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제9편 두 번째 실전 수업 (2)
차이프리 백작과 기사단 때문인지, 유적 탐사 때와 같은 곳으로 공간이동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적 탐사에 아무도 참여하지 않았고, 차이프리 백작과 기사단이 유적 탐사를 하는 것도 학생들은 알지 못했다.
나를 제외하고.
대신 우리는 처음 계획대로 마물을 상대하기 위해 진형을 만들었다.
기사 학부를 1, 2, 3학년 섞어서 10명씩 조를 나누었고, 상속능력 학부도 비슷한 능력끼리 모아서 조를 나누었다.
기사 학부와 상속 능력 학부 전체가 아니라 인원의 반이 1조로 먼저 온 것이지만, 1조만으로도 100명이 넘었다.
기사 학부도 10명씩 5조로 나뉘었고, 나는 공주와 함께 1조에 속하게 되었다.
1조의 조장은 죽기 전 유적 탐사를 갈 때, 제일 먼저 죽었던 3학년 선배였다.
기사학부 3학년 수석이자, 차세대 왕실 기사단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알려진 선배였고, 성격도 괜찮았었던 것 같았다.
"반갑습니다. 이번 실전 수업에서 이 조의 조장을 맡게 된 하비에르입니다. 이번 실전 수업은 격렬한 전투가 계속될 테니, 2, 3년은 1학년들을 도와주고, 1학년들은 선배들의 말을 잘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조원들에게 이야기한 뒤에 일행을 움직이게 했다.
다른 조들도 진형을 갖춰 이동하기 시작했고, 하비에르 조장은 걸어가는 조원들을 살핀 뒤에 공주에게 다가왔다.
"공주님은 제가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실전 수업 동안 제 옆에 딱 붙어 계시면 됩니다."
공주 옆으로 다가온 그는 조금 귀찮아 보이는 얼굴로 공주에게 말했다.
조장의 말에 공주는 의아해했지만, 나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
마물과 대단위 전투를 벌이는 '실전 수업'은 죽거나 다칠 위험이 '현장 학습'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연히 아카데미가 공주를 그런 위험에 그냥 던져둘 리가 없었다.
공주 쪽에서 호위로 나를 붙여놓은 것처럼 아카데미에서는 아카데미 학생 중에 최고 실력자를 공주 옆에 붙여놓은 것이다.
하지만, 공주는 그의 말을 따를 생각이 없었다.
"알렉스 공자가 있으니, 조장은 조 전체를 신경 쓰시면 됩니다."
공주의 말에 하비에르 조장은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내 생각보다 공주는 나를 신뢰하는 모양이었다.
유적에서 같이 보냈던 시간은 공주가 기억할 수 없을 텐데.
'현장 학습'에서 공주가 직접 보고, 내가 카트린을 구해낸 덕분에, 공주가 어느 정도 나를 믿게 된 것 같았다.
하비에르는 공주 옆에서 걷고 있는 나를 보고, 공주를 다시 보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무척이나 곤란한 말씀이신데요. 이름이 알렉스……. 맞지? 알렉스 학생 이야기도 들었지만, 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기야 위에서 내려온 지시를 그가 마음대로 바꿀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주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고,
"하아, 문제네요."
난감해하는 그에게 내가 도움을 주었다.
"우선 조장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직 서로의 실력을 모르니, 같이 움직이면서 어느 정도 조율을 하면 될 듯합니다."
말을 하면서 공주에게 살짝 눈치를 주었다.
다행히 공주가 자신의 실수를 바로 알아차렸다.
"아, 조장님의 권한을 제가 침범한 거네요. 죄송해요. 조장님 말씀을 따를게요."
공주가 사과하자, 조장은 놀란 얼굴로 공주를 바라보았다.
"아, 그, 사과하실 필요는. 아, 아니 괜찮습니다. 배려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정말 놀란 모양이었다, 그는 제대로 대답도 못 하고 횡설수설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그에게 사과한 공주는 이 왕국의 왕위 계승 3위인 왕족이었다.
그런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진실하게 사과를 하는 모습에 놀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공주를 다시 보게 될 테고.
그 뒤에도 하비에르 조장은 상기된 얼굴로 공주를 계속 훔쳐보았다.
전생이었으면 철컹철컹 쇠고랑을 채울만한 표정이었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오해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비에르 조장이 멀어지자, 나는 공주에게 속삭였다.
"잘하셨습니다."
공주는 신기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다행히 생각보다 쉽게 거리감을 줄일 수 있었다.
유적 지하에서 공주와 같이 지낸 경험 덕분이었다.
유적 지하에서 있었던 일은 나만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기억은 지금처럼 공주와 거리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조별로 간격을 벌린 채로 숲속을 나아갔다.
1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숲을 이동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접근하는 마물들이 많지 않았다.
다가오는 마물들은 선두에 선 기사학부 조에 썰려 나갔고, 다른 조들은 산책하듯이 계속 걸었다.
'이런 곳에서 대규모 전투 훈련이 가능할까?'
우리가 그동안 받은 훈련은 학생 100명이 단단한 진형을 짠 뒤에 대규모 마물과 전투를 벌이는 훈련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걷는 곳은 나무와 넝쿨이 울창한 숲이었다.
아직 마물들이 몰려오고 있지 않지만, 이곳에서는 대규모 진형은커녕, 조별로 모이기도 쉽지 않았다.
마물들이 몰려오기라도 하면, 대규모 전투 훈련이 아니라, 각개격파를 당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런 걱정을 하며 숲을 걸어가다 보니, 뜻밖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숲 가운데 커다란 공터, 아니 넓게 펼쳐진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공터 중앙에 작지 않은 강이 흐르는 것을 보니, 강 때문에 만들어진 들판이었다.
다행히 이번 수업을 준비하던 교수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이정도 벌판이면 실전 수업은 물론, 대규모 회전도 가능해 보였다.
우리는 벌판을 가로질러 옆으로 다가갔다.
아쉽지만 강에 발을 담가보지는 못했다.
그 대신, 우리는 강을 등지고 훈련했던 진형을 만들었다.
"조별로 위치를 잡아!"
"원거리 조들은 중앙에서 벗어나지 마!"
"능력 강화형들은 사거리 체크 잘하고!"
3학년 조장들과 교수들, 같이 온 기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학생들을 통솔했다.
그동안의 훈련이 도움이 되었는지, 학생들은 금방 자리를 잡았다.
'1조는 2열인가.'
기사 학부 2, 3, 4조들이 제일 앞에서 적을 막고, 1, 5조가 상속 능력 학부 조를 지키며 뒤를 받치는 진형이었다.
2, 3, 4조가 맨 앞에 나선 것을 보니, 이 진형도 공주를 어느 정도 배려한 진형인 것 같았다.
공주도 알아차린 것 같았지만, 이번에는 꾹 참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진형을 확인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등 뒤에 강이 있었다.
앞에서는 마물들이 달려올 거고.
'설마, 이거 배수의 진 아냐?'
탈주를 막고, 전멸을 각오한 채로 적과 싸우는 극단적인 전법.
설마, 잘못하면 모두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황당해서 강 쪽을 확인하니, 다행히도 전멸을 각오한 것은 아닌듯했다.
강 쪽에 학생 몇 명과 카트린 그리고 교수들이 서 있었다.
모두 아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그곳에 있는 교수 중에 능력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행정학부 교수였는데, 그는 빙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물에 타격을 주기 힘들어 전투용 능력은 아니라고 들었지만, 강을 얼게 하기에는 충분한 능력이었던 모양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강 너머로 피하고, 마물들이 넘어오기 전에 연결을 끊어버리는 건가.
오랫동안 상속 능력을 써왔으니, 이런 활용은 나보다 더 잘하는 것 같았다.
"모두 대기! 곧 마물들이 몰려올 테니 준비하도록!"
어느 정도 준비가 끝나자 미로 기사가 큰소리로 외쳤다.
여기저기서 잔기침 소리가 들려왔고, 옆에서도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주도 긴장한 모양이었다.
나도 차분히 마나를 돌려 긴장을 풀었다.
처음 겪는 대단위 전투였다.
전생에 영화로 보긴 했지만, 이정도 인원이 실제로 싸우는 것은 본 적도 없었다.
내 실력에 어느 정도 자신이 붙었지만, 이정도 인원이 싸우면 어디서 눈먼 공격에 당하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멀리서 숲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물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 긴장이 높아지는 가운데, 옆에서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스 공자는 안 무서워요?"
아이샤 공주였다.
나는 눈을 돌려 공주를 보았다.
겉보기에 공주는 전과 다르지 않았다. 표정도 담담했고, 몸을 움츠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검을 쥔 손은 떨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무서워하네.'
학생들, 특히 신입생 중에는 겁먹은 학생들이 많이 보였는데,
담대해 보이던 그들처럼 공주도 겁먹은 신입생이었다.
나는 검을 쥐지 않은 손을 뻗어 공주의 어깨에 올렸다.
그리고 공주에게 마나를 흘려주었다.
공주가 움찔 놀랐다.
하얗게 질렸던 얼굴색이 돌아왔다.
떨던 손도 잠잠해졌고,
공주는 이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공주와 내가 서로 다른 마나라면 더 불편해지겠지만, 그녀와 내 마나, 그리고 상속 능력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공주의 의문 섞인 눈을 뒤로 한 채로 나는 일렁이는 숲을 바라보았다.
다가오는 마물들의 숫자가 상당한 것 같았다.
마나가 꿈틀거리며 다가오는 게 보였고, 멀리서부터 나무들이 흔들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숲 사이에서 기사들이 뛰쳐나왔다.
마물들을 유인하러 갔던 기사들이었다.
갑옷을 벗고 달리는 기사도 있었고, 다친 채로 달려오는 기사도 있었다.
달려오는 기사들을 보며, 잠깐 다른 생각을 했다.
저들도 기사인데 미끼 역할이라니, 생각해 보면 이쪽 세계는 사람 목숨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귀족도 기사도 저렇게 쉽게 생각하는데, 일반인들은 어떨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제대로 된 귀족도 아니면서 평민들을 너무 등한시한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서자인 나는 귀족보다 평민들과 더 친해야 할지도 몰랐다.
나중에 영지로 돌아가게 되면 대충이라도 어떻게 사는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학생들이 만든 진형 사이로 기사들이 뛰어들었다.
크아아아앙!
이어서, 마물들이 숲에서 쏟아져 나왔다.
하나, 열, 이십, 삼십,
숫자를 세기 힘든 마물들이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종류도 여러 가지였다.
전에 보았던 꽁지깃 도마뱀도 보였고, 원숭이를 닮은 마물도 보였다. 처음 보는 곤충 비슷한 마물도 있었고, 날개를 펄럭이며 낮게 날아오는 마물도 보였다.
"전투 시작!"
미로 기사의 고함이 다시 들려왔고, 나는 공주 바로 옆에 서서 마나를 가득 끌어올렸다.
콰앙!
학생들이 만든 벽에 마물들이 충돌했다.
선두 조들이 마물들을 막아섰지만, 모든 마물을 막을 수 없었다.
많은 마물이 선두 조를 지나 우리 앞에 다가왔고, 우리 조는 검을 들고 마물들을 상대했다.
내 앞에도 마물이 나타났다.
마물의 발톱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힘껏 대검을 휘둘렀다.
동시에 세상이 느려지고, 내가 휘두른 검은 느려진 세상을 가르기 시작했다.
서걱!
마물이 반으로 잘려 나가고,
나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느린 세상에서도 학생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