참 다양한 표정을 보여 주었는데, 갑자기 변해버린 성격 탓에 재미가 없어졌다.

차라리 제대로 겁먹은 표정을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지만, 평범해진 여동생을 상대하기에는 너무 바빴다.

지금도 오랜만에 저 무표정한 얼굴에 감춰진 여러 가지 표정을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공적인 일을 먼저 처리해야 했다.

"제2 왕자님께 인사드립니다."

"남작님도 오셨군요."

"저번에 봤을 때보다 한층 헌앙해지셨군요."

"남작님도 정정하십니다."

"……."

귀족들의 인사에 답례하면서, 자신의 계파와 형 쪽 계파를 확인하고, 중립 쪽 귀족들에게 슬쩍 언질도 건네보고…….

무도회에 들어오자마자,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형이 쓸만한 왕세자였으면, 이런 고생도 안 하는데…….

아니, 잘난 형이었으면 더 고생했으려나. 아니면 벌써 죽었을지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옆을 돌아보았다.

"너무 떨어지지 말렴. 오빠 옆을 지키고 있어야지."

여동생이 슬쩍 거리를 두려는 모습에 왕자는 작게 주의를 주었다.

"우애가 깊으시군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귀여운 여동생이라서요. 시집을 갈 때까지 잘 지켜줘야죠."

공주가 다시 왕자 옆으로 왔다.

왕자가 다른 귀족들에게 인사를 나눌 때, 공주는 조용히 그의 옆에 서 있었다.

그렇게 귀족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이번에는 학생들과 만날 시간이었다.

왕자와 공주까지 도착했고, 중요한 인사도 끝이 났으니, 지금부터가 무도회의 시작이었다.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고, 무도회장 중앙이 비워졌지만, 회장 중앙은 아직 텅 비어 있었다.

제2 왕자 눈치를 보느라 먼저 나서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왕자는 공주를 데리고 학생들에게 다가갔다.

왕자가 다가오자, 이제 1학년이 된 지 반년도 되지 않은 학생들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왕립 아카데미에 대단한 신입생들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왕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학생들에게 말했다.

"제가 사람을 잘 보는 편입니다. 한눈에 봐도 왕국의 대들보가 될 재원들이군요."

그의 부드러운 말에 학생들의 긴장이 조금 풀린 것처럼 보였다.

그제야 왕자는 학생 한 명 한 명과 대화를 나누었다.

"오, 마누엘 공자 맞죠? 그레시아 공작님의 둘째 아들. 정말 반가워요."

"오, 피루나 백작님이 자랑하시던 이케르 공자군요. 능력 활용이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왜 기사 학부를 갔나요?"

"오, 실력이 대단하신가 보네요. 브리아 양이라고 했죠? 부모님이 어떤 귀족이든 상관없어요. 브리아 양이 얼마나 대단한지가 더 중요해요."

왕자는 인사하는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과분한 칭찬을 해 주었다.

마음에 없는 말이 대부분이었지만, 이 정도의 칭찬은 해 줄 수 있었다.

형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긴 하지만, 왕세자인 형을 넘어서려면 마음에 없는 칭찬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었다.

다만, 기분 나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촌구석 귀족의 딸을 웃는 얼굴로 대하는 것도, 주제에 맞지 않는 멋진 옷을 입고 있는 반쪽짜리 귀족에게 말을 거는 것도,

고귀한 그에게는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알렉스입니다."

"반가워요."

왕자는 괜히 말을 붙일까 봐 대답만 간단히 했다.

다행히 주제도 모르고 치근덕거리는 놈은 아닌 것 같았다.

서자 놈은 꾸벅 인사만 하고는 바로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학생에게 인사를 받을 때였다.

옆에서 조금 전에 지나간 '서자'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도회가 시작되었는데, 아무도 춤을 안 추고 있네요. 공주님과 제가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왕자는 황당한 얼굴로 감히 공주에게 말을 거는 학생을 바라보았다.

왕자 뒤에 있던 귀족들도 놀라는 눈치였지만, 같이 있던 학생들은 놀라지 않았다.

이상한 상황에 왕자는 눈썹을 찡그렸지만, 더 놀라운 것은 공주의 대답이었다.

공주는 손을 내민 학생을 빤히 바라보다가, 손을 올려, 그의 손을 잡았다.

"춤을 신청해주셔서 감사드려요."

멀리서 보기에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에게 어린 소녀가 춤을 허락하는 훈훈하고 귀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춤추는 당사자들은 공주와 귀족의 '서자'였다.

무대 중앙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을 보고, 귀족들은 웅성거렸지만, 두 사람은 개의치 않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키 차이가 크게 나는 두 사람이었지만, 둘 다 앳된 얼굴이었기에 멋지기보다는 귀여워 보였다.

사람들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한 사람은 그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들었다.

그는 공주를 쥐고 있던 손을 바라보았다. 지금 기분은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빼앗긴 것 같았다.

왕자는 자신의 수하에게 손짓했다.

"누구지?"

가까이 다가온 젊은 귀족이 왕자에게 말했다.

"학생 신분으로 공주의 호위를 하는 귀족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귀족이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수하의 말에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라면 공주와 춤추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이해가 간다고 짜증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왕자는 그동안 공주 주변을 살피지 않았다.

공주가 카트린과 함께 아카데미로 달아난 뒤로는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각성도 제대로 못 했고, 알아서 왕궁에서 사라져 줬으니, 재미있는 장난감 하나가 사라진 아쉬움 정도일 뿐이었다.

지금도 별로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았지만, 기분을 나쁘게 한 상대는 언제나처럼 기억에 담아두기로 했다.

왕자는 공주와 춤을 추는 반편이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 * *

키가 크게 차이 나는 상대와 춤을 추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주변의 시선이 가득 모여 있는 상황이면 긴장은 몇 배나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육체 능력과 마나까지 열심히 사용해서 공주의 움직임에 몸을 맞춰야 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자 딱딱하게 굳은 공주의 몸이 풀렸다.

이어서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춤에 합류하기 시작한 덕분에 시선들도 분산되었다.

춤이 한결 편해졌다.

"좀 괜찮아졌나요?"

내 말에 꼬마 숙녀는 작게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내 질문도 그녀의 대답도 여러 가지 뜻이 담겨 있었다.

그 여러 가지 뜻을 물을 필요는 없었다.

춤을 추는 그녀는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나는 한 곡이 끝났을 때 바로 공주와 함께 무대 밖으로 나왔다.

춤추는 것도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내 육체와 마나 활용이라면 춤도 쉽게 출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자만이었다.

책으로 배우고, 설명을 듣고, 누나가 배우는 것을 훔쳐본 정도로는 춤을 제대로 배운 것으로 보기 어려웠다.

한 곡 정도는 겨우겨우 따라갔지만, 더 추는 것은 무리였다.

차라리 마물들에 둘러싸여 칼질하는 것이 편할 것 같았다.

나는 왕자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대신에 카트린 쪽으로 공주를 이끌었다.

공주가 왕자와 같이 있고 싶지 않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공주는 카트린을 보고,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카트린은 공주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 뒤에 카트린은 눈으로 나에게 감사했다.

모두 즐거워했지만, 아직도 이쪽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있었다.

제2 왕자의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설마 찍힌 건 아니겠지.'

저 드높은 자리에 앉으신 왕자님께서 별 볼 일 없는 서자를 신경 쓰실 리가 없었다.

거기다, 나는 기분이 좋지 않은 왕자를 보고도 별로 겁나지 않았다.

계속된 죽음으로 공포에 무덤덤해진 것이다.

'나도 꽤 망가져 버렸네.'

남들이 보면 담대하다고 했겠지만, 아무리 봐도 그리 좋은 현상은 아니었다.

위기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였으니까.

다행히 마나 감지나 다른 능력들 덕분에 아직 괜찮아 보였지만,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장담하기 힘들었다.

'뭐,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에고를 고치고, 레벨을 올리는 법을 알아내면 혹시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막막할 뿐이었다.

다행히 공주가 카트린과 같이 있다고 왕자가 직접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솔직히 왕자는 귀족들을 상대하느라 공주를 신경 쓰기 어려워 보였다.

공주도 이제야 파티를 즐기기 시작했다. 공주는 담소를 나누며, 차려진 음식을 맛보았다.

내가 보기에는 이제야 공주가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전에는 공주가 어린 나이에 아카데미로 오게 된 것은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왕자들 눈에 안 보이게 하기 위해서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공주의 아카데미 행은 생각보다 더 복잡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머리에 떠오른 궁금증을 바로 날려버렸다.

어차피 왕자의 손길에서 공주는 구해냈으니, 복잡한 이유 같은 것은 궁금해할 필요가 없었다.

괜히 들었다가 더 코가 꿰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조금 외진 곳에서 공주와 카트린을 보며 무도회를 즐기고 있을 때였다.

"알렉스 데 그레시아 공자님이시죠."

젊은 귀족이 다가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알렉스입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아, 제 소개를 안 했군요. 다니에르 자작입니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무척이나 기분 나쁜 눈이었다.

"신기하군요. 왕자님의 기분을 나쁘시게 한 사람이 궁금해서 찾아왔는데, 이따위 어린 '서자'라니."

나도 신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렇게 신랄하게 직접적으로 나를 비꼬다니. 이런 자리에서 들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한 말이었다.

그는 반대쪽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꾹 찔렀다.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무슨 행동을 하든지 항상 주위를 살피고, 조심해야 합니다. 모르고 한 일이겠지만, 방금도 왕자님의 심기를 크게 상하게 했으니까요."

나이 차이와 상관없이 나에게 존댓말을 하고 있는데도 전혀 존댓말 같지 않았다.

더구나 가슴을 찌르는 손가락은 왕자만큼이나 내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다.

기분이 안 좋아진 탓에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

눈을 아래로 깔고, 목소리를 떨고, 소리를 줄이고 그에게 물었다.

"혹, 혹시 왕자님이 보내신 건가요?"

오랜만에 꺼낸 겁에 질린 연기는 예상보다 만족스러웠다.

"왕자님이 '서자' 따위에게 신경 쓸 리가 없잖은가. 자네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왕자님의 눈에 불쾌한 것이 더 보이기 전에 미리 치워놓으려고 나선 걸세."

겁먹은 연기를 하니, 젊은 귀족은 바로 노회한 귀족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거기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