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제3편 귀환 (1)
카트린이 달려와서 공주를 껴안았다.
공주도 카트린을 안고 기뻐했다.
카트린 뒤로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다치고, 안 보이는 사람도 많았다. 아니, 멀쩡한 사람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텅 빈 내부를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
뒤따라 들어온 백작은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얼이 빠졌다.
그는 귀족의 처신도 던져버리고, 광장 안을 마구 뛰어다녔다.
벽을 두들기고, 바닥을 쓸어보았다.
하지만, 벽도 바닥도 평범한 돌일 뿐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광장 중앙으로 달려가 구슬을 두드리고, 만져보았지만, 그냥 유리 재질의 구슬일 뿐이었다.
결국, 구슬을 바닥에 내려치던 그는 나에게 달려왔다.
"네놈이 먼저 들어왔지! 네가 훔쳐 간 것 아냐!"
일그러진 얼굴, 덜덜 떨리는 손, 소리치는 입에서는 침이 튀어나왔다.
가문의 숙원이 물거품이 되어서일까.
딱 봐도 지금 그는 흥분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공주가 아닌 나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것을 보면 역시 그런 쪽은 본능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살아 있는 것도 이상한데, 몰래 챙겼는지 어떻게 알아!"
모를 리가 없었다. 큰 배낭을 메고 있는 것도 아니고, 딱 봐도 뭘 따로 챙길 수가 없었다.
물론, 유물 주머니가 있긴 했지만, 백작은 나에게 유물 주머니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지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다른 사람들도 백작의 고성에 모두 내 쪽을 바라보았다.
말도 안 되는 누명이었지만, 이렇게 백작이 우기니, 없던 죄도 생길 것 같았다.
'유물 주머니가 있으니 탈탈 털어서 보여 줄 수도 없고.'
내가 난감해하고 있을 때, 공주가 내 옆으로 다가와 백작에게 말했다.
"저도 알렉스 공자와 같이 들어왔어요. 제가 몰래 챙겼다는 말인가요? 공자 말대로예요. 이 상태 그대로였고, 우리는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챙긴 게 있긴 하지만, 유물이나 보석 같은 것을 챙긴 것도 아니니 모른 척하기로 했다.
"아……. 그게 아니라. ····…실례했습니다."
백작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나를 의심한다는 것은 공주를 의심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진짜 의심한다고 하더라도, 공주에게 그걸 직접적으로 말하기는 힘들었다.
공주가 말한 덕분에 시끄러운 상황은 겨우 정리가 되었다.
선임 기사와 귀족 장교의 대표가 와서 공주가 살아온 것을 축하했다.
그리고, 왕실 기사단 기사들이 눈으로나마 공주에게 감사를 표했다.
다친 기사들을 구하려다가 함정에 빠진 것을 많은 이들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남은 문제는 그동안 숨겨온 능력을 들켜버린 건가."
내 옆으로 온 카트린이 선임 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주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가 살아 돌아왔다는 기쁨이 지나가자 카트린은 암울한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다친 기사들을 구하기 위해 공주는 자신의 능력을 모두 사용했다.
외가 쪽 능력인 '마나 유형화'는 물론이고, 왕과 두 왕자만 가지고 있다는 '마나 감응력'까지.
보이지 않는 마나로 마물을 쓰러뜨리는 것은 알아차리기 힘들어도, 몸 전체가 희미하게 빛나는 것은 본 사람이 많았다.
왕족의 몸이 마나로 빛나는 것은 '마나 감응력'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10살짜리 여아로 보기에는 너무 뛰어난 실력까지.
그동안 숨겨왔던 모든 것이 들통나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두 왕자가 공주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설마 우리 두 사람을 떨군 귀족 장교도 그때 공주의 능력을 보고 움직인 건가?'
혹시나 해 그 장교를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죽어버린 건가.'
죽었다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나는 생각에 잠겨 있는 카트린에게 말했다.
"공주님…… 혼 안내실 겁니까?"
이런 일로 공주를 꾸짖을 수 있는 사람은 왕비와 카트린, 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카트린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혼을 내겠어. 부상당한 기사를 지키겠다고 스스로 나선 일인데. 차라리 칭찬하면 모를까 혼낼 수는 없어."
그 조카에 그 이모였다.
하기야 카트린이 그렇게 가르쳤으니, 그 상황에서 공주의 행동은 당연했다.
카트린의 저 정의로운 성격 덕분에 큰 도움을 받긴 했지만, 호위할 사람이 저래 버리니 이것 또한 피곤한 일이었다.
"지금은 우선 아이샤가 무사한 것을 기뻐하자고."
카트린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이샤를 지켜줘서 고마워."
"처음 약속했던 거니까요."
내 말에 카트린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내가 사람을 잘 봤어."
"졸업하게 되면 보상이나 잘해주시면 돼요."
감사 인사보다는 보상이 더 좋았다.
괜히 감정적으로 가까워졌다가, 졸업한 뒤까지 시달릴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아카데미를 다닐 동안만 하기로 한 계약이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보다 빨리 온 거야?"
"어떻게 살아온 건지는 묻지 않으시나요?"
"너하고 더 무시무시한 던전에서 빠져나왔는데, 더 자란 네가 이런 함정에서 죽겠어?"
카트린은 모르지만, 그 던전에서 죽은 게 몇 번인데.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혼자 회귀한다는 게 억울하기도 했다.
"너하고 아이샤가 함정에 떨어졌을 때, 모두 죽었을 거라고 말했지만, 나는 둘 다 살아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어."
그녀는 믿는 것치고는 아이샤를 잡고 다친 곳이 없는지 열심히 살펴보았었다.
나는 그녀의 처음 질문에 최대한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지도에 대한 것은 공주에게 설명한 그대로 이야기해 주었고.
"정말 대단했어요. 알렉스 공자가 아니었으면 영원히 미로를 헤맸을 거예요. 막 함정도 찾고, 마물이 튀어나오기 전에 알려주고……."
선임 기사들과 이야기가 끝났는지, 공주가 옆에 와서 내 이야기를 거들었다.
미로에서 지내는 동안, 공주와 조금 더 가까워졌는지, 내가 옆에 있는데도 공주는 카트린에게 열심히 미로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 대부분이 나에 대한 칭찬이었고.
덕분에 나는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카트린도 이곳까지 어떻게 왔는지 공주와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나와 공주가 추락한 그때, 뒤쪽에 있던 다친 기사들이 많이 죽은 모양이었다.
뒤쪽의 방어벽이 뚫린 탓에 귀족 장교 중에도 죽은 사람이 나왔고.
그나마 카트린이 열심히 막아주어서 이들이 살아남은 것 같았다.
전과 달리, 기사들과 귀족 장교들이 카트린을 보는 눈도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별 차이가 없군.'
공주의 호위라는 인식이 꽉 박힌 모양이라 사람들이 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
차라리 이편이 더 좋은 것 같았다.
다행히 그 뒤에는 마물이 많이 나오지 않았고, 부상자는 더 생겼지만, 사망자는 나오지 않고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아예 빈털터리는 아니었어. 오는 길에 무기와 방어구 창고도 있었고, 보석이나 유물 급 물건들도 남아있는 게 있었어."
원래 조금 더 빨리 올 수 있었는데, 중간에 사용할 수 있는 무기와 유물을 찾느라 시간이 걸린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가 제일 빨리 오게 된 거야."
유물을 찾지 않았다면 우리가 늦었을지도 몰랐다.
"그 유물은 모두 유물 가방에 들어갔겠네요."
"유물 가방에 반, 아공간에 반. 두 왕자님이 반씩 나눠 가진 거지."
꽝이 아니었는데 나는 왜 혼날 걸까?
"그런데 왜 백작님은 화를 내신 건가요."
"따로 원하던 것이 있었던 게 아닐까? 솔직히 오는 길에 찾은 물건들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어. 백작 손에 들어가는 건 거의 없을걸."
백작은 무엇을 찾는 것이었을까.
구슬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을 보면 에고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카트린과 공주와 내가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내부를 샅샅이 수색했다.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찾지 못했고, 빈손으로 갈 수 없었던 사람들은 아무 반응 없는 구슬을 떼어내 유물 가방에 집어넣었다.
"유적 탐사는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공주와 내가 떨어진 곳이 복잡한 미로일 뿐이라는 것을 들은 선임 기사는 여기서 유적 탐사를 마치기로 했다.
귀족 장교들도 찬성했고, 백작도 반대하지 않았다.
이곳이 텅 빈 것을 알게 된 차이프리 백작은 더는 유적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뭔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고, 우리는 이 광장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가기로 했다.
그날 밤은 부상자의 신음 이외에 무척 조용했다.
이 안으로는 마물들은 들어오지 못했고, 다음 날 일어났을 때는 모두 몸 상태가 호전되었다.
깊은 부상이 아닌 사람은 포션 덕분에 충분히 싸울 수 있었고, 심한 부상이었던 사람도 이동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출발하는 사람들은 이 유적에 들어올 당시의 절반에 그쳤다.
왕실 기사단도, 귀족 장교들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고, 제대로 된 유물들도 나오지 않았기에 다들 표정이 어두웠다.
우리는 철문을 지나, 옆으로 나 있는 계단을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간 뒤에 쭉 이어진 통로를 보게 되었다.
공주와 내가 떨어져 내린 층이었다.
계단 바로 앞 통로 양쪽으로는 방들이 늘어서 있었다.
무기와 유물들을 찾은 창고들이었다.
"무기 창고도 있고, 식당에, 숙소도 있었어. 고대 제국의 군사기지 아닐까 하더라고."
"군사기지에 함정과 미로를 가득 설치해도 되는 건가요?"
"글쎄. 그건 확실히 이상하지. 백작님이 화를 내는 게 이해가 간다고 할까."
카트린이 앞쪽에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는 백작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하기야 나도 '용사 관리 체계'를 듣지 못했다면 같은 생각이었을 거다.
이 유적의 과한 함정과 미로 등은 구슬. 아니 에고를 지키기 위해서일 게 분명했다.
숙소는 에고를 지키기 위한 병사들이 지내는 곳이었을 테고.
결국, 진실은 나 혼자 알게 되었고, 왕실이 준비한 유적 탐사대는 제대로 된 결과도 없이 큰 상처만 입고 귀환하게 되었다.
* * *
유적을 빠져나가는 것은 생각 외로 어렵지 않았다.
함정은 들어올 때 전부 파훼했고, 마물들도 큰 피해를 보았는지 접근하는 숫자가 적었다.
다들 조금은 여유를 갖고 보조를 맞춰 계속 걸어갔고, 반나절이 지나기 전에 출구에 거의 도착할 수 있었다.
위쪽으로 향하는 통로가 보이기 시작할 때, 선두에 서서 일행을 이끌고 있던 백작이 몸을 돌렸다.
그는 벽에 손을 올리고 모두에게 말했다.
"가문의 숙원은 이루지 못했지만, 가문의 미래는 내 손으로 이루어 내야겠지."
그는 마나를 끌어올리며 모두에게 사과했다.
콰콰콰쾅!
통로가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