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제25편 유적 진입 (2)
얼마 걷지 않아, 입구에 시체가 누워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퍽!
벽 안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망치에 선두에 선 기사가 튕겨 나갔다.
갑옷이 우그러지고, 망치를 막은 팔이 부러진 것 같았다.
"함정입니다! 부상입니다."
뒤를 따라가던 기사가 크게 소리쳤고, 선임 기사가 지시를 내렸다.
"선두를 바꿔!"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반응도 못 하고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을 상황이지만, 망치를 막았던 기사는 선임 기사의 말에 한쪽 팔을 잡고 뒤로 물러섰다.
그는 부러진 팔을 갑옷에 고정한 뒤에 가지고 있는 포션을 들이켰고, 그의 빈자리는 뒤에 있던 기사가 바로 채웠다.
부상자가 나왔지만, 진행 속도는 줄지 않았다.
"정말 보통 사람들은 막거나 피할 수 없겠어요."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반응하기 힘든 함정이었다.
카트린이 말한 대로 유적 안에서는 모험가나 용병이 움직이기는 어려워 보였다.
함정은 그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갑자기 땅이 꺼지고, 천장이 내려앉았다. 벽에서 독가스가 뿜어져 나오고, 바닥에서 화살이 쏘아졌다.
하지만, 일행은 그런 함정을 이겨 내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떨어지는 기사를 염력으로 끌어올렸고, 가라앉는 천장을 힘으로 버텨 냈다.
독가스를 맡은 사람은 해독해 주었고, 화살은 방패로 막아 냈다.
그 와중에 부상자들이 생겨났지만, 부상자는 포션을 마신 후 뒤를 따르게 했다.
계속된 함정에 부상자는 늘어났지만, 함정이 이어질수록 사람들의 기대도 커졌다. 함정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유물이 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확실히 우리 영지에 있는 유적과는 달랐다. 영지에 있는 폐허의 지하 시설은 멈춰 선 상태로 먼지만 쌓여 있었다.
이렇게 함정이 모두 가동되는 것을 보니, 유물도 남아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계속 나아가다가, 어느 순간 일행은 걸음을 딱 멈추었다.
그들의 앞에 갈림길이 나타난 것이다.
선임 기사가 귀족 장교들과 백작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았다.
"공주님이 결정을 내려 주셔야겠습니다."
선임 기사의 말에 그만 헛웃음이 나왔다.
여태까지 자기들끼리 마음대로 결정을 내렸으면서 갑자기 결정권을 넘겨 버리다니.
아무리 어린 공주라지만, 왕족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당연히 저 선임 기사 혼자 결정한 일이 아니었다.
'설마, 고생이란 게 이런 걸 말하는 거였나?'
공주 말대로 생명이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 몹쓸 장난이었다.
어느 정도 언질이 있었는지 다들 흥미진진하게 공주를 쳐다보았다.
으드득.
카트린이 이를 갈았고, 공주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앞으로도 내가 결정하라는 이야기인가요?"
오! 개떡 같은 요청에 훌륭한 반문이었다.
공주의 말에 선임 기사는 그만 말문을 잃었다.
"아, 그건……."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그는 결국 공주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없었던 말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주는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짧은 대화였지만, 다들 공주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너무 좋은 대답이었지만, 이래서야 공주의 대단함을 숨기기가 어려워졌다.
이게 주머니 속 송곳은 아무리 숨겨도 튀어나온다는 건가.
선임 기사는 백작과 논의한 뒤에 한쪽 길을 선택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았다.
조금 걸어가니 통로가 엉망이 되어 있었다.
함정이 망가져서 드러나 있었고, 통로의 벽이 이곳저곳 무너져 있었다.
거기다, 역한 냄새와 오염된 마나가 느껴졌다. 마물이 남긴 흔적이었다.
되돌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선임 기사는 계속 나아갈 모양이었다.
'공주에게 당한 게 기분이 나빴나.'
그렇다면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겠지만, 본심은 알 수 없으니 대신 나는 카트린과 공주에게 조심하라고 말했다.
"마물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주는 의아해했지만, 카트린은 바로 알아차렸다.
공주와 카트린은 일행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고, 나는 뒤쪽에 남아 주위를 살폈다.
"네가 공주가 선택한 호위냐?"
팔을 다쳐서 뒤쪽에서 걷고 있던 기사 하나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위아래를 훑어보며 말을 하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라 어린 녀석을 골랐나 보네.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어."
정면에서 마물들을 막아 내느라 내가 싸우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평민은 아닐 테고, 공주의 호위니 이름 있는 귀족 가문은 아니겠지?"
이름 있는 공작 가문이기는 하지만, 서자이니 이름 없는 가문보다 나쁠 가능성이 컸다.
"쯧쯧, 본인이 결정한 것은 아닐 테지만 줄을 잘못 섰어."
기사는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나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혀를 찼다.
"너무 늦은 것 같아서 내가 다 안타깝네."
기분이 나쁘기도 했지만, 경고가 생각보다 살벌했다.
단지 주의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눈앞의 위험을 이야기하는 걸까?
"왕자님들 밑에는 과격한 생각을 하는 귀족들도 있어. 다른 왕자님을 건드리기는 힘들어도 공주님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지."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지금 한 말은 뭔가 자기 고백적인 말인 것 같았다.
"나도 그렇고."
역시 자기 고백이었다.
그는 다치지 않은 손으로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나는 소리쳤다.
"모두 조심해요! 마물입니다!"
"뭐! 마물?"
검을 치켜들었던 기사가 황당한 얼굴로 나를 보았지만,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콰직.
벽을 뚫고 나온 거대한 구더기가 그를 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마물이다!"
"벽에서 튀어나오고 있어요!"
"정면에 마물 다수!"
"뒤에도 나타났습니다!"
사방에서 거대한 구더기들이 밀려왔다.
정면에서 통로 전체를 막으며 밀려 내려왔고, 지나온 뒤쪽에서도 구더기들이 빠르게 기어 왔다.
기사단은 급하게 방패를 치켜들었고, 기사단 뒤쪽에서 불덩어리와 각종 공격이 달려오는 마물들에게 쏟아졌다.
역시, 왕실 기사단과 왕국군의 귀족 장교들이었다.
갑자기 등장한 수십 마리의 마물들은 더는 전진을 못 하고 차례로 죽어 나갔다.
앞에서 밀고 들어오는 마물들은 그렇게 막아섰지만, 문제는 뒤쪽의 마물들이었다.
일행 뒤쪽에는 다친 기사들과 아카데미 학생인 나밖에 없었다.
퍽!
나는 대검을 휘둘러 몰려오는 마물들을 막아섰다.
대검을 휘두르자, 거대한 구더기가 반으로 갈라졌다.
채 소화되지 못한 기사가 밖으로 쏟아져 나왔고, 처음 보는 마물이 위액과 함께 튀어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배 속에서 뭐가 나왔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옆에서 다친 기사들이 차례로 죽어 나갔다.
뒤쪽에서는 귀족 장교들의 원거리 공격이 날아오고, 나도 실력을 숨기지 않고 마물들을 베어 냈지만,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마물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뒤쪽에 지원을 해 줘요!"
뒤를 보며 고함을 질렀지만, 앞쪽에서 싸우는 것을 보니 금방 지원을 오기는 힘들어 보였다.
서걱!
그때,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카트린이 옆에 서서 방패를 들었다.
그녀 성격에 나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방패 옆으로 반투명한 방어막이 넓게 펼쳐졌고, 달려들던 구더기들이 방어막에 부딪혀 멈춰 섰다.
그 뒤에 카트린의 검 위로 아지랑이가 일렁거리더니, 멈춰 선 구더기들을 차례로 베어 나갔다.
하지만, 나와 카트린만으로 달려드는 마물들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다친 기사 중에 아직 살아 있는 기사들이 나머지 마물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막아!"
"크아아악!"
왕자에게 줄을 섰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든 간에, 왕실 기사들은 마물에게 몸을 던져 가며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또 한 명이 움직였다.
"죽게 놔둘 수는 없어요."
공주가 참지 못하고 달려 나왔다.
"아이샤!"
놀란 카트린이 소리쳤지만, 공주는 카트린의 외침을 무시하고 마물에게 뛰어들었다.
화악!
검이 휘둘러지고, 마물이 잘려 나갔다.
빠지지직.
검에서 스파크가 튀어 오르고, 마물들이 감전되어 땅바닥을 굴렀다.
죽기 직전에 구원을 받은 기사들이 놀라서 공주를 쳐다보았다.
마물들의 앞을 막아선 공주의 전신에는 광채가 흐르고 있었다.
'숨기기는 개뿔. 카트린에게 배웠는데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망했어. 망해 버렸어.'
나는 마물들을 막아 가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껏 숨겨 왔는데, 다 들켜 버렸다.
기사들의 목숨을 구해 준 훌륭한 공주이지만, 이래서야 왕자들에게 살아남기는 어려워 보였다.
쿵!
하지만, 지금 그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몰려드는 마물 때문에 아직 발동하지 않은 함정이 가동된 것이다.
벽이 내려가고, 바닥이 떨어져 나갔다.
억지로 양쪽으로 막아선 진형이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함정 하나는 공주 바로 아래에서 발동되었다.
덜컹.
바닥이 꺼지고, 공주가 마물들과 함께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꺄악!"
공주가 놀라 비명을 질렀고, 나는 공주를 향해 몸을 날렸다.
턱!
늦지 않고 공주를 잡을 수 있었다.
바로 떨어지는 마물들을 박차고 위로 솟구쳤다.
다행히 많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정도 높이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텅!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허공에서 뭔가에 부딪혔다.
놀라서 위로 올려다보았지만, 천장은커녕 허공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함정 너머에서 우리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귀족 장교를 볼 수 있었다.
아는 귀족이었다. 처음 함정에 빠진 기사를 구해 준 염력을 사용하는 귀족.
그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를 보니 내가 무엇에 부딪혔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염력으로 만든, 보이지 않는 벽이었다.
'한 명이 아니었나.'
마물들에서 몸을 던지는 다른 기사들을 보고 너무 마음을 놓은 모양이었다.
나는 아래로 다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벽도 멀었고, 받침대가 될 마물들도 없었다.
"아이샤!"
공주와 나는 카트린의 비명을 들으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 * *
쿵.
잠시 뒤, 나와 공주는 바닥에 내려설 수 있었다.
다행히 죽지 않았다.
공주를 안고 있었고, 10살짜리 몸무게가 많이 나가 봤자였다.
충격이 컸지만, 버텨 낼 수 있었다.
'공주는 기절한 건가.'
다행히 숨은 안정적이었다.
나는 공주를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빛이 없었지만, 마나를 눈에 불어넣자 꽤 멀리까지 볼 수 있었다.
'아직 유적 안인가.'
카트린과 같이 탐험했던 던전과 달리, 이곳은 사람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돌벽으로 이루어진 복도들. 그 복도들이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미로가 분명했다.
"갈수록 태산이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주도 기절했으니 보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계속 주변에 사람이 있어 확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솔직히 별 쓸모도 없는 것 같았고.
하지만, 이상한 미로에 들어온 것 같으니 자그마한 힌트라도 찾아야 했다.
나는 주머니를 열고, 지도를 꺼냈다.
"어라?"
지도는 환하게 빛나고 있었고, 드문드문 지워져 있던 부분이 전부 채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