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제22편 실전 수업 (2)
실전 수업 일주일 전.
아카데미는 뜻밖의 발표를 했다.
"이번 실전 수업 중 일부 학생은 마물 정리가 아닌, 유적 탐사를 합니다. 왕실 기사단과 귀족분들이 함께하니 그분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갑작스러운 발표에 학생들은 어리둥절해했고, 이어서 크게 환호했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마물과 싸우는 것보다 유적 탐사가 더 좋을 수밖에 없었다.
훨씬 안전하고, 덜 힘들며, 더욱 흥분되기 때문이다.
보물 상자와 유물과 이야깃거리까지. 유적 탐사에는 로망이 담겨 있었다.
거기다 왕실 기사단이 함께한다는 것은 왕실에서 주관하는 탐사라는 이야기였다. 잘하면 왕실의 눈에 들 수도 있었다.
나도 이 발표를 듣고 기뻐했다.
물론 유적 탐사를 하는 일부 학생 중에 내가 참여하게 될지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지도를 보며 손가락만 빨고 있던 차에 다른 유적이라도 보면서 위로를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이것이 왕자들이 짠 계획이란 것도, 탐사하게 될 유적이 내가 가지고 있는 지도의 유적이란 사실도 전혀 알지 못했다.
실전 수업 준비로 어수선했던 수업 분위기는 더욱 엉망이 되어 버렸고, 교수들은 학생들을 관리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행정 학부 학생들은 유적이라는 이야기에 무척이나 아쉬워했지만, 그들은 참여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 유적 탐사에 참여할 학생을 고르게 될지 학생들은 궁금해했다.
제비뽑기를 한다는 이야기에서부터 고학년 위주로 뽑는다는 말도 있었고, 가문의 로비로 정해진다는 말까지 나왔다.
사람들이 몰려다니면 마물들이 더욱 몰리는 봉인지의 특성상 많은 인원을 뽑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수십 명 이상은 뽑힐 게 분명해 보였다.
유적을 탐사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인원이 필요했다.
더구나 탐사할 인원들이 유적지까지 봉인지를 통과하려면 더 많은 인원이 필요했고.
왕실 기사단이나 귀족들이 얼마나 참여하게 될지가 걱정이긴 하지만, 적어도 실전 수업이라는 명분이 있으니 몇 명만 참가하는 걸로 생색을 내긴 어려울 것이었다.
다행히 나는 유적 탐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왕족인 공주가 당연하게도 유적 탐사에 참여하게 되었고, 공주가 참여하게 되었으니 위쪽에서 이리저리 손을 써서 나 역시 참여하게 된 것이다.
* * *
시간이 흘러 실전 수업일 당일 아침.
우리는 다시 한번 봉인지에 왔다.
이번에는 '현장학습' 때처럼 사람들을 조별로 흩어 놓지 않았다.
너른 강가에 수십 명의 사람이 한꺼번에 이동해 와 있었다.
봉인지는 한 번밖에 안 와 봤기에 공간 이동을 한 이곳은 난생처음 보는 곳이었다.
공간 이동을 한 학생은 48명. 기사 학부 학생 24명과 상속 능력 학부 24명이었다.
전체 기사 학부 학생과 상속 능력 학부 학생들 중 오 분의 일 정도 되는 숫자로, 나머지 학생들의 '실전 수업'은 2주 뒤로 연기되었다.
유적 탐사 기회를 놓친 학생들은 지금 아카데미에 남아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있을 터였다.
학생들 외에 카트린 교수를 포함한 교수가 4명, 학장 1명, 이렇게 53명이 아카데미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유적 탐사를 위해 왕실에서 보낸 이들이었다.
우선 왕실 기사단은 20여 명이 와 있었다.
번쩍이는 갑옷과 방패, 값비싸 보이는 검을 차고 있는 기사단은 대부분 귀족으로 보였다.
다른 기사들은 대부분 각성한 귀족이 아니라,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일반인들이었다.
하지만, 왕실 기사단 단원들은 대부분 왕립 아카데미를 졸업한 귀족들이었다.
우리 아카데미 기사 학부의 선배들이었고, 가문의 후계자가 아닌 기사 학부 학생들의 꿈도 왕실 기사단에 입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국군 소속 장교가 10여 명 정도 보였다.
우리 왕국에는 전쟁이 났을 때 영지별로 징집되는 병사들 이외에, 수도에 항상 주둔하는 상비군이 있었다.
반 이상이 상속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장교로, 영지 없는 귀족들이었다.
전투용 상속 능력을 가지고 있는 영지 없는 귀족들이 가게 되는 곳으로, 왕실 기사단과 함께 왕국의 중추적인 무력이자 왕실의 힘이었다.
왕실 기사단은 몰라도 왕국군 귀족 장교들까지 올 줄은 몰랐던 우리는 그들의 등장에 무척이나 놀랐다.
숫자는 학생들이 더 많지만, 어느 쪽이 중심인지는 바로 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들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왕실 기사단의 선임 기사와 장군으로 보이는 귀족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년 귀족.
다른 학생에게서 그 귀족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차이프리 백작.
차이프리 가문의 수장이자 죽은 라이드의 아버지가 유적 탐사에 참여한 것이었다.
'맙소사, 유적 탐사라는 게 그 유적을 말하는 거였어?'
나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품속에 넣어 둔 주머니가 느껴졌다.
'설마 바로 포기한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포기가 너무 빨랐다. 아들이 죽었다지만 후계자가 죽은 것도 아닌데 바로 왕실에 넘겨 버린 것이다.
아무리 봐도 욕심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귀족이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거기다 백작이 직접 참여했지만, 왕실 기사단에 왕국군 장교들까지 왔으니 차이프리 가문이 뭔가 이득을 얻기는 힘들어 보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도의 유적을 찾는 것이라면, 나도 뭔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멍하니 있다가는 지도까지 있는 유적의 보물을 남에게 송두리째 빼앗길 판이었다.
하지만, 뭔가 생각하기도 전에 이동을 시작했다.
학장을 제외한 모든 인원이 차이프리 백작의 인도에 따라 봉인지의 숲을 가로질렀다.
신기하게도 유적 탐사를 가는 일행의 짐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학생들도 배낭에 가벼운 이동식만 담아 왔고, 기사와 장교들은 배낭도, 따라다니는 종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따로 짐꾼도 없는 대신, 기사단 뒤쪽에 오래된 가방을 멘 기사가 보였다.
"저 등에 멘 가방이 왕실이 자랑하는 유물 가방인 건가."
"네. 보물 창고에 있던 고대 제국의 유물 가방이에요. 큰 오라버니가 보물 창고에서 꺼낸 것 같네요."
어느새 옆에 왔는지, 내 혼잣말에 공주가 대답해 주었다.
공주만이 아니라, 브리아와 1학년 기사 학부 학생들이 모두 근처에 모여 있었다.
분명 출발하기 전에 학년을 섞어서 조를 만들어 주었는데, 조금 움직이다 보니 다시 학년별로 모이게 되었다.
왕실 기사단이 앞장을 서고, 2, 3학년 학생들은 왕실 기사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바짝 붙어 있으니 나머지 1학년들은 이렇게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저게 유물 가방이에요? 엄청 많이 들어간다던데."
다른 1학년 학생들이 내가 말한 가방을 보고는 놀란 눈이 되었다.
"작은 창고 크기 정도일 거예요."
"저 안에 이번 탐사용 장비에서부터 식량까지 다 들어 있겠군요."
브리아와 다른 학생들도 그제야 짐이 왜 안 보였는지 이유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조금 의아했다.
"하지만, 가방 하나에 다 넣기에는 위험하지 않으려나."
내 의문은 공주가 바로 풀어 주었다.
"왕국군 쪽 장교 중에 아공간 능력자가 있을 거예요. 둘째 오라버니가 왕실 기사단에 식량과 장비를 다 맡길 리가 없죠."
"아, 다 준비했군요."
공주의 말에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공주의 말속에서 몇 가지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왕실 기사단은 제1 왕자 라인이고, 왕국군 장교들은 제2 왕자 라인이라는 것과, 이번 유적 탐사는 제1 왕자와 제2 왕자가 합심해서 진행하는 일이라는 사실이었다.
생각보다 복잡한 상황이었다.
차이프리 백작이 참가하고, 제1 왕자와 제2 왕자가 합작한 유적 탐사.
봉인지까지 이동하기 위해 왕립 아카데미 학생을 참가시켰고, 거기다 공주까지 참여하게 했다.
공주와 내 주변에 외부에서는 듣지 못하게 마나 장벽을 치고 공주의 귀에 대고 작게 물어봤다.
"이번 유적 탐사는 공주님이 직접 지원하신 건가요?"
내 질문에 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입에 손을 올리고 작게 말했다.
"아뇨. 현장 실습 때 혼이 나서 이번에는 가만히 있었어요. 카트린도 위험해 보이는 것은 피하자고 했고요."
하지만, 공주는 자의와 상관없이 유적 탐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상급생들은 모르겠지만, 내 주변에 같이 걸어가는 1학년들은 모두 기사 학부에서 실력이 제일 좋은 학생들이었다.
공주의 실력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두 능력 중에 하나를 숨기고 있어서 수업 중에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뽐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곳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은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아직 확정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공주마저 참여시킨 이유가 분명히 있을 터였다.
나는 고심에 잠겼다.
그때, 아직 마물들이 몰려들지 않아 여유롭게 숲을 걷고 있는 1학년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앞에서 걷고 있던 선배 중 하나였다.
"이렇게 따로 몰려다니면 곤란해. 공주님 눈치를 보느라 다들 못 본 척하고 있지만,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나중에 우리 선배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지도 몰라."
그는 1학년 학생들에게 한껏 겁을 주었다.
하지만, 웃는 얼굴로 장난스럽게 말을 하는 바람에 겁먹는 사람은 없었다.
앞쪽에서 걷고 있는 선배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말을 하는 선배에게 1학년을 혼내라고 맡긴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후딱 가서 사과하고 선배들하고 섞이라고. 물론 너희 탓은 아니지만, 괜히 이렇게 따로 가다가는 왕실 기사단에게도 점수를 따기 힘들어. 그 점수라는 게 우리 점수를 이야기하는 거야. 너희는 아직 멀었지만, 우리는 바로 눈앞에 닥친 일이란 말이지!"
하지만, 말을 하는 당사자가 이렇게 말을 하는데 위엄이 설 리가 없었다.
그래도 학생들은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나쁜 방법은 아니었다.
겨우 이 년 일찍 들어와 놓고 선배 노릇을 하는 것을 보니, 조금 가소롭게 느껴지긴 했지만, 전생의 군대를 떠올리니 이 정도는 귀여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신입생들은 선배들과 처음 만났을 텐데, 서로 아는 척을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사관학교 비슷한 왕립 아카데미라 동호회도 없고, 학생회도 없는데.
저들은 가문끼리 연관된 학생들인 걸까.
"가문이나 개인들끼리 파티와 모임을 많이 한다고 들었어요. 지방 촌구석 귀족 자제인 저에게는 초청장도 거의 안 오지만요."
내 의문은 내 옆에서 나처럼 겉돌고 있는 브리아가 대답해 주었다.
"그런 것치고 저번 현장학습 이후에 초청장이 꽤 오지 않았어?"
나와 대련을 자주 하는 바람에 그녀가 초청장을 받는 것을 직접 보기도 했었다.
"잠깐 그랬을 뿐이에요. 기껏 파티에 가도 겉돌기만 했어요."
그녀의 말대로 촌구석의 작은 영지를 가지고 있는 귀족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제대로 된 귀족의 자녀였다.
그런 그녀가 초청된 파티에서 겉돌았다면, 서자인 나에게 초청장이 한 번도 안 온 게 이해가 되었다.
공주는 이제 선배들에게까지 둘러싸여 있었다.
저 정도면 내가 따로 호위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너희는 왜 이렇게 따로 움직이고 있냐. 둘 다 유명하지 않아?"
우리에게 처음 와서 장난처럼 말을 하던 선배가 브리아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가 말을 걸자, 브리아가 급하게 가슴에 손을 올렸다.
"아, 아닙니다. 저는 브리아입니다. 하비에르 선배님!"
대답하는 브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브리아의 반응에 놀라 다가온 선배를 살펴보았다.
오, 나름 숨기고 있지만 흘러나오는 마나가 굉장했다.
내가 본 학생 중에 제일 강했다. 웬만한 기사 이상.
알고 보니, 교내에서 무척이나 유명한 사람이었다.
기사 학부 3학년 수석이자 차세대 왕실 기사단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선배였다.
나 같은 서자에게 말을 거는 것을 보니, 성격도 좋아 보였다.
안타깝지만, 그는 몰려드는 마물의 손에 제일 먼저 죽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