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제4편 귀환 (2)
나는 처음부터 백작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지하 광장에서 백작이 광분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백작이 이 유적 탐사에 직접 따라와야 할 이유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지도도 없고, 인장 반지도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실패할 이유가 너무 많았다.
그런데, 가문의 주인인 백작이 직접 안내하다니.
왕자들에게 줄을 대기 위해서라지만,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돌아갈 때까지 백작에게서 이상한 낌새는 찾을 수 없었다.
광장에서 광분하는 모습에 내가 잘못 생각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위로 올라가는 통로를 앞두고 백작이 몸을 돌렸을 때, 그동안의 의심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말을 꺼내고, 맨 앞에서 걸어가던 기사와 귀족 장교 일부가 무기로 옆 사람을 공격하는 순간,
"앞으로 달려요!"
나는 카트린과 공주에게 소리쳤다.
다행히 공주와 카트린은 내 말에 바로 움직였다.
공주마저 의문 없이 내 말을 따르는 것을 확인하니, 그동안 고생했던 것이 보람되게 느껴졌다.
다만, 앞으로 달려가면서도 나는 속으로 나를 꾸짖을 수밖에 없었다.
'등신같이!'
괜한 고민을 하는 바람에 반응이 늦어버렸다.
상황이 너무 꼬여버려서 이대로 진행해야 하는지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백작한테도 찍힌 것 같고, 탐사도 엉망이 되었다.
같이 온 아카데미 학생들도 공주와 같이 유적에 내려간 것 때문에 나를 색안경을 끼고 볼 것 같고.
하지만,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주의 실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킨 것이다.
이대로라면 공주가 아카데미를 무사히 졸업하기는 무척이나 어려워 보였다.
그래서 '사자 회귀'를 써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지만, 일이 터지고 보니, 괜한 고민으로 일을 어렵게 만든 꼴이었다.
우선 최선을 다하고, 일이 끝난 뒤에 고민해도 늦지 않았다.
당장은 눈앞에 다가온 기사들을 처리하는 게 중요했다.
옆 사람을 공격한 기사와 귀족 장교들은 백작이 벽에 손을 올리는 동안, 백작이 서 있는 앞쪽으로 몸을 빼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다른 기사와 장교들은 정신을 못 차렸다.
하지만, 나와 카트린은 공주를 데리고, 쓰러지는 기사들을 지나 동료를 공격한 자들 앞에 다가설 수 있었다.
"막아!"
우리를 막아선 기사들의 고함이 들리고, 뒤쪽에서는 쓰러지는 사람들의 비명이 들리고, 머리 위에서는 천장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혼돈의 카오스였다.
내 앞을 막아선 기사가 검을 치켜드는 게 보였고, 내 옆에서 달리는 카트린의 검에서 아지랑이가 뿜어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뒤에서 따라오는 공주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온몸의 마나가 격렬하게 타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시간이 점점 느려졌다.
세상이 느린 동작으로 움직였다.
내가 휘두르는 검도 천천히 움직여서 무척이나 답답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은 것 같았다.
기사의 눈이 커지고, 내 대검은 기사의 목을 반으로 갈랐다.
대검을 휘두른 여파를 이용해 몸을 돌리고, 검을 다시 한번 휘둘러 옆에 있던 장교 허리를 잘라버렸다.
서걱.
두 사람을 베어버린 소리가 동시에 들려온 것 같았다.
카트린이 상대할 장교까지 쓰러뜨리자, 사람으로 만들어진 벽이 뻥 뚫려버렸다.
카트린의 상대는 이미 죽어버렸지만, 그녀는 아직 할 일이 있었다.
갈라졌던 천장에서 돌이 쏟아지고 있었다.
"위.를. 막.아.요!"
내 말소리마저 느리게 들려왔다.
카트린이 방패를 치켜들고, 마나를 밀어 넣었다.
우우우웅.
크고 투명한 우산이 머리 위에 펼쳐졌다.
그 상태로 우리는 기사들의 방어벽을 뚫고 앞으로 내달렸다.
머리 위에서는 돌들이 쏟아졌고, 백작의 놀란 얼굴이 다가왔다.
저저적.
그리고, 바닥이 갈라지는 게 느껴졌다.
카트린은 내 옆에, 공주는 바로 뒤에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대검을 백작의 놀란 얼굴에 던져버리고, 손을 뻗어 카트린과 공주의 몸을 각각 붙잡았다.
양팔에 마나를 가득 밀어 넣었다. 마나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느려졌던 세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조.건. 앞.으.로 달.려.요."
나는 그녀들에게 크게 외치며, 공주와 카트린을 받친 양손을 힘껏 앞으로 밀었다.
동시에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콰과과과.
'능력자들이니 허리는 괜찮겠지.'
앞으로 날아가는 공주와 카트린을 보며 뜬금없는 걱정이 떠올랐다.
다행히 두 사람 다 마나로 몸을 보호했는지, 앞으로 날아가면서도 허리가 접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때, 타오르던 마나가 가라앉고,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당장 메시지창을 열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래로 떨어지면서 메시지창을 열어 볼 수는 없었다.
공주와 카트린이 무사히 통로에 내려서는 것을 보고, 나는 무너지는 돌들과 함께 아래로 추락했다.
나와 함께 떨어지는 바위들을 보며, 이번에도 다시 과거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도 열심히 노력했지만, 언제나처럼 예상치 못한 일이 등장해 버렸다.
또다시 죽게 되어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공주와 카트린을 살려 보낸 것은 다행이었다.
지금처럼, 과거로 돌아가게 되어도, 나는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과연 내가 돌아가는 과거가, 지금의 과거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물론, 죽은 뒤 돌아간 과거는 죽기 전의 세상과 똑같았고, 다른 행동을 하지 않으면 똑같은 결과가 항상 나왔었다.
그렇기에 나는 죽은 뒤에 지금 세상의 과거로 돌아간다고 믿었고, 또 계속 믿고 싶었다.
하지만,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전생, 다른 세상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내가 돌아간 과거도 과거가 아니라 똑같지만 다른 세계, 평행세계의 과거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과거로 돌아가도, 내가 죽은 세상의 사람들은 계속 그 세상에서 살아갈 수도 있었다.
내가 아기 때 죽은 세상, 지금처럼 무너진 유적에 깔려 죽은 세상에서도 계속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최선을 다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과거를 위해 시간을 써야 할 때였다.
쿵.
바닥에 떨어졌을 때,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양다리가 부러져 버렸지만,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었다.
사방에서 돌과 바위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나와 같이 떨어진 사람에게 단검을 들이댈 뿐이었다.
솔직히 이번에도 멀쩡하게 내려설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쏟아지는 돌에 파묻혀 버릴 테니, 더 중요한 일에 양다리를 써먹었다.
바로, 내 앞에 있는 차이프리 백작을 살리는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도망치지 못하고, 내가 던진 대검에 가슴에 박힌 채로 나와 함께 추락했다.
다행히 그는 떨어질 때도 아직 살아 있었고, 나는 그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죽지 않도록 그의 몸을 받쳐주었다.
그 덕분에 양다리가 부러져 버렸지만, 차이프리 백작은 안전하게 바닥에 누울 수 있었다.
"컥, 커억. 날 살리다니. 네놈은 무슨 생각이냐."
당장 죽지는 않았지만, 대검이 관통해 버려서 오래 살기는 어려워 보였다.
솔직히 오래 살 필요는 없었지만, 바로 죽어버리면 곤란했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 궁금해서 그랬습니다."
"크크. 죽기 전에 마지막 호기심이라는 거냐."
말하는 사이에 백작 머리 위로 작지 않은 돌이 떨어져 내렸다.
나는 단검을 휘둘러 돌을 잘라냈다.
쿠쿵.
"쿨럭, 아직 다 크지 않은 놈이 그 정도 실력이라니…. 공작은 네놈이 서자라는 게 무척 아쉽겠군."
딴소리는 죽은 뒤에 지옥에서 해 주었으면.
괜한 말로 시간을 다 쓸 것 같아,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크큭, 그래 둘 다 죽게 되었으니, 그 정도 궁금증을 풀어주지."
나이스! 떠버리 백작에게 감사를!
"네놈은 모르겠지만, 이, 이 유적은 우리 가문의 유적이다."
웃기는 소리. 선조가 들고 오면 다 너희 가문 거냐.
속으로 코웃음을 치면서도 나는 표정 없이 그가 하는 말을 경청했다.
"라이드가 죽고, 가……. 가문의 유물도 찾지 못했으니, 이런 혼란 통에 우리도 줄을 서야 했지."
"그래서 줄을 섰다. 나는, 백작가는 훌리안 공국왕의 줄을 잡았지."
백작의 말에 크게 놀라고 말았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을 듣게 된 것이었다.
훌리안 데 카를로스 공국왕.
현 국왕의 동생이자, 귀족파의 거두, 독립해서 왕국 옆에 공국을 만든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공작가에서 개인 과외를 받았을 때, 들은 적이 있었다.
왕이 죽었을 때, 후계자 싸움에 뛰어들 사람이 두 왕자와 공국왕 세 사람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뒤로 소식을 듣지 못해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이야기였다.
그가 나섰다고?
"하지만, 크윽, 그냥 줄을 섰다가는 그에게 줄을 선 수많은 귀족 중 하나가 될 뿐이었어. 그래서 나는 그에게 선물을 가져갈 생각이었다."
여기까지 들으니, 그가 무엇을 선물로 할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유적을 이용해서 공주를 죽이고, 두 왕자를 이간질하고. 공국왕이 지원까지 해 주어서 충분히 성공시킬 수 있었는데……."
더 이상 백작은 말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지 않게 된 것이었다.
"서자 따위에 이렇게 죽게 될 줄이야."
그 말을 끝으로 백작은 숨이 멈추었다.
백작이 죽자, 나는 조금 아쉬웠다.
그가 죽기 전에 좀 더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이 유적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는지, 백작의 선조는 누구에게서 지도와 인장 반지를 얻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 유적을 무너뜨렸는지.
하지만, 이 정도만이라도 충분히 고마웠다.
죽은 뒤에도 지옥에서 잘 지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쿵!
숨이 멈춘 백작 위로 바위가 떨어졌다.
나는 떨어지는 바위를 막지 않았다.
이미 막기에는 너무 많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단검을 들어 왼쪽 가슴 앞을 겨누었다.
돌에 잘못 맞으면, 죽기까지 오래 고통받을 수도 있었다.
잘못하면 살아 있는 채로 묻혀버릴 수도 있고.
수많은 돌과 바위가 머리 위를 가득 메울 무렵.
나는 단검을 힘껏 당겼다.
푹!
단검이 살을 가르고, 마나로 이루어진 검기가 심장을 터트리는 게 느껴졌다.
숨이 멈추고,
시야가 어두워졌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화아악.
눈앞이 환해졌다.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메시지와 함께 넝쿨이 뒤덮인 숲이 보였다.
과거 저장 시점.
현장 학습에서 낙오한 다음 날.
봉인지의 동굴로 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