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제6편 나 홀로 유적 탐사 (2)
세상이 느려진 것이 아니라, 마나 덕분에 내 감각이 빨라졌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광경은 느려진 세상이었다.
반으로 잘린 마물에게서 솟구친 피도 천천히 허공을 부유했고, 마물이 입으로 쏘아낸 물줄기도 공중에 박제가 되었다.
나는 느려진 몸을 움직여서 물줄기를 피하고, 마물의 몸을 베었다.
내 몸이 빨라진 것이 아니었지만, 남들보다 몇 배나 빠른 시간 속에 머문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정보를 얻고 빠르게 결정을 내린다는 이야기였다.
날아오는 물줄기를 보고 피하고, 마물이 나아가는 곳으로 미리 검을 밀어 넣었다.
앞을 막고 있던 마물들을 순식간에 제쳐버렸다.
마나가 미친 듯이 줄어들었지만, 나는 계속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마나가 다 떨어지는 순간, 나는 유적 입구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크아아아앙!
뒤에서 제일 큰 마물이 괴성을 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괴성에 분노가 담겨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역시, 들어오지 못하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입구 너머로 마물들이 보였다.
마물들은 나를 보고 으르렁거렸지만, 한 걸음도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지하 유적 안에 있는 마물들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둥지의 마물들이 유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만약, 마물들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면 유적 내부에 둥지에 있던 마물들이 하나도 없을 수가 없었다.
마물이 안으로 들어온 흔적도 없었고, 지하 유적에 있던 해골도 뜯어먹힌 상처가 없었다.
아마도 몰래 안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굶어 죽은 게 아닐까 했다.
나는 아래로 향하는 통로를 지나, 앞으로 뻗은 통로를 보았다.
죽기 전보다 몇 주 빨리 온 것이었지만,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벽에 걸쳐진 해골도 그대로 있었고, 돌벽도, 돌바닥도 먼지에 싸여있을 뿐이었다.
지하 유적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때와 느낌은 전혀 달랐다.
그때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들어왔지만, 지금은 혼자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때와 달리, 지하 유적은 무척이나 썰렁하게 느껴졌다.
"느낌이 달라도 함정은 그대로겠지."
나는 주머니 안에서 지도를 꺼냈다.
우우우웅.
예상대로 지도에서 은은하게 빛이 흘러나왔다.
마나로 눈을 밝게 하니, 지도의 빛만으로도 시야가 꽤 넓어졌다.
파피루스의 앞면, 지형 표지는 전처럼 아무 변화도 없었다.
나는 뒷면을 펼쳤다. 지워져 있던 내용이 모두 복구되어 있었다.
미로와 미로의 함정들도, 그리고, 맨 위층인 이 층의 함정도 모두 표시되어 있었다.
나는 함정이 표시된 지도도 가지고 있고, 이미 한번 통과도 해 본 경험도 있었다.
이런 내가 유적을 통과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런, 이런. 정신 차리자. 또 죽을라."
나는 대검으로 머리를 두들겼다.
저런 안이한 생각으로 오다가 이미 한번 죽었었다.
지도도 있고, 경험도 있지만, 이 유적에는 마물도 살고 있었다.
살아있는 마물이 저번과 똑같은 위치에서 공격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최대한 조심해야 했다.
나는 과거의 기억과 지도를 이용해서 조심스럽게 통로를 나아갔다.
예상대로 함정을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밟으면 추락하는 함정을 피하고, 벽에서 튀어나오는 낫을 건너뛰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계속 걷다 보니, 갈림길이 나타났다.
죽기 전에 왕실 기사단의 선임 기사가 공주에게 시비를 걸었던 곳이었다.
공주가 제대로 반박을 한 덕분에 선임 기사가 어디로 갈지 결정했었다.
"그 덕분에 구더기 마물에게 고생했지."
공주와 나는 함정에 빠져 버렸고.
나는 지도를 확인했다.
"확실히 그쪽은 돌아가는 길이네. 잘못 선택한 게 맞아."
선임 기사가 선택한 길은 외곽을 타고 빙 둘러 가는 길이었다.
"외곽이라서 마물들이 파고들었으려나."
어쨌거나 잘못 든 길을 다시 갈 이유는 없었다.
안 가본 길이긴 했지만, 지도를 믿고 반대쪽 길로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이 길이 제대로 된 길이었다. 무너진 곳도 얼마 없었고, 함정도 제대로 작동했다.
덕분에 여러 번 죽을 뻔했다.
지도에 함정이 나와 있었지만, 어떤 함정인지는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함정은 쉽게 해결했지만,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서 쏘아진 화살이나, 통로 전체를 깔아뭉개는 천장 같은 것은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물들도 아예 없지는 않았다.
죽기 전처럼 수십 마리가 쏟아져 나오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벽을 뚫고 나와서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봉인지를 통과하느라 고생한 만큼, 또다시 고생한 끝에 나는 통로의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양쪽으로 방들이 늘어서 있고, 앞쪽에는 계단이 보였다.
"창고라고 했지?"
창고를 막는 문은 나무 문이었는지 모두 남아 있지 않았다.
뻥 뚫린 문 안으로 들어가니, 무기들과 갑옷이 쭉 늘어서 있었다.
대부분 낡고 헤져서 쓰기 어려워 보이는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이 안에는 죽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골라 간 물건들이 있었다.
안 보이던 물건들을 찾으면 되는 거겠지?
유적에서 돌아올 때 나도 이 창고들을 대충 훑어봤었다.
그때 안 보였던 물건들을 찾기만 하면, 유물 가방과 아공간에 담아갔던 무기와 유물들을 내가 챙길 수 있었다.
"이 검도 안보였고, 저 방패도, 아, 여기 토시도 처음 보는 거다."
이 방 저 방을 뛰어다니며 못 봤던 물건들을 모았다.
마나를 흡수해서 빛을 내는 허리띠, 소리를 죽여주는 군화에다가, 일정 온도를 유지해주는 흉갑까지.
좋다면 좋고, 애매하다면 애매한 장비와 유물들이 내 앞에 쌓였다.
모두 들고 갈 수는 없었다.
더구나 봉인지를 통과해야 했다. 짐이 되는 물건은 가져갈 수 없었다.
주머니를 최대한 벌려, 담을 수 있는 물건을 최대한 쑤셔 넣었다.
주머니 입구에 걸리는 흉갑이나 군화는 몸에 걸치고, 들고 가기 어려운 물건들은 눈물을 머금고 내려놓았다.
얼추 정리되자, 나는 남은 물건에 미련을 버리고, 층계로 향했다.
층계를 내려가니, 전에 보았던 철문이 눈에 들어왔다.
굳게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철문이었지만, 나는 이 철문이 쉽게 열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마나를 끌어올린 뒤, 힘껏 문을 밀었다.
그그그그긍.
철문은 바닥이 긁히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텅 빈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한번 보았던 광장이라, 삭막한 이곳에 오히려 정감이 갔다.
나는 광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광장 중앙에는 전과 똑같이 구슬 하나가 받침대 위에 올라와 있었다.
나는 손으로 구슬을 쓸어보았다.
다시 보아도 특별해 보이지 않는 구슬이었다.
나는 인장 반지를 꺼내 손에 끼었다.
이제부터 중요했다.
잘되면 유물 하나를 더 얻을 기회였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반지를 낀 손을 구슬 위에 올려놓았다.
우우우우우웅.
그때와 같이 머릿속에서 뭔가 가동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팅되는 소리이려나.'
전혀 다른 소리였지만, 이 뒤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니 부팅소리처럼 느껴졌다.
[관리자 인증 확인.
용사 관리 체계에 접속하셨습니다.
본 관리 체계는 12번째 예비 에고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현재 중앙 에고와 연결이 되고 있지 않습니다.
오랜 미접속으로 본 에고도 기능이 저하되고 있습니다. 언제 정지될지 모르니 연결에 주의 바랍니다.]
그때와 똑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몇 주 일찍 도착했지만, 들려오는 음성은 달라지지 않았다.
[접속자가 용사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문제 발생!
접속자는 정상적인 용사가 아닙니다.]
전과 같은 음성이 이어지고,
[현재 접속한 관리자는 파편화된 불완전한 용사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본 관리 체계로 정보 갱신이 가능합니다. 정보 갱신을 하시겠습니까?]
여기서 '네'라고 하면 통증과 함께 내 능력을 알려주는 창이 펼쳐질 터였다.
그리고, 내 특이한 능력 덕분에 다시 한번 갱신할 테고.
'두 번 고통을 겪을 이유는 없겠지.'
'그때, 육체 최적화 말고, 다른 능력을 떠올렸었지?'
나는 머릿속으로 내 능력 사자회귀(死者回歸)를 떠올렸다.
[신규 능력이 감지되었습니다. 신규 능력을 포함한 정보 갱신을 하시겠습니까?]
나는 머릿속으로 '네'라고 대답했다.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져나갔다.
그리고, 눈앞에 전에 보았던 정보창이 펼쳐졌다.
< 기사형 영웅 능력자 >
< 사용 능력 >
- 육체 최적화 : 15등급
- 마나 회로 구축법: 1등급
- 마나 감응력: 봉인 해제 중
- 봉인 중
- 봉인 중
< 비인가 능력 >
- 마나 유형화: 1등급
- 사자회귀: 1등급
정보창이 전과 달라진 것 같았지만, 나는 통증을 버텨내며 크게 소리쳤다.
"중앙 에고가 망가졌어. 연결하지 마."
[규칙에 어긋난 영웅입니다!
접속자에게서 복수의 영웅 능력이 감지되었습니다.
이레귤러는 중앙 에고에 통보해야 합니다.
관리자가 중앙 에고가 손실되었다는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만약을 위해 1회 연결을 진행합니다.
중앙 에고 재연결 실패!
중앙 에고에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통보가 중지됩니다.]
다행히 말이 통했다. 아쉽게도 한번은 시도해 보긴 했지만, 시도 두 번은 줄일 수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려보았다.
시간이 흘렀지만, 에고는 정지되지 않았다.
"성공한 건가?"
죽기 전에 과도한 정보 갱신과 여러 번의 중앙 에고 연결 시도로 자신이 정지된다고 에고가 말했었다.
정보 갱신도 한 번으로 줄어들었고, 중앙 에고 연결도 한 번밖에 하지 않았다.
"아직 괜찮은 거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네 수명 말이야. 괜찮아?"
[말씀하신 대로 현재 본 에고는 수명 한계에 도달해 있습니다. 앞으로 몇 차례 더 가동하면 정지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혹시, 수명을 늘릴 방법은 없어?"
[에고 수명을 늘릴 방법은 현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쉽게도 멀쩡한 유물을 구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래도, 말을 하는 에고 유물이었다. 몇 번 써먹지는 못할 테고, 어떻게 써먹을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서 제일 값어치 있는 것이 이 구슬이었다.
나는 구슬을 챙기기 전에 마지막으로 물어보았다.
"그 관리자라는 거 이 반지를 꼭 끼어야 해?"
[관리자 권한을 본인으로 한정하시겠습니까? 권한을 바꾸시면 기존 접속 장비로는 접속할 수 없어집니다.]
나는 다시 '네'라고 생각했고, 반지를 뺀 다음에 구슬에 손을 올려보았다.
[관리자 접속을 확인했습니다.]
반지를 빼고도 가동되었다.
이렇게 되면 유물들을 본인들에게 돌려줄 수 있었다.
주머니 속 물건들을 돌려받게 될 차이프리 백작은 기뻐할 테고, 그를 보고 나도 무척이나 기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