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제24편 유적 진입 (1)
우리는 오래전에는 웅장한 성이었을 것 같은 폐허에 도착했다.
전부 허물어지고 나무와 넝쿨로 뒤덮여 제 모습을 잃은 지 오래된 폐허였다.
우리 영지 근처에 있는 유적. 그곳에서 죽기까지 했던 그 유적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폐허였다.
물론, 영지 근처에 있는 폐허는 나무나 넝쿨이 뒤덮여 있지 않아서 이렇게까지 알아보기 어렵지는 않았다.
유적 앞에서 탐사대는 또 한 번 큰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유적에 둥지를 튼 마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연이겠지만, 둥지를 튼 마물들은 라이드가 주머니를 찾았던 곳에 있던 도마뱀 마물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이놈들도 마물이라서 그런지, 도마뱀을 닮은 모습이면서 꼬리에는 깃털이 달려 있었다. 그때와 달리 파란색 깃털이었지만.
주머니를 찾았을 때는 도무지 상대하기 어려워 보이는 마물의 둥지였지만, 이번에는 그때와 달랐다.
마물들은 입에서 불덩어리 대신에 물벼락을 뿜어냈지만, 번번이 기사들의 방패에 막히고, 귀족 장교가 펼친 방어막에 막혔다.
카트린도 능력으로 거대한 방패를 만들어 학생들을 보호했다.
그렇게 갑옷도 뚫을 것 같은 마물의 물줄기를 막아 낸 탐사대는 차근차근 몰려오는 마물들을 쓰러뜨렸다.
중간중간에 충분히 쉰 왕실 기사단과 귀족 장교들의 실력은 처음과 다르지 않았고, 실전을 겪은 아카데미 학생들은 처음보다 훨씬 능숙하게 마물들을 상대했다.
그렇게 마물들을 쓰러뜨리고, 마지막으로 제일 큰 마물을 쓰러뜨린 뒤 우리는 마물들의 둥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아쉽게도 둥지 안에는 깨진 알 이외에 쓸 만한 것은 없었다.
마물 사냥을 하러 온 것도 아니어서 마물들의 사체도 능력으로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렇게 둥지를 모조리 청소한 뒤에 우리는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 앞에 자리를 잡았다.
차이프리 백작은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 앞에 서서 오랫동안 상념에 잠겼다.
수백 년 동안의 가문의 숙원인 유적을 이렇게 쉽게 찾아오게 된 것 때문인지, 아니면 유적을 남의 손에 넘긴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인지 제삼자인 나로서는 그 심경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쉽게 왔어.'
물론, 아카데미의 이동 마법진 없이 대륙을 가로질러 이곳까지 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다.
게다가 왕실 기사단 같은 왕실의 힘이 아니었으면 봉인지를 가로지르는 것도 힘들었을 테고.
하지만, 대략적인 유적의 위치를 알고 있으면서 50년 전 사고 이후 다시 도전하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만큼 지도가 중요하다는 걸까?'
앞면은 유적을 찾기 위한 지도인데, 이미 유적을 찾았으니 그리 의미가 없을 테고.
하지만, 지도의 뒷면인 유적 내부 지도는 많은 부분이 지워지고, 복잡한 구조도 아니라서 그리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고, 왕실 기사단의 선임 기사가 학생들을 불렀다.
지친 학생들이 주변에 모여들자, 그는 크게 외쳤다.
"모두 주목!"
"이곳까지 낙오 없이 따라와 준 카를로스 왕립 아카데미 학생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왕실 기사단과 왕국군 장교단은 이곳에 참여한 여러분의 이름을 기억할 것입니다."
선임 기사의 옆에 서 있던 귀족 장교가 기사의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졸업한 뒤에 기사단 입단과 장교 입영에 가산점이나 우선순위를 준다는 뜻이었다.
"앞으로 가게 될 지하 유적은 무척이나 위험한 곳입니다. 학생 여러분은 이곳에서 캠프를 유지하면서 마물의 진입을 막고 유적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지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어진 말에 학생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다들 어느 정도 예상한 말이었다.
이름을 기억해 주기로 했으니 원하던 목표를 이루었고, 비록 유적에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유적 탐사에 참여했다고 자랑할 수도 있어서 불만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죽은 사람만 불쌍하지."
거기다 그걸 겉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발레아 정도밖에 없었다.
그날, 탐사대는 유적 앞에서 다시 한번 야영을 했다.
다시 한번 학장은 상자를 열어 안전지대를 만들었고, 유물 가방과 아공간에서 쏟아져 나온 음식으로 풍족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아쉽게도 휴식은 거기까지였다.
해가 졌지만, 어제와 달리 사람들은 바삐 움직였다.
왕실 기사단과 귀족 장교들은 차이프리 백작과 유적 탐사 준비를 했고.
학생들은 막노동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학장을 통해 듣게 되었다.
학생들을 모은 그는 빛이 솟구치는 상자를 가리켰다.
"마물의 접근을 막는 이 유물은 무척이나 대단한 물건이지만, 그렇다고 결점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기야 계속 봐 왔지만, 너무 대단해서 약점이 없을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아시다시피 이 유물은 이동할 때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동할 때도 쓸 수 있었다면 우리가 그 고생을 하면서 이곳까지 왔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일정 시간 이상은 계속해서 쓸 수 없습니다. 충전 시간이 필요하다고 할까요."
현장학습 때 밤까지 있지 못한 게 그 이유였고, 밤에 잘 때만 쓴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나.
"밤에 사용하게 되면 낮에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직접 마물을 상대해야 하죠."
학생들보고 입구를 지키라는 것도 그 이유일 게 분명했다.
학생을 위해 남겨 놓는다고 했지만, 알고 보니 우리는 유적을 탐사할 동안 방패막이였다.
학생들과 교수들의 표정이 전보다 더 안 좋아졌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폐허의 돌과 나무, 넝쿨을 모아 지하로 가는 입구를 중심으로 방벽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반인들보다 몇 배는 강한 육체 능력을 지닌 능력자들이 모였으니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방벽이 높게 올라갔고, 함정과 장애물이 빠르게 만들어졌다.
유적 입구 주변은 점차 '간이 요새'라고 부를 만한 곳이 되어 갔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일을 하는데, 뒤쪽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무슨 말이죠?"
카트린의 목소리였다.
놀라 돌아보니, 카트린이 선임 장교에게 소리치는 중이었다.
그곳에는 카트린과 공주, 그리고 선임 장교 외에도 차이프리 백작과 제일 계급이 높은 귀족 장교가 같이 있었다.
바로 차음벽을 쳤는지 더 이상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화난 얼굴은 어두운 가운데에서도 무척이나 잘 보였다.
잠시 뒤, 이야기가 끝났는지 카트린과 공주가 학생들의 야영지로 돌아왔다.
카트린은 일하고 있는 나를 불러냈다.
나르던 돌을 던져두고 공주와 카트린에게로 갔다.
내가 다가가자, 카트린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문제가 생겼어."
"아래로 내려가는 인원에 공주님이 포함되는 겁니까?"
내 대답에 카트린과 공주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공주를 옆에 두고 카트린이 화를 낼 만한 일이라면 그것밖에 없을 것 같아서요."
"그렇긴 하지."
내 말에 공주와 카트린은 멍하니 수긍했다.
그런데 마음대로 공주를 유적 탐사에 참여시킬 수 있나?
"거절할 수 없는 겁니까?"
내 말에 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왕실 행사를 왕족이 감찰해야 한다는 이유를 댔어요. 왕세자의 지시로 왕실 기사단이 움직인 거라 관례에 맞고, 왕세자가 지시한 일이라 거절하기에도 어려워요."
"공주의 성별, 나이를 다 무시한 관례지."
왕세자의 지시에 왕실의 관례라니.
내가 벌써 왕실의 권력 다툼을 직접 내 눈으로 보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설마, 처음부터 공주를 노린 것은 아니겠지?
"뭔가 흉계가 있으려나요."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큰오빠가 벌인 일이면 그냥 좀 고생시키려는 걸 거예요."
내 말에 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주의 말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용이 쏘아 낸 불덩어리에 짐승들은 타 죽는 법이야. 왕세자는 고생이라고 했지만, 우리에게는 그게 고생으로 끝날지 어떨지 알 수 없어."
그것은 카트린도 마찬가지였다.
"화를 내 봤지만, 방법이 없었어. 대신 두 명이 같이 가기로 했어."
그 두 명이 누구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카트린과 저군요."
"응. 부탁해."
"부탁드려요."
공주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깊이 머리를 숙였다.
왕족은 체면 때문에 쉽게 하기 어려운 진심 어린 인사. 아무리 봐도 10살짜리 공주가 할 인사는 아니었다.
어차피 공주의 파벌로 소문이 났고, 아카데미를 다니는 동안에는 공주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같이 갈 생각이었다.
거기다, 공주가 저런 부탁을 하니 진심으로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공주를 보고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내가 전생을 기억하지 않고, 삶을 반복하지 않았으면 공주를 진심으로 따르는 기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두 왕자도 공주를 잘 알고 있다면 그만큼 공주가 두렵겠지.'
다음 날 아침.
유적 입구의 탐사대 전초기지에는 학생과 교사 대부분, 그리고 왕실 기사단 일부가 남게 되었다.
남게 된 학생들은 지하 유적으로 내려가는 나를 보고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부러운 눈이 아니라, 분노와 질투에 가득 찬 눈들이에요."
발레아가 나를 배웅하며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렇게 팩트폭력을 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나도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몸조심하고, 문제가 생기면 최대한 숨어 있어요. 물론 말을 안 해도 잘하겠지만."
돌아가는 꼴을 보니, 안으로 들어가는 쪽도 남는 쪽도 딱히 안전할 것 같지 않았다.
"처음이네요. 나를 걱정해 주다니. 알렉스 공자 말대로 잘 살아남을게요."
아니, 그녀의 안부가 걱정되기보다 문제가 터졌을 때 최대한 살아남아서 나에게 사정을 알려 주기를 바란 것이었지만, 이런 이야기는 내 마음속에만 담아 두기로 했다.
"바로 출발합니다."
발레아와 브리아, 몇몇 학생들에게 인사를 하고,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는 마누엘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 나는 공주와 카트린과 더불어 지하 유적으로 향했다.
왕실 기사단 10여 명, 귀족 장교 10여 명, 차이프리 백작과 우리 일행까지 약 30명 정도가 함께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네다섯 사람이 나란히 걸어갈 수 있는 널찍한 통로는 아래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입구의 빛이 약해졌지만, 그리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모두 웬만큼 어두운 곳에서도 앞을 볼 수 있는 능력자들이었고, 몇몇 빛 관련 능력자들이 일행 위로 광원을 띄워 놓았기 때문이다.
한참을 내려가다 보니, 기울어져 있던 통로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정보가 없습니다."
벽에 기대어 있는 해골을 확인한 차이프리 백작이 뒤로 물러섰다.
미리 이야기가 되었는지, 왕실 기사단이 앞으로 나섰다.
맨 뒤에 있던 우리는 다행히 자리를 바꾸지 않아도 되었다.
일행은 다시 출발했다.
왕실 기사단이 앞으로 나서는 것을 보고, 공주가 작게 물었다.
"유적을 찾는 모험가나 용병들이 있다던데, 그런 사람들이 앞장서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저기 있는 해골이 그 용병이야."
카트린이 벽에 기대어 있는 해골을 가리켰다.
"유적이 어디 있는지 찾는 것은 각성하지 않은 용병이나 모험가도 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유적 내부를 탐사하는 것은 마나를 모르고 능력이 없는 일반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에 가까워."
카트린은 뒤에 남겨진 시체를 가리키며 '저게 그 결과'라고 이야기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