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제17편 지금 구하러 갑니다 (2)
휘익.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자, 가지가 아래로 푹 가라앉았다.
하지만, 봉인지에 있는 나무들은 마기 때문인지 밖의 나무들보다 훨씬 단단했다.
나뭇가지가 다시 위로 튕겨 올랐고, 나는 그 반동을 이용해 다른 나무를 향해 날아올랐다.
밀림에 가까운 숲이라는 것은 결국 나무들 간격이 좁다는 이야기였다.
그동안 육체적인 능력을 가지지 않은 다른 조원들과 같이 다니기 위해 땅 위로만 움직였지만, 혼자만 다닌다면 굳이 땅 위를 달릴 필요가 없었다.
내가 달려가는 아래로 마물들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전 같았으면 멀리 돌아갔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사실 나무 위로 움직인다고 아예 마물과 만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나무 위에도 마물이 있었다. 팔뚝만 한 거미 마물이 달려들기도 했고, 나뭇가지 흉내를 내는 벌레 마물도 있었다.
땅 위의 마물들은 사람보다 큰 덩치를 이용해 달려들었지만, 나무 위의 마물들은 자신의 몸을 숨긴 채로 갑자기 습격했다.
만일 내가 마나를 감지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이렇게 나무 위로 이동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리 마나로 습격을 알아차린 덕에 위에서 떨어지는 거미 마물을 단도로 베어 낼 수 있었고, 나뭇가지를 흉내 내는 마물을 피할 수 있었다.
그 밖에 여러 마물이 나를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나는 피할 것은 피하고, 처리할 놈은 처리하면서 빠르게 나아갔다.
다행히 아직 해가 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1시간 정도 나무 위를 이동하다 보니, 멀리 앞쪽에서 인간의 마나가 느껴졌다.
그리고 카트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더 가면 돼. 모두 힘내!"
멀리, 나무 사이로 카트린과 학생들이 보였다.
나는 멍하게 카트린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피가 대량으로 빠져나가 창백하게 변한 카트린이 아니었다. 우리 기사 학부의 교수님은 열심히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살아 있는 카트린을 보게 되니, 가슴 깊이 남아 있던 죽음의 고통이 깨끗이 사라지는 듯했다.
카트린 이외에 다른 얼굴들도 눈에 들어왔다.
피아르의 사촌인 미리사, 끝까지 살아남았던 브리아도 보였다.
죽었다던 기사 학부 학생과 상속 능력 학부의 학생도 싸우고 있었고.
그 뒤에 라이드가 있었다.
싸움은 내가 돕지 않아도 쉽게 끝날 것 같았다.
나는 달려 나가려는 몸을 억지로 멈춰 세웠다.
아쉽게도 이성이 본능을 이겼다. 나무를 움켜잡은 손을 노려보았다.
'젠장, 계획이고 뭐고 그냥 합류해 버릴까.'
지금까지는 계획대로였지만, 앞으로도 계획대로 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조금만 삐끗했다가는 카트린을 구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행과 함께 마물을 처리하고 있는 라이드를 보니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 이유가 많이 추가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죽음을 반복하며 그 고통을 이겨 낼 수 있는 원동력은 나를 죽인 자에게 복수하기 위함이었다.
작은어머니도 그렇게 떠나보냈고, 후작 때 용병들도 결국 죽여 버렸다.
다시 돌아가서 남작을 죽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 이번에 죽을 때도 라이드를 꼭 죽이리라고 다짐했었다.
카트린을 꼭 살리고 싶지만, 라이드를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젠장!'
나는 나무에 주먹질한 뒤에 다시 몸을 날렸다.
카트린과 학생들 쪽이 아니라 그들을 피해 앞쪽으로 나아갔다.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했지만, 방향은 달라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카트린 조보다 빨리 앞으로 나아가다가 나무 꼭대기에 올라 정면의 마나를 확인했다.
마나와 마기가 몰리는 곳. 마물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았다.
다행히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앞쪽에 마나와 마기가 뭉쳐서 회전하는 곳이 있었다.
그냥 마물들이 많은 곳이 아니라, 오래 한자리에 머물러 마나와 마기가 쌓인 곳이었다.
"저게 마물의 둥지인가."
나는 마나가 뭉쳐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마물의 둥지에는 금방 도착했다.
나는 마나를 감추고, 나무 위로 살금살금 다가가 마물의 둥지를 살폈다.
둥지에는 붉은 꽁지깃이 달린 다리 여섯 개의 도마뱀 마물들이 우글거렸다.
"저기 어딘가에 라이드가 찾는 물건이 있다는 건가."
눈에 마나를 불어넣고 열심히 살펴보았지만, 아쉽게도 그런 물건을 찾을 수 없었다.
"괜히 일찍 온 건가."
혹시나 먼저 찾을 수 있다면 카트린 일행을 중간에 돌아가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쉽게 되는 일은 없었다.
"혼자서 처리하는 것은 힘들어 보이고……. 역시 계획대로 해야 하는 건가."
마물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마물 숫자만 봐도 카트린이 당할 만했다.
결국, 나는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카트린 조가 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노을이 내려앉기 시작할 무렵.
카트린과 학생들이 마물의 둥지에 나타났다.
멀리서도 노을에 물든 카트린의 얼굴이 보였다.
마물의 둥지를 본 카트린은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학생들은 넋이 나가 버렸다.
"말도 안 돼!"
"이게 뭐야!"
하지만 다행히도 카트린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다들 물러서! 진형을 갖춰!"
카트린의 고함 덕분에 학생들은 정신을 차렸지만, 마물들도 그들을 보게 되었다.
쿠에에엑!
중앙에 앉아 있던 제일 큰 마물이 괴성을 질렀다.
마물들 모두가 카트린 쪽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마물들은 일제히 카트린과 학생들에게 달려들었다.
움찔.
마물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달려 나가려 했다.
하지만, 억지로 참았다. 지금 움직이면 나조차 마물의 파도에 휩쓸려 버릴 뿐이었다.
카트린이 이대로 당할 리가 없었다.
저번 생에 학생들과 카트린은 한참을 도망갔다고 들었다. 이번에도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마물이 들이닥치기 직전, 카트린이 앞으로 나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뒤를 지킬 테니 모두 달려!"
카트린의 고함에 학생들은 그녀의 뒤로 달려 나갔다.
'이럴 때는 잘도 도망치네.'
억지로 움직였다고 들었는데, 눈으로 보니 잘만 도망가고 있었다.
카트린은 달려드는 마물들을 베고, 방패로 쳐 내면서 학생들을 따라 뒤로 물러섰다.
"더 빨리!"
"옆으로 오는 놈들을 막아!"
카트린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마물들도 카트린과 학생들을 따라 둥지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카트린과 학생들, 마물들이 사라진 수풀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라이드가 수풀 속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그는 엎드린 채로 손을 뻗어 지나가는 마물들이 자신의 존재를 못 알아차리게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도둑질하기에 딱 좋은 능력이네."
결국, 마물들이 모두 인간들을 따라가자 둥지에는 커다란 마물 홀로 남게 되었다.
"무슨 자신감이지? 혼자 남다니."
두목이라 남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저것 보라지. 혼자 남은 덕분에 도둑놈은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이드는 반지를 확인하면서 조금씩 둥지 안으로 접근했다.
그가 움직이자, 나도 조금씩 둥지로 다가갔다.
라이드가 어느 정도 접근하자, 도마뱀 마물의 붉은 꽁지깃이 안테나처럼 위로 삐쭉 섰다.
마물의 머리가 라이드 쪽으로 움직였다.
라이드의 손이 다시 펼쳐졌다.
마물이 머리를 흔들었다.
라이드의 얼굴에서 땀이 떨어졌다.
잠시 뒤, 마물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꽁지깃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대단하네. 저 정도 마물에도 통하다니. 그런데 어떤 식인지 모르겠네. 자신의 존재만 숨기는 건지 주변 환경을 잘못 인식하게 만드는 건지.'
혹시 몰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라이드는 천천히 마물 옆으로 움직였다.
라이드는 조금만 잘못 움직이면 마물과 닿을 정도로 아주 가까운 곳까지 다가갔다.
마지막으로 반지를 확인한 뒤에 그는 조심스럽게 땅을 살펴보았다.
'젠장, 언제까지 찾는 거야.'
너무 느리게 움직인다. 카트린이 괜찮을지 모르겠다.
나는 천천히 움직이는 라이드와 그것을 멍하니 보고 있는 나 자신에게 속으로 마구 욕을 퍼부었다.
못 참고 움직이려는 순간, 라이드가 땅속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주머니를 보고 라이드는 환하게 웃었고.
나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라이드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대로 몸통 박치기!
퍽!
"악!"
라이드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고.
크르르릉.
라이드의 능력이 사라졌는지 마물은 머리를 흔들어 댔다.
"뭐, 뭐지?"
라이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긴, 천벌을 내려 줄 정의의 용사지."
정의와는 전혀 관계없는 인생이지만, 정의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 저 악당에게는 충분히 정의의 용사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 서자? 네가 왜 여기에……. 아니, 주머니, 그건 내 주머니잖아!"
나를 보고 혼란스러워하던 그는 내가 쥐고 있는 주머니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음, 정의의 용사라고 말하기는 무리였으려나.
"그러면 정의의 용사는 빼고. 시간이 없으니 천벌만 내릴게."
나도 죽기 전의 라이드처럼 어떻게 된 건지 열심히 설명해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고 카트린을 따라가야 했다.
"젠장!"
라이드가 나에게 손을 펼쳤다. 그 순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 봤자 어디 있는지 미리 봐 놓았고, 지금도 마나로 그가 있는 곳을 보고 있었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전방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퍽!
"크아아악!"
허공에서 피가 솟구치고, 라이드가 다시 보였다.
단검이 라이드의 옆구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
라이드는 고통으로 계속 비명을 질렀다.
저 정도 상처도 못 참다니, 너는 같은 곳에 상처를 입은 카트린에게 미안하지도 않냐.
나는 라이드에게 걸어가 단검을 옆으로 잡아 뺐다.
푸악.
단검이 뽑혀 나오며 상처가 더욱 크게 벌어졌다.
라이드는 입을 크게 벌린 채로 벌벌 떨었다.
놀란 그의 눈은 내 뒤를 보고 있었다.
"이크."
나는 급하게 뒤로 물러섰다.
콰직!
도마뱀을 닮은 마물이 입을 벌리고, 라이드를 덮쳤다.
"안 돼!"
마지막 비명과 함께 라이드의 음성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너무 짧은 응징이었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이 정도로 마무리하자."
나는 등에 지고 있는 대검을 뽑아 마나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 라이드를 열심히 먹어 치우는 마물에게 휘둘렀다.
서걱!
마물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역시, 평범한 마물이 아니었다.
팔을 아예 잘라 내려고 했는데, 어깨를 파내는 정도에서 멈추고 말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충분했다.
어차피 죽일 생각은 없었다.
크아아앙!
마물은 고통스러운 괴성을 내질렀다.
크앙! 크앙!
멀리서 다른 마물들의 괴성이 들려왔다.
자, 빨리 돌아오라고. 너희의 둥지와 두목이 위험해!
마물들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리니, 여기서의 내 할 일은 모두 끝났다.
나는 라이드였던 시체를 뱉어 내는 마물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뒤를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