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제19편 주머니 속 유물들
<사랑하는 아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신만이 아실 것이다.
네 아버지의 외면과, 네 큰어머니 백작 부인의 횡포에도 내가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사랑하는 아들, 너를 위해서였다.
이번 일만 성공하면 분명 네 아버지, 차이프리 백작은 너를 인정해 후계자로 삼을 것이다.
이건 분명 백작이 나에게 약속한 내용이다. 너는 너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이번 일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
알다시피……(중략)…… 백작이 너에게 준 것은 봉인지에 있는 유적의 위치와 내부 구조를 정리한 지도이고, 그때 같이 얻게 된 인장이야…….
이 어미는 네가 유적의 보물들을 가지고 돌아와 하루빨리 백작위에 오르기를 매일같이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보낼 테니 아들도 최선을 다해 주렴.
난 언제나 너를 사랑한단다.>
편지를 다시 읽어 봐도 문맥 사이사이에 무시무시한 욕심과 아집이 느껴졌다.
가문을 잇는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인 듯했다.
어쨌거나, 긴 편지에는 지도와 인장 반지에 대해서 자세히 적혀 있었다.
지도와 인장 반지는 차이프리 백작 가문의 선조가 가지고 돌아온 물건이었다.
백작 가문의 선조는 초대왕 카를로스 기사의 병사였다.
그는 대전쟁 때 카를로스 기사를 따라 봉인지에서 마왕을 봉인하는 데 한몫 거든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 그는 멸망한 고대 제국의 마지막 마법사를 만나 이 지도와 인장 반지를 얻게 된 듯했다.
그리고 왕국으로 돌아와 가문을 세웠고, 자식 중 한 명이 카를로스 국왕의 딸과 결혼을 해서 귀족이 되었다는 내용이 편지에 주저리주저리 적혀 있었다.
이런 장황한 이야기는 가문에 대한 자랑인지, 아니면 가문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려 주기 위한 것인지 제삼자인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차이프리 백작 가문은 오랜 시간 동안 봉인지에 용병과 기사, 가문의 식솔을 보내서 지도 속 유적을 찾게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수백 년이 흐르고, 50년 전 결국 유적의 위치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되어 백작의 아들과 기사단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결국 유적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모두 죽어 버린 것으로 끝이 난 건가."
그렇게 지도와 인장은 라이드 손을 거쳐 내게로 넘어왔다.
나는 편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지도를 살펴보았다.
"이런 물건들 때문에 마물이 바글거리는 봉인지에 언제나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거겠지."
봉인지로 불리는 대륙 동쪽의 이 반도는 과거 고대 제국의 중심지였다.
처음 마왕이 등장했던 곳이고, 찬란했던 고대 제국이 하루아침에 멸망해 버린 원인이기도 했다.
지금은 마왕이 봉인되고 마물로 가득 차 버린 봉인지가 되었지만, 이곳에는 아직도 고대 제국 때의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 있었다.
파피루스에 그려진 유적도 그런 곳들 중 하나였다.
얼마나 대단한 유적인지도 알 수 없고, 잘못하면 쓸모없는, 그야말로 복불복인 유적.
전에 카트린과 유적급도 아닌 무덤을 찾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유물과 보물을 얻었었다.
무덤에서도 그런 유물을 얻었으니, 이런 유적에 사람들의 눈이 돌아가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었다.
파피루스에는 지도가 앞뒤로 그려져 있었다.
앞에는 유적이 위치한 지형이 그려져 있었고, 뒤에는 유적 내부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만 가지고는 찾기 어렵겠는데……."
유적 내부 지도는 이곳저곳 빠진 게 많아 보였고, 지형이 그려져 있는 부분도 밀림처럼 바뀐 지금의 지형으로서는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수백 년 동안 차이프리 백작가가 유적의 위치를 찾아다닌 걸 테고.
"50년 전에는 어느 정도 위치를 파악한 거겠지? 기사단과 아들을 봉인지에 보냈을 정도니까."
그 뒤로 다시 안 보내고 이 주머니를 열심히 찾아다닌 것을 보면, 이 지도와 인장 반지가 유적의 위치를 확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 인장 반지 때문일지도……."
반지에 새겨져 있는 문양은 죽은 기사의 갑옷에 새겨진 문양과 같았다.
즉, 차이프리 백작가의 문장이었다.
가문이 세워지기 전에 이 반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을 테니, 가문의 문장은 이 반지의 문양을 본떠서 만든 게 분명했다.
"결국 이 인장 반지가 차이프리 백작가의 인장이라는 말인데……."
이 인장 반지가 차이프리 가문의 주인, 가주의 직인이었다.
"차이프리 가문이 직인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설마 지금 가지고 있는 직인은 가짜인 건가?"
그렇다면 차이프리 가문은 이 인장 반지를 꼭 되찾아야만 했다.
평상시에는 별문제가 없지만, 가문 안에 내전이 일어나거나 왕을 세우기 위한 연판장 같은 곳에 서명하기 위해서는 진짜 직인이 꼭 필요하다.
"지금처럼 왕자들끼리 내전이 일어날 상황이라면 한쪽 왕자를 지원할 때 이 직인이 꼭 필요하겠지."
생각해 보면 복불복이자,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는 보물 지도보다 이 인장 반지가 더 중요해 보였다.
하지만, 이 인장 반지도 당장은 써먹기 어려워 보였다.
"금화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니까 지도와 인장 반지는 우선 봉인해야겠네."
나는 반지와 지도, 편지와 금화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보니, 주머니 자체도 대단한 유물인 것 같은데."
왕국의 보물 창고에 있는 유물 가방 정도의 용량은 아닌 것 같지만, 이 작은 주머니에도 무척이나 많은 공간이 숨어 있었다.
한 손에 쥐어지는 작은 주머니는 커다란 가방, 아니 작은 수레 정도의 용량을 담을 수 있었다.
이 정도 크기라면 주머니 하나만 들고도 오랜 바깥 생활이 가능해 보일 정도였다.
"지금은 금화와 주머니로 만족."
나는 다시 주머니를 잘 챙긴 뒤에 어두운 숲을 바라보았다.
점점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 * *
잠들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났다.
"좀 괜찮나요?"
"음. 이제 움직일 만해."
카트린도 찡그렸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불편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움직이는 게 가능한 듯 보였다.
역시 연금술사가 만든 포션은 기적의 약이라 불릴 만했다.
겨우 하룻밤 만에 피가 철철 나는 상처를 어느 정도 봉합해 버린 것이다.
전생에 보았던 소설이나 만화처럼 포션을 붓는 순간 바로 낫지는 않았지만, 자연 치유력을 10배 이상 강화하는 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물론 그만큼 비싸서 일반인들은 사용하기 어려웠지만, 왕립 아카데미에 다닐 정도의 귀족들에게는 큰 무리가 아니었다.
학생들도 어제보다는 활기차 보였다.
라이드가 돌아오지 못한 것 때문에 잠깐씩 표정이 어두워지곤 했지만, 세면하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에 그런 대로 괜찮아졌다.
다만, 카트린은 라이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표정이 굳어졌다.
어제는 죄책감으로 가득해 보였는데, 지금은 뭔가 고민이 있어 보였다.
아침 식사는 짧게 끝났다. 다행히 각자 하루 이틀분의 이동식을 가지고 있어서 굶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면, 이제 무얼 해야 하나요?"
식사 후에 모인 자리에서 헤수스가 물어보았다.
빛 능력자인 헤수스는 어제 싸움에선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성격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어제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갔을 테고, 수색대가 남아서 우리를 찾고 있을 거야."
그의 말에 카트린은 지금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럼 수색대와 만나면 바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아니, 마법진에 마나가 채워지려면 일주일 정도 걸릴 거야. 그동안 이곳에서 어떡하든 버텨야 해."
일주일이나 이 봉인지에 머물러야 한다는 소리에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수색대와 안 만나도 되나요?"
이어진 미리사의 질문에 카트린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수색대가 어젯밤을 무사히 넘겼는지도 확신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그냥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어젯밤이야 상처도 입고 위험해서 못 가게 막았지만, 지금은 모두 어느 정도 회복했고 자신도 움직일 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움직이긴 어려워 고민만 깊어질 뿐이었다.
그때였다.
슈우우웅 펑!
멀리 숲 가운데에서 연기가 솟구치더니 하늘에서 폭발했다.
전에 보았던 신호탄이었다.
"수색대가 살아 있었나?"
모두 놀라 동굴 밖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색이 다른데…….'
저번에 보았던 신호탄의 색은 푸른색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신호탄 연기는 붉은색. 전과 다른 색이었다.
"저건, 구조 신호야."
카트린은 신호를 보고 이를 악물었다.
움직이는 것은 가능해도 아직 싸울 수 있는 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학생들을 보낼 수도 없고.
하지만, 나는 움직일 수 있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어젯밤에도 위치를 알지 못해 수색대를 찾지 못했다. 지금도 갈지 말지 고민 중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위치를 알려 주고 있는데,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뭔가 봉인지에 온 뒤로는 빡센 느낌이 들었지만, 카트린을 다시 살린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충분히 할 만했다.
내 말에 카트린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결국 허락했다.
"이번만이야. 다음부터는 내가 움직일 거니까."
어젯밤에 충분히 시달렸는지, 나를 따라오겠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브리아와 미리사는 오히려 미안해했고, 두 남학생은 슬쩍 시선을 외면했다.
날도 밝았고, 동굴에 남아 있는 인원이라면 강하지 않은 마물 정도는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었다.
나는 바로 출발했다.
다시 한번 나무 위로 뛰어올라, 원숭이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나무와 나무를 건너뛰어 숲을 가로질렀다.
한 번 해 봤다고, 이번에는 좀 더 속도가 빨라졌다.
그렇게 열심히 달려가서 기사들을 만났다.
어제 보았던 기사들이었다.
악셀 기사와 미로 기사가 부상을 당한 채로 마물을 상대하고 있었다.
바닥에는 기사 한 명이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어제 보지 못했던 기사였다. 나 대신 수색대에 참가한 기사인 듯했다.
나는 싸우고 있는 마물의 머리로 뛰어내려 대검으로 마물의 목을 베어 버렸다.
서걱.
놀란 기사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괜찮습니까?"
"어, 너는 그 공작가의 서자 맞지?"
서자란 말이 마치 별명처럼 불리는 느낌이었다.
마음에 안 들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마물을 쓰러뜨리고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자, 기사들은 바쁘게 자신의 상처를 치료했다.
포션을 붓고 붕대를 감는 것밖에 없었지만, 이 세계에서는 제일 나은 방법이었다.
붕대를 감으면서 미로 기사가 물었다.
"어떻게 밤에 살아남은 거지?"
"운이 좋았습니다."
솔직히 운도 좋았다. 조금만 삐끗했어도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터였다.
내 말에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실력을 알지 못하니, 운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곧바로 다른 질문을 했다.
"혹시 낙오조를 찾았어?"
제일 중요한 질문이었다.
"네, 같이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내 대답을 들은 기사들의 표정이 밝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