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제11편 유물 거래 (1)
'실전 수업'은 뒷이야기를 많이 남긴 채 끝이 났다.
우선, 학생들과 같이 봉인지로 떠났던 차이프리 백작과 기사단의 실종은 백작의 영지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뿐만 아니라, 수도의 분위기도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다시 수색대를 조직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백작위를 두고 후계자와 형제들이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는 말도 돌았다.
그렇게 수도와 정계는 백작과 기사단의 실종 때문에 부산스러웠지만, 왕립 아카데미는 '실전 수업'의 결과만으로 무척이나 만족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무려, 10년 이내에 처음으로 사상자 없이 무사히 끝난 '실전 수업' 이었다.
마물들이 적게 몰려온 것도 아니었고, 교수나 기사들이 도와준 것도 아니었다. 만약을 위해 준비해 둔 '강너머의 후퇴 작전'도 쓰지 않았다.
모두 실전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이 이겨낸 것이었다.
모두 만족스러운 결과에 기뻐했다.
학장과 교수들, 지원 나온 기사들도 오랜만에 나온 좋은 결과에 만족했고, 2, 3학년 학생들도 전과 다른 성과에 즐거워했다.
그들은 작년, 재작년 실전 수업 때 사망자와 부상자를 가득 경험했었다.
이번 해에는 친구와 동료들이 무사한 것에 그들은 무척이나 기뻐했다.
다만, 1학년 신입생들은 과거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첫 실전에 반쯤 넋이 나가서 며칠 동안 끙끙 앓았다.
좋은 결과에 참여한 학생들은 교수들에게 칭찬을 받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유독 빛이 나는 학생들이 있었다.
전부터 유명했던 기사학부 3학년 하비에르는 이번에도 훌륭한 실력과 조장으로서의 뛰어난 통솔력을 보여 주었다.
교수들은 그가 확실히 다음 세대 왕실 기사단장 자리를 충분히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 외에 상속 능력 학부 2, 3학년들 중에서도 몇몇 학생들이 성장한 자신의 실력을 자랑했고,
1학년 신입생 중에서도 눈에 띄는 학생들이 있었다.
상속 능력 학부에서는 그레시아 공작가의 차남인 마누엘이 뛰어난 광역공격을 보여주었고, 비슷한 고위 귀족들의 자제들도 모두 한 가닥 실력을 보여주었다.
기사 학부에서는 브리아와 이케르가 수업 시간 이상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거기다, 예상도 못 한 공주가 제 몫을 해냈다.
아직 10살밖에 안 되는 소녀에다가, 실력 있는 두 학생의 보호를 받고 있어서 다들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이와 달리, 담대히 마물들과 맞서 싸웠다.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보여 주지는 못했지만, 어린 나이와 각성한 지 몇 달도 지나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남들만큼 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만했다.
그렇게 사람들을 놀라게 한 학생들 가운데, 특히 더 빛이 나는 학생이 있었다.
그는 입학할 때부터 나름 유명했던 학생이었다. 오히려 나쁜 쪽으로.
그레시아 공작가의 '서자'에다가, 자신의 위치에 맞지 않게 공주와 친분을 자랑하던 신입생.
그는 애매한 위치와 소문 때문에 학생들에게 외면당하는 처지였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외면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모두의 예상대로 상속 능력 학부에 들어가지 못했고, 기사 학부를 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다른 학생들보다 훨씬 좋은 실력을 자랑했다.
이어서 학생들이 주변으로 하나둘 모여들더니, '현장 학습' 때에는 낙오한 학생들을 구해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거기다, 이번 '실전 수업'에서 그는 믿기 어려운 실력을 보여 주었다.
그는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며 몰려오는 마물들을 차례로 썰어버렸다.
그의 대검에 쓸려나가기 여러 차례. 마물들이 밀려오는 가운데 그의 정면은 텅 비어 있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위기에 빠진 다른 조들도 구해 주었고, 지친 학생들의 자리를 대신 맡아 주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이 공주를 보호하며 한 일이었다.
학생들 여러 명의 몫을 혼자 해낸 것이고, 기사 이상의 실력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그동안 소문만 무성하던 그의 실력이 제대로, 생각 이상으로 드러난 시간이었다.
* * *
'실전 수업'에서 돌아온 뒤로, 나를 보는 학생들의 시선이 또 한 번 달라졌다.
'현장 학습' 때는 뭔가 신기한 소문을 접한 사람들의 시선이었는데, 이번에는 부러움, 감탄 같은 것이 느껴지는 시선들이었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많이 설친 모양이었다.
'실전 수업'에서 나는 '마나 유형화'는 사용하지 않았고, 한계까지 몸을 혹사하지도 않았었다.
단지, 봉인 해제된 '마나회로 구축법' 속칭 마나심법을 최대한 활용했을 뿐이었다.
그 결과가 생각보다 너무 뛰어났다.
형인 마누엘은 차마 어떻게 된 것인지 묻지 못하고 내 주위를 얼쩡거리고 있었고,
카트린도 갑자기 성장한 내 실력에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다른 이들도 조금씩 나를 대하는 게 달라졌다. 발레아 정도만이 전과 같이 나를 대하고 있었다.
거기다, 공주마저 나를 대하는 게 전과 달랐다.
그녀는 '실전 수업' 이후로 나와의 애매한 거리감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면 그나마 다른 학생들처럼 대했지만, 둘만 있거나, 카트린과 셋이 있을 때면, 나를 대할 때 카트린에게 하는 것처럼 대하곤 했다.
카트린도 무척 놀란 눈치였고, 유적에서의 경험이 없었으면 나도 그녀를 대하기 쉽지 않을 뻔했다.
분명 특별한 일도 없었는데, 죽기 전 유적에서 같이 지낼 때보다 훨씬 더 가까워진 것 같아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때아닌 유명세에 시달리고 있을 때, 나는 다른 일들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중에 첫 번째는 유적에서 가져온 구슬을 살펴보는 일이었다.
그 구슬은 상속 능력을 시각화해주는 에고 유물. 마치 전생의 AI 같은 물건이었다.
"그래서, 너희들 에고는 용사들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물이라는 거야?"
나는 밤마다 기숙사 방안에서 방음벽을 치고는 구슬과 대화를 나누었다.
[중앙 에고 및 저희 보조 에고들은 영웅, 혹은 용사라 불리는 초능력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키텍쳐입니다.]
"유적에서 중앙 에고로 정보를 보내는 것을 보니까 너희들이 하는 것은 지원보다 관리에 가까운 것 같던데."
[더 나은 지원을 위한 관리일 뿐입니다.]
이렇게 구슬에 든 에고에 관해 묻기도 하고,
"그럼 혹시, 그 영웅, 용사라는 것도 고대 제국에서 만든 건가?"
[영웅이 되는 방법은 제게 정보가 없습니다. 다만, 영웅을 지원하는 에고로서 말하자면, 인간이 영웅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영웅, 용사에 대해 알아보기도 했다.
"그럼 고대 제국은 왜 멸망한 거야."
[정보가 없습니다.]
"마물이 뭔지는 알지?"
[네. 마물은…….]
"고대 제국의 귀족들은 어떻게 되는 거였어."
[자세한 정보는 없지만, 귀족이 되는…….]
거기다, 아쉽게도 에고가 알고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세상에 남아 있지 않은 고대 제국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나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용사와 상속 능력에 관해 물어보았다.
[관리했던 용사와 그들의 능력에 대한 정보는 현재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정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현재 부족한 마나와 한계에 다다른 수명을 복구해야 합니다.]
"결국 너를 고쳐야 한다는 말이군."
<기사형 영웅 능력자>로 표시된 내 능력의 성장을 위해서도 에고가 알고 있는 용사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봉인 중인 능력이 무엇이고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 알아야 했고, 능력의 레벨을 올리는 방법도 찾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이 구슬처럼 보이는 유물을 고쳐야 했다.
마침 가지고 있는 유물들도 처분해야 했다. 그쪽 사람들을 통해 유물을 수리할 수 있는 사람을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유물을 수리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하려나……."
솔직히 힘들어 보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나는 휴일에 유물을 거래하는 사람을 찾아갔다.
수도의 동쪽 상업지구 깊숙한 곳에 용병들이 이용하는 암시장이 있었다.
나는 수염을 붙여 나이 들어 보이도록 변장을 한 후, 다른 3층 건물들과 다르지 않은 건물에 들어갔다.
3층까지 계단 사이사이와 통로를 덩치들이 지키고 서 있었지만, 나에게 신분증을 보여달라거나,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3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내부는 깔끔했다.
넓지 않은 응접실, 그 안쪽 복도 옆으로 여러 개의 방이 늘어서 있었다.
응접실, 아니 대기실 소파에는 몇 명의 대기자들이 앉아 있었고, 한쪽에는 나름대로 실력 있어 보이는 용병들이 서 있었다.
소파 반대쪽에는 사무실 직원처럼 보이는 단정한 얼굴의 여성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온 나를 보고는 자신의 앞자리를 가리켰다.
나는 그녀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속으로 웃고 말았다.
그녀의 말은 언어는 달랐지만, 전생에 들었던 은행원의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유물을 팔 생각입니다."
내 말에 여성은 나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물은 어디에 있죠?"
나는 안주머니를 열어 슬쩍 유물 주머니를 보여주었다.
"아……."
여성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금방 표정을 바꾸더니, 빠르게 질문을 이어갔다.
"혹시 전에 오셨던 분인가요? 처음 오셨으면 누구 소개인지 알려주셔야 합니다."
비싼 유물을 거래하는 만큼, 어느 정도 신용은 필요한 모양이었다.
나는 이곳을 알려준 사람을 말해 주었다.
"불새 사냥꾼 소개로 왔습니다."
불새 사냥꾼. 카트린이 용병으로 활동할 때 쓰는 이름이었다.
수도에서 유물 거래를 하는 곳을 내 주변에서 알만한 사람은 용병 활동을 했던 카트린밖에 없었다.
그래서 카트린에게 물어보았고, 카트린은 내가 돈이 떨어진 줄 알고, 자신의 비상금을 빌려주려고 했다.
나는 카트린이 주는 돈을 겨우 거절하고 이 장소를 알아낸 것이다.
"불새 사냥꾼 소개인가요. 그럼 문제 될 게 없겠네요. 혹시 사용하는 무기를 소지하고 있다면, 이곳에 꺼내놓으시기를 바랍니다."
"없습니다."
주머니 속에 단도가 있기는 했지만, 알아차릴 사람이 없느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직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맨 안쪽, 1번 방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복도 안쪽을 가리켰다.
나는 복도를 걸어가 제일 안쪽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물을 파신다고요."
작은 방 안에 평범해 보이는 남성이 앉아 있었다.
근육도 없고, 인상도 평범한 사무원 같은 남자였다.
'능력자군.'
하지만, 내 눈에는 그의 일렁이는 마나가 진하게 느껴졌다.
단지 유물을 거래하러 왔는데, 마나 사용자도 아니고, 상속 능력자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상속 능력자면 어쨌거나 단승 귀족이라도 귀족 작위를 가지고 있을 텐데. 이런 일을 하고 있다니.
수도의 유물 거래소는 생각보다 대단한 곳인 듯했다.
"무슨 유물인지 보여 주시겠습니까?"
상속 능력자이건 귀족이건 간에, 지금은 단지 내 유물을 거래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나는 주머니를 꺼내, 입구를 벌리고, 주머니를 뒤집었다.
텅, 텅, 콰르르르.
주머니에서 유물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