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제2편 상태창(?)
미로를 빠져나온 시간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미로에 떨어진 지, 반나절 이상 지난 뒤였다.
공주와 나는 그동안 쓸모없었던 주머니 속 음식을 먹고, 체력을 유지했다.
미로를 빠져나온 곳 옆으로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정면에는 커다란 철문이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나는 공주에게 선택하게 했다.
공주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과 커다란 철문을 번갈아 보더니, 철문으로 다가갔다.
"카트린은 무사할 거예요."
확신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믿기로 한 것 같았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 철문 안을 확인한 뒤에 카트린을 찾으러 가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도 같은 생각이겠지만, 그런 생각보다는 카트린이 살아 있다고 믿는 게 나아 보였다.
"제가 열겠습니다."
나는 공주가 문에 손을 대는 것을 막아섰다.
어쨌거나 호위는 호위였으니, 공주를 보호해야 했다.
평범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큰 철문이었다.
나는 문에 손을 올렸다. 다행히 함정은 없었다.
'잠겨 있는 것은 아니겠지?'
무척이나 무거워 보이는 문이라서, 마나까지 사용해서 문을 힘껏 밀었다.
그그그그긍.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철문은 바닥이 긁히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어느 정도 문을 연 뒤에 공주와 나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공주와 나는 멍하니 내부를 바라보았다.
좌우를 살피고, 위를 보고 아래를 보고.
"……아무것도 없는데요."
하지만, 공주 말대로 철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철문 안은 크지 않은 지하 광장이었다.
벽과 바닥이 모두 평평한 돌로 마감이 되어 있는 제대로 만든 광장.
광장 안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보물도 없었고, 유물이나 무기도 없었다.
단지 중앙에는 기다란 받침대에 검은 구슬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사람들이 죽어야 했다니."
공주는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무척이나 허탈했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확인해 볼 게 남아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나는 공주에게 말을 하고, 광장 중앙으로 갔다.
허리까지 오는 받침대 위에 덩그러니 놓인, 먼지가 뿌옇게 쌓인 검은 구슬.
분명 아무 쓸모 없는 물건 같았지만, 그래도 손은 한번 올려보고 싶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구슬에 손을 올려보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조금 더 기다려보았다.
그래도 변화가 없었다.
"켜져라, 가동, 로딩……. 열려라 참깨."
생뚱맞은 문구까지 해 보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그냥 장식이었나.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이 구슬 이외에는 뭔가 남아 있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고 포기하려는 순간, 주머니 속에 남아 있는 물건이 생각이 났다.
'반지가 있었어!'
나는 반지를 꺼내 구슬에 가져다 댔다.
'역시, 이건 아닌가.'
구슬은 변화가 없었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반지는 손에 껴야 하는 법.
나는 주머니 안에서 인장 반지를 꺼내 손가락에 끼어 보았다.
그리고, 다시 구슬에 손을 올렸다.
우우우우웅.
정답이었다!
머릿속에서 뭔가 가동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다음 순간, 머릿속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관리자 인증 확인.
용사 관리 체계에 접속하셨습니다.
본 관리 체계는 12번째 예비 에고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현재 중앙 에고와 연결이 되고 있지 않습니다.
오랜 미접속으로 본 에고도 기능이 저하되고 있습니다. 언제 정지될지 모르니 연결에 주의 바랍니다. ]
맙소사. 뭔가 AI 같은 음성이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거기다, 에고라면, 그 자아가 가능한 유물을 말하는 건가?
용사 중 한 명이 에고 무기를 썼다는 말이 있었지만, 확인된 적은 없었을 텐데.
[접속자가 용사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문제 발생!
접속자는 정상적인 용사가 아닙니다.]
용사 능력이란 게 상속 능력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대전쟁 때 싸웠던 조상들의 능력을 말하는 걸까?
[현재 접속한 관리자는 파편화된 불완전한 용사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본 관리 체계로 정보 갱신이 가능합니다. 정보 갱신을 하시겠습니까?]
계속 들어보니, 무슨 말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이 에고가 말하는 용사 능력이란 건 대전쟁 때 용사들이 쓰던 초능력을 말하는 것이었고,
파편화된 불완전한 능력이라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상속 능력을 말하는 것이었다.
에고의 말처럼 귀족들이 가진 상속 능력은 선조인 용사 능력 중에 일부만 유전된 것이었다.
앞의 이야기는 대충 알아들었지만, 이어진 정보 갱신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뭔가 하겠다는 말인데, 저걸 승낙할지 거부할지 결정해야 했다.
어차피 가지고 나갈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것마저 거부하면 남은 게 없었다.
그럼 승낙하는 거로.
전생에 읽은 소설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럴 때는 '네'라고 떠올리라고 했던가.
[승인되었습니다. 갱신 중에 통증을 느낄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잠깐. 통증이라고?
번쩍.
머릿속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폭죽이 터져나갔다.
'크윽.'
갑작스러운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다행히 통증은 짧았다.
통증이 멈추자,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정보 갱신이 마무리되었습니다. 확인하시려면 본인의 능력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능력을 떠올리라고? 상속 능력을 말하는 거겠지?
나는 내가 가진 상속 능력을 떠올렸다.
'육체 최적화'라는 이름을 가진 능력. 육체가 강해지는 능력이었다.
다들 별로라고 했지만, 생각보다 괜찮았던 능력이었다.
그런데, 이걸 떠올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화악!
그 순간, 눈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 기사형 영웅 능력자 >
< 사용 능력 >
- 육체 최적화 : 15등급
- 마나 회로 구축법: 봉인 해제 중
- 마나 감응력: 봉인 해제 중
- 봉인 중
- 봉인 중
'설마, 상태창이냐!'
태어나자마자 메시지창을 보여주더니. 아니 이럴 거면 처음부터 보여 주던가.
그러고 보니, 상태창보다는 스킬창에 가까워 보였다.
나는 눈 앞에 펼쳐진 내용을 살펴보았다.
우선 내 능력 '육체 최적화'는 카를로스 초대 왕에게서 갈라져 내려온 상속 능력이었다.
그럼, 저 <기사형 영웅 능력자>는 카를로스 초대 왕을 이야기하는 걸 테고.
그 밑에 '육체 최적화'는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
하지만, 그 밑의 두 능력은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마나 회로 구축법은 분명 마나 심법을 말하는 걸 텐데. 이걸 내가 가지고 있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기사들이 배우고 있던 마나 심법…….
끙, 기사들의 마나 심법과 내 마나 심법이 꽤 차이가 나는 게 이런 이유였나.
그럼, 마나 감응력은 내가 마나를 감지하는 능력을 말하는 거고?
다만, 처음 보는 두 능력은 모두 '봉인 해제 중'으로 되어 있었다.
제대로 레벨이 열리지 않은 것을 보니, 아직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뜻밖의 수확이었다.
황당한 상태창이 나타났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정보라면 나에게 큰 도움이었다.
거기다, 사용 능력에 봉인 중으로 표시된 것 2개.
설마, 저 봉인 중이라고 표현된 능력도 쓸 수 있는 걸까?
뭔가, 행복회로가 마구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살펴보았다.
육체 최적화 옆에 15등급은 그동안 훈련과 전투로 올렸던 레벨을 말하는 것일 테고.
[등급을 레벨로 바꾸시겠습니까?]
레벨을 떠올리자마자 바로 음성이 들려왔다.
의외로 편의성이 좋은 에고였다.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은 마음에 안 들지만.
다시 '네'라고 생각하니 창이 달라졌다.
……
- 육체 최적화: 레벨 15
……
문제는 다시 통증이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 머릿속을 참고해서 만들어 내는 창인 듯했다.
바꾸는 것은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한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데, 내 능력이 '육체 최적화'가 끝이 아닌데.'
[신규 능력이 감지되었습니다. 정보를 갱신하시겠습니까?]
하아, 머리에 떠올리자마자 다시 음성이 들려오다니.
조금 전에 조심하자고 했는데,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다시 통증이 몰아치고, 정보창이 갱신되었다.
< 기사형 영웅 능력자 >
< 사용 능력 >
- 육체 최적화 : 레벨 15
- 마나 회로 구축법: 봉인 해제 중
- 마나 감응력: 봉인 해제 중
- 봉인 중
- 봉인 중
< 비인가 능력 >
- 마나 유형화: 레벨 1
- 사자회귀: 레벨 1
정신을 차리니,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들이 추가되었다.
이어서 머릿속에 시끄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규칙에 어긋난 영웅입니다!
접속자에게서 복수의 영웅 능력이 감지되었습니다.
이레귤러는 중앙 에고에 통보해야 합니다.
중앙 에고 재연결 실패!
중앙 에고 재연결 실패!
중앙 에고 재연결 실패!
중앙 에고에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통보가 중지됩니다.]
에고가 혼자서 난리를 치다가, 결국, 조용해졌다.
갑작스러운 난리에 나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뭔가 큰 문제였던 것 같았는데, 역시 너무 시간이 지나서 별문제 없이 지나간 것 같았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나는 새로 추가된 능력을 살펴보았다.
마나 유형화는 카트린이 준 단검으로 얻은 능력이 분명했다.
레벨 1인데 그 정도 효과라니, 육체 최적화가 얼마나 허접한 능력인지 알 수 있었다.
레벨이 빠르게 오르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수습 기사들과 구르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단검만 가능한 내가 레벨 1이니, 방패에도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카트린은 레벨 2일 게 분명했다.
그리고, 사자회귀(死者回歸)는 내 회귀 능력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회귀 능력까지 여기에 적힐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상속 능력과 다른 나만의 기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조금 아쉬웠다.
'그런데, '사자회귀'도 레벨이 있었네. 설마, 사자회귀도 능력이 더 강화되는 건가?'
레벨을 올릴 방법도 모르고, 효과도 모르지만, 레벨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대가 되었다.
'다른 건 뭐 없나?'
능력창을 전부 다 본 것 같으니 다른 것을 확인해 보려고 할 때였다.
머릿속으로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조금 전과 어딘가 다른 음성이었다. 딱딱했던 음성이 아닌 조금이나마 감정이 실려있는 것 같았다.
[과도한 정보 갱신과 여러 번의 중앙 에고와의 연결 시도로 본 에고는 수명한계를 넘어섰습니다.]
아니, 잠깐. 방금 접속했잖아!
[저는 너무 오랜 시간을 홀로 기다려왔습니다. 지금 마지막 임무를 수행했으니, 이만 쉬겠습니다.]
내 투정에 답을 하듯이, 에고는 담담하게 머릿속에 말을 남겼다.
[새로운 영웅에게 행운을 빌겠습니다.]
마지막 인사가 끝나는 순간 나는 에고와의 연결이 끊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정보창은 없어지지 않았다.
메시지창을 지울 때처럼 정보창도 지울 수 있었고, 다시 활성화할 수도 있었다.
보물이나 유물을 찾으러 왔는데, 뜻밖의 결과를 얻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어느 유물보다 마음에 드는 선물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구슬에서 손을 뗐다.
"뭔가 있었나요?"
어라? 생각보다 시간이 얼마 안 지난 모양이었다.
공주가 보기에는 내가 손을 얹었다가 바로 땐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공주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였다.
지도는 말할 수 있어도 지금 얻은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들었다.
"그럼, 빨리 카트린을 만나러 가요."
공주는 다시 기운을 차리고 위로 올라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 열린 철문에서 카트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주님?"
카트린이 문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