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제21편 실전 수업 (1)
신입생들의 최초 현장학습에서 벌어진 사건은 아카데미를 잠깐 동안 소란스럽게 했다.
실종된 라이드의 어머니인 백작 부인이 아카데미로 달려와서 학장실을 소란스럽게 만들었고, 돌아오지 못한 기사들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카트린 교수는 3개월 감봉으로 사고에 대한 책임을 졌고, 무사히 돌아온 학생들은 그 경험을 자랑스럽게 친구들에게 떠벌였다.
그리고 나는 여러모로 유명 인사가 되었다.
수업을 받으러 강의실을 들어가거나 복도를 지나갈 때면 일부러 외면하던 학생들이 나를 보고 수군거렸다.
이야기를 듣고 싶어 괜히 접근하는 학생들도 있었고, 유명해지는 바람에 미워하는 학생들이 더욱 많이 생겨났다.
기사 학부와 상속 능력 학부의 합동 강의 시간.
"저기 알렉스 공자를 노려보는 학생이 있네요. 원수가 한 명 더 늘어났네요."
옆에서 발레아가 입을 가리고 작게 속삭였다.
그녀의 말에 내 앞에 서 있던 브리아가 웃음을 참는 게 보였다.
학생들이 나를 전과 다르게 대하기 시작했지만, 물론 전과 다르지 않게 대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피아르는 그날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로 다시 슬슬 나를 피해 다녔고, 브리아는 전과 똑같이 대련을 요청했다.
공주는 아이답지 않게 다시 나와 묘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었고, 우리 형님인 마누엘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대귀족 자녀들과 몰려다녔다.
그리고 발레아는 내 옆에 붙어서 이리저리 나를 말로 가지고 놀았다.
아무래도 계약을 잘못한 것 같았다. 저 입을 막을 계약을 빼놓다니.
다른 학생들에게는 사교성이 좋은 친구 노릇을 잘만 하던데, 유독 나한테만은 본성을 넘나드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숨길 필요가 없어서 그런 건지, 아버지의 원수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계약이 짜증 난 건지 도무지 그녀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문제는 내가 참지 못하는 한계를 잘 파악하고 있어서 아슬아슬하게 그 선을 넘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거기다 실제로 나에게 도움이 되니 지금은 그녀의 입을 참아 낼 수밖에.
1학년 기사 학부와 상속 능력 학부는 아카데미에서 제일 큰 연무장에 모여서 함께 수업을 받고 있었다.
합동 강의라서 여러 교수님들이 앞에 서 있었다.
카트린 교수도 다른 기사 학부 교수들과 함께 한쪽에 서 있었고, 지금 앞에서 이야기하는 교수는 현장학습 때 우리 조를 맡았던 니엘 교수였다.
"오늘은 가까이 다가온 실전 수업을 준비하기 위한 합동 강의입니다."
니엘 교수는 봉인지에서 보았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지금은 공주를 위한 편파적이고 왜곡된 교육자가 아니라, 냉철하고 카리스마 있는 멋진 교수님 같았다.
"여러분은 모두 봉인지 현장학습을 경험했을 겁니다. 봉인지의 진득한 마나를 느끼고, 마물과 전투를 벌이고, 낙오했던 조는 일주일간 그곳에 남아 생존을 위해 애를 써야 했습니다."
그녀의 말에 연무장에 줄을 맞춰 서 있던 학생들은 낙오했던 학생들과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막 돌아왔을 때보다는 시선이 덜 모이고 있지만,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모두 대단한 경험으로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때 수업은 '현장학습'이었을 뿐입니다."
이어진 니엘 교수의 말에 낙오한 학생들과 몇몇 학생들이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의 고생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봉인지가 어떤 곳이고, 마물을 상대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배우기 위한 행정 학부 학생까지 같이하는 일종의 봉인지 여행이었습니다."
하지만, 교수는 담담한 얼굴로 더욱 자세하게 이야기할 뿐이었다.
"우리 왕국이, 그리고 우리 아카데미가 상속 능력 학부와 기사 학부 학생들에게 원하는 것은 그런 여행자가 아니라, 실제로 마물과 전투를 할 수 있는 전투 능력자입니다."
말을 끊으며 그는 앞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펑!
학생들 머리 위에서 공기가 터져 나갔다.
"몇 주 뒤에는 바로 그 대단위 전투를 해 볼 수 있는 '실전 수업'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2, 3학년 선배들과 함께 봉인지에서 마물들과 대단위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상급생과 같이하는 실전이라니 알고는 있었지만, 서자라고 또 시달릴 걸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여행도, 강의도 아니고 '실전'입니다. 다치거나 죽는 학생들도 여러 명 나올 겁니다."
니엘 교수는 학생들에게 겁을 잔뜩 주었다.
"오늘부터 '실전 수업' 전까지 기사 학부와 상속 능력 학부의 수업은 최대한 실전을 준비하는 수업이 될 겁니다."
기사 학부와 상속 능력 학부의 합동 강의는 나에게 이 세계의 대단위 전투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 주었다.
그리고 왜 각성한 상속 능력자들이 귀족이 되었고, 기사들이 왜 그런 귀족을 섬기게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현장학습에서 기사 학부 학생이 앞에서 마물을 막았듯이, 첫날부터 기사 학부 학생 전체가 앞에서 진형을 펼치고, 기사 학부 뒤쪽에서 상속 능력 학부 학생들이 각기 분야대로 모여 적을 공격하는 훈련을 했다.
숫자가 많아지니 기사와 능력자들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근거리에서 적을 일대일로 상대하는 기사들은, 원거리에서 광역 공격과 다양한 능력을 펼치는 상속 능력자들과 그 능력을 감히 비교할 수가 없었다.
물론, 아카데미의 기사 학부 학생들은 일반 기사와 달리 각성한 상속 능력자들이었지만, 그들도 검이나 다른 근거리 무기로 정면에서 일대일로 마물을 상대해야만 했다.
다른 상속 능력자들이 마물들을 처리할 때까지 앞에서 마물을 막아 내는 역할인 만큼 평범한 기사들처럼 상속 능력 학부와 비교해 능력이 묻힐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수업이 끝나자 상속 능력 학부 학생들은 무척이나 의기양양했고, 기사 학부 학생들은 우울한 얼굴로 말없이 자리를 떴다.
나는 오히려 그런 분위기가 반가웠다.
나를 향한 시선이 확확 줄어드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까.
거기다 피아르에게 접근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공주 쪽도 조용했다.
봉인지에서 얻은 금화로 인해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된 나는 아카데미 생활이 점점 만족스러웠다.
"지도하고 인장 반지만 쓸모 있게 되면 정말 좋았을 텐데……."
왕국에서 제일 많은 서적을 보유하고 있다는 왕립 아카데미 도서관을 뒤져 보고 들키지 않게 수소문도 해 보았지만, 지도에 표시된 유적의 정확한 위치도, 인장 반지의 효과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원래 지도와 인장 반지의 주인인 차이프리 백작가라면 대략적인 유적의 위치도, 인장 반지의 쓰임새도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두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고 그 비밀들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뭐, 욕심만 버리면 아무 문제도 아니긴 하지."
원래 목표인 평안 무사한 아카데미 생활을 보내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쓸모를 모른 채로 두 물건이 주머니 속에 잠들어 있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실전 수업' 준비 문제로 어수선한 시간들이 지나가고, 어느덧 봉인지로 다시 떠날 날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다.
* * *
같은 시각, 왕궁 안에서도 왕립 아카데미의 '실전 수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테라스에 서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차기 왕위를 두고 대립하고 있는 제1 왕자와 제2 왕자였다.
이곳에서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제2 왕자가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며 형을 불렀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단둘이 만나게 되었지만, 그들의 대화는 형제간이 아니라 곧 싸울 적의 대화처럼 느껴졌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
"어제 한 백작 가문의 사람이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백작?"
"차이프리 백작이 직접 왔죠."
동생의 말에 제1 왕자는 으르렁거렸다.
"차이프리 백작이 네 쪽에 붙었다고 자랑하려고 나를 부른 거냐?"
바로 성질을 내는 제1 왕자의 모습에 제2 왕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성격 때문이라도 자신이 반드시 다음 왕이 되어야 한다. 앞뒤 안 가리는 불같은 성격의 형이 왕이 된다면 몇 년 지나기 전에 필시 나라가 망할 게 분명해 보였다.
"자랑이라면 자랑이지만, 그런 이유로 형님을 부른 건 아닙니다."
제2 왕자도 그리 좋은 성격은 아니었다.
동생의 비꼬는 말에 제1 왕자는 다시 부아가 치밀었지만, 다른 이유가 있다니 일단 참기로 했다.
"차이프리 가문이 수백 년에 걸쳐 찾고 있던 유적이 있었답니다. 가문의 선조가 봉인지에서 돌아오면서 가져온 지도에 그려진 유적이랍니다."
"뭐! 유적?"
제1 왕자는 수백 년 동안 찾고 있던 유적이라는 말에 끓어오르던 화가 바로 가라앉았다.
제2 왕자는 차이프리 백작이 찾아와 들려준 이야기를 제1 왕자에게 전해 주었다.
50년 전에 봉인지에서 지도를 분실하고 얼마 전에 기사 시체를 찾은 아들이 실종된 이야기까지.
"50년 전에 유적 위치는 어느 정도 알아냈지만, 지도도 잃고, 가족까지 두 번이나 잃게 되어서 이제는 가문 내에서 유적을 찾는 일을 거의 포기했다고 하더군요."
'현장학습'에서 아들이 실종되었다는데, 흔한 일이라 차이프리 백작이 말하기 전에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너에게 유적 정보를 가져왔다는 거냐?"
"왕국을 위해 바친다고 하지만, 그게 왕국을 위해서는 아니겠죠."
왕국을 위해서라니, 그 말에는 코웃음을 쳐 줄 자신이 있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가 되지 않았으면 절대 가져오지 않았겠지. 결국, 너에게 줄을 대기 위한 선물이겠지?"
"그런 셈이죠. 하지만, 유적이 봉인지에 있으니 저 혼자 어떻게 해 보기에는 무리라서요."
제2 왕자는 할 수만 있다면 혼자 다 먹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그러기엔 힘이 모자랐다.
"나한테 이야기하는 건 아카데미에 압력을 넣어 달라는 말이군."
"아시다시피 봉인지로 이동하려면 아카데미의 마법진을 써야 하잖아요. 기사단을 이끌고 봉인지로 향하다가는 다른 나라와 먼저 싸움을 벌이게 될 게 뻔하니까요."
"압력이라……. 역시 너는 무리지?"
제1 왕자는 제2 왕자를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아직 왕께서 돌아가시지 않았으니까요. 아카데미에 명령을 내리려면 지금은 왕세자인 형의 명령이 필요하죠."
"그렇지. 당연한 이야기야. 차이프리 백작도 나름 머리를 썼네. 어차피 나에게 이야기가 올 테니, 반쯤은 양다리를 걸친 셈이 되는 거 아닌가."
제1 왕자의 말에 제2 왕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도 뻔히 아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제1 왕자에게 바로 가지 않았으니 결국 차이프리 백작은 자신 쪽에 줄을 선 것이다.
"아카데미는 아직 '실전 수업' 전인가?"
"네. 이번 실전 수업에 맞춰서 진행하면 될 겁니다."
"너는 네 쪽 귀족들을 참가시킬 테고."
"형님도 같이 참가시키시면 될 겁니다. 유적은 공동으로 관리하고 유물은 먼저 찾는 쪽이 가지는 것으로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제2 왕자의 말에 제1 왕자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머리를 가로 저었다.
"……아냐, 나는 왕실 기사단을 보내지. 왕국을 위해서라면 왕실 소유로 하는 게 맞아."
어쨌거나 제1 왕자도 바보는 아니었다. 왕실에 귀속시키면 왕세자인 그에게 유리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여기서 반대를 하기도 힘들었다.
"하아, 형님 뜻이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시죠."
그래도 제2 왕자는 자신 있었다.
다행히 전부 털어놓은 게 아닌 만큼, 일만 잘 진행하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대충 결론이 나자, 제1 왕자는 자신의 여동생이 생각났다.
"맞다. 아카데미에 아이샤도 있지?"
"올해 신입생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럼 실전 수업도 참가하겠군."
"그렇겠죠. 그런데 아이샤는 왜 그러십니까? 왕비 쪽 능력을 얻어서 한창 힘들 텐데요."
제2 왕자의 말에 제1 왕자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웃기는 소리. 네놈이 그런 걸 생각하는 놈이었어? 뒷구멍으로 장난질을 칠 생각만 가득하면서. 아무튼 아이샤도 있으니 재미있는 일들이 많을 것 같네."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두 형제는 이야기를 끝내고 곧바로 서로에게서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