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제18편 지금 구하러 갑니다 (3)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깊은 숲속.
방패로 덤벼오는 마물을 날려 버린 뒤, 카트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 괜찮아?"
카트린의 말에 나무에 처박혀 있던 레오넬이 손을 흔들었다.
"아, 아직 살아 있어요. 방금 마물들이 돌아가지 않았으면 분명 죽었을 거예요."
다쳤지만, 미리사도 헤수스도 아직 살아 있었다.
죽거나 크게 다친 줄 알았던 레오넬도 움직일 수 있는 듯 보였고.
조금 전까지는 이 자리에서 모두 죽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운 좋게 마물들 일부가 돌아가서 살아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리 희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마물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마물들 일부가 빠져나가자, 포위한 채로 공격을 잠시 멈추었지만 지금 다시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숫자가 줄었지만, 그래도 이 일행으로 남은 마물을 막아 내기에는 버거워 보였다.
학생들 대부분은 싸우기 힘들어 보였고, 카트린도 지쳐 있었다.
카트린은 허리를 확인했다. 갈라진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작지 않은 상처였다. 움직일수록 상처가 더욱 벌어질 게 분명했다. 그러면 더욱 싸우기 힘들어질 텐데…….
하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카트린은 이를 악물었다.
고통이 온몸을 엄습했지만, 뒤에 있는 학생들을 지켜 내야만 했다.
이미 학생 한 명을 잃었다. 더 이상 잃을 수 없었다.
그르르릉.
마물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트린도 각오를 다졌다. 그래도 전보다는 눈곱만큼이지만 희망이 생겼다.
자신이 목숨을 바친다면, 적어도 남은 학생들은 살아서 돌아가게 할 수 있을지 몰랐다.
이 마물들을 쓰러뜨린 다음에도 돌아갈 길이 막막하기는 했지만, 뒷일까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생각으로 카트린은 검과 방패를 치켜들었다.
크앙!
맨 앞의 마물이 카트린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 무언가가 뛰어내렸다.
콰직!
마물의 머리에 두꺼운 검이 깊게 박혔다.
마물이 쓰러지고, 달려들던 다른 마물들이 놀라 멈추었다.
카트린은 놀란 눈으로 위에서 뛰어내린 사람을 쳐다보았다.
나는 마물에 박혀 버린 검을 뽑으며 카트린을 쳐다보았다.
"늦지 않았죠?"
* * *
예상보다 마물이 많이 남아 있었고, 다친 사람도 많아 남은 마물을 처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열심히 막아 내다 보니, 결국 마물들은 포기하고 물러났다.
다행히 더 다친 사람 없이 싸움을 끝낼 수 있었다.
이미 해가 진 뒤였고 숲 한가운데 있었지만, 당장은 움직이기 어려웠다.
나는 먼저 카트린의 상처를 확인했다.
아까 카트린을 봤을 때 옆구리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닌지 걱정했지만, 다행히 포션으로 치료가 가능한 상처였다.
"조금 아플 거예요."
"윽."
나는 포션을 상처에 붓고 허리를 붕대로 감쌌다.
카트린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잘 참아 냈다.
제일 심한 상처를 치료한 뒤에 학생들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은 없었다.
모두 살아남았지만,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라이드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라이드를 걱정했지만, 그나마 멀쩡한 나에게 그를 찾아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마물의 둥지 근처에서 실종되었다. 여태 그 마물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었는데, 다시 그 둥지로 가서 사람을 찾아오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부탁한다면 설렁설렁 찾아볼 생각도 있기는 했지만, 그보다 지금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했다.
통증을 참아 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카트린이 결론을 냈는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여기는 위험해. 안전한 곳을 찾아봐야 해."
"아직 안 됩니다. 상처가 심해요. 지금은 움직이면 안 돼요."
내가 말렸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상처는 괜찮아. 그보다 라이드를 좀 더 기다려 보고 싶었어. 하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어. 어두워졌으니 더 위험할 거야."
봉인지의 숲에 어둠이 까맣게 내려와 있었다.
나도 더 이상 막기 힘들었다. 그녀의 말대로 이곳에서 밤을 보내기는 어려웠다.
"오다가 본 곳이 있습니다. 우선 그곳으로 가죠."
내 말에 카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브리아를 불러서 카트린을 부축하게 했다.
브리아는 물론이고, 다른 학생들도 나와 카트린의 대화를 듣고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생각보다 카트린과 내가 훨씬 친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앞에서 일행을 이끌었다.
지금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일행 중에서 나밖에 없었다.
나는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려 주위를 살폈다.
마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놈들이었는데,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최대한 마물들을 피했다. 좌우로 크게 돌고, 뒤로 빠졌다가 다시 가기도 했다.
학생들은 이리저리 자꾸 바뀌는 방향에 불만을 품었지만, 카트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불만을 속에 담아 둔 채 묵묵히 나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두 배 이상 시간을 들여서 도착한 곳은 죽기 전에 묵었던 동굴이었다.
적어도 하루는 안전한 것을 확인했으니, 지금은 이곳보다 좋은 피난처가 없었다.
카트린을 동굴 안쪽에 누이고, 나는 그때처럼 나뭇가지와 수풀을 모아 동굴 입구를 가리기 시작했다.
다른 학생들도 지쳐서 동굴 안쪽에 누웠지만, 브리아는 나를 도와 나뭇가지를 날랐다.
시간이 지나자, 밖에서는 잘 안 보일 정도로 수풀과 나뭇가지로 동굴 입구를 가리는 데 성공했다.
"고생했어요."
"알렉스 공자가 고생했죠."
서로 고생했다고 이야기를 나눈 뒤에 우리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힘들 텐데, 한숨 자요."
내 말에 브리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모두 들으라고 크게 말한 건가.'
모두 들은 모양이었다.
누워 있던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감사 인사를 했다.
"나보다 교수님께 해야죠. 교수님이 모두를 지켜 주신 거예요."
잠든 줄 알았는데, 카트린의 말이 들려왔다.
"아냐. 내가 우리 조원들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감사를 표해야 하는 상대는 알렉스, 네가 맞아."
어쩔 수 없이 나는 모두의 인사를 받았다.
인사를 받기는 했지만, 솔직히 감사 인사 대신에 돈이나 유물을 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누워 있으니, 고통이 조금이나마 수그러드는 모양이었다.
카트린은 인상을 쓰며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를 찾아온 거지? 설마 낙오된 것은 아니겠지?"
카트린의 물음에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공주의 부탁으로 오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카트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운 일이기는 하지만, 권력을 그렇게 쓰면 안 되는데……."
본인은 상처로 끙끙 앓으면서도 공주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내가 대신 사과할게. 목숨을 내놓고 왔을 텐데, 어떻게 하든지 보상을 받게 해 줄게."
역시, 카트린은 내 마음을 아는 훌륭하신 교수님이었다.
카트린은 이어서 수색대 걱정을 했다.
"지금 수색대가 찾고 있을 텐데……."
이런, 깜박했다. 아니, 일부러 머릿속에서 밀쳐 두고 있었다.
수색대까지 생각하면서 카트린을 구하기는 어려웠다.
미안한 마음에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제가 한번 찾아볼까요?"
"안 돼. 밤에 수색대를 찾는 것도 힘들고, 밤에는 너도 위험해."
카트린의 말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색하고 있을 기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카트린을 구하는 것도 아니고 이 밤에 수색대를 찾아다니기는 어려웠다.
카트린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학생들도 이미 잠이 들었다.
죽기 전과 달리, 다들 충격이 덜한 듯했다.
카트린은 계속 걱정을 늘어놓았다.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그리고 불침번도 있어야 하는데……."
"오늘은 제가 서면 돼요."
"그리고……."
차근차근 대답해 주었더니, 결국 그녀도 잠이 들었다.
모두가 잠이 들자, 나는 입구에 쌓아 놓은 나뭇가지들을 넘어갔다.
동굴 옆 암벽에 등을 기댄 채로 어두운 숲을 바라보았다.
역시 동굴에 사람들을 남겨 놓고, 수색대를 찾기는 무리였다.
나는 미안한 마음을 묻어 두고, 가방 깊이 넣어 둔 주머니를 꺼냈다.
라이드에게 뺏어 온 그 주머니였다.
정신없이 움직이느라, 주머니 안을 아직 살펴보지 못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텅 빈 주머니처럼 보였다. 하지만, 라이드가 열심히 차고 다녔었다. 그냥 비어 있는 주머니는 아닐 것이다.
나는 주머니를 열어 안을 살펴보았다.
주머니 안은 까맸다.
별빛도 있었고 눈에 마나도 불어넣었는데, 주머니 안은 그저 깜깜할 따름이었다.
아무래도 평범한 주머니는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주머니 입구를 더 벌리고, 손을 조심스럽게 안에 넣어 보았다.
'이건 동전들인가? 반지 같은 것도 있는 것 같고. 몇 번 접힌 종이들도 있고.'
역시 평범한 주머니가 아니었다.
손을 집어넣으니 머릿속에 주머니 안의 물건들이 떠올랐다. 대략적인 형태에 불과했지만, 물건을 꺼내기에는 충분했다.
우선 제일 많은 동전들을 꺼내 보았다. 머릿속에 동전 이미지를 떠올리니 손에 동전들이 잡혔다.
잡힌 동전들을 주머니 밖으로 꺼냈다.
꺼낸 동전들은 별빛을 받아 노랗게 빛났다.
"금화잖아?"
아쉽게도 고대 금화 같은 것은 아니고 왕국 금화였지만, 금화는 금화였다.
"아직 많아!"
나는 주머니에서 열심히 금화를 꺼냈다.
한 움큼, 두 움큼, 세 움큼…….
주머니 크기보다 훨씬 많은 금화가 바닥에 잔뜩 쌓였다.
"100여 개 정도 되는 건가."
바닥에 쌓인 금화를 보니 배가 불렀다.
이쪽 세상의 평범한 가족의 한 달 생활비가 금화 하나 정도. 100개면 10년 생활비였다.
전생으로 따지면 3, 4억 정도 될까.
카트린과 던전에 갔을 때도 괜찮은 보물들을 찾았는데, 아쉽게도 환전을 할 수 없어 방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금화였다. 이 정도 돈이면 아카데미를 다니는 동안에 풍족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도 좀 보낼까."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다음에 떠올린 것은 반지 비슷한 물건이었다.
'제발 비싼 보석 반지이길.'
하지만, 아쉽게도 꺼낸 반지에는 보석이 박혀 있지 않았다.
"반지 형태의 도장, 아니 인장인가."
반지 앞에는 보석 대신에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설마 가문 인장은 아닐 테고."
무엇인지 모르는 물건이라 나는 다음 물건을 꺼냈다.
종이를 떠올렸는데, 손에는 가죽 비슷한 것이 잡혔다.
"파피루스인가?"
몇 번 접혀 있는 낡은 파피루스에는 지도 비슷한 것이 그려져 있었다.
"쩝, 보물 지도도 아니고."
이번에도 꽝인 것 같아, 바로 다음 물건을 꺼냈다.
이번에도 종이였다.
"이건 그냥 종이네. 아니, 편지인가."
접혀 있는 종이를 펴서 편지를 읽어 보았다.
편지를 읽는 동안에 내 눈은 점점 커졌고, 입도 벌어졌다.
믿기 어려웠다.
나는 먼저 꺼낸 반지와 지도를 쳐다보았다.
"설마 모두 진짜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